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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단편

[오이카게] 부재 중

*과거날조 있습니다. 죽음소재, 모브x카게야마 있습니다.




"오이카와씨."


구름 사이로 주황색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하교할 때의 풍경은 왜 이렇게도 쓸쓸할까. 그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면 어김없이 후배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언제부터인가, 카게야마 토비오는 하교할 때도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하기에 집에 가서는 쉬어야한다고 말했다. 바보 같은 후배는 '저는 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니, 토비오쨩이 쉬는 거랑 오이카와씨랑은 별로 상관없거든! 오이카와씨가 쉬어야한다고! 그렇게 혼을 내도 카게야마 토비오는 졸졸 따라왔다. 알고 보니 집도 가까웠기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지만, 가끔은 후배가 제 곁에 있는 게 지나치게 의식될 때가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옆에서 떠들었다.


"오늘 저녁은 카레입니다. 오이카와씨는 뭘 드십니까?"

"글쎄. 집에 가봐야 알겠지?"

"카레는 몸에 좋으니까 카레를 드세요."

"토비오쨩 정말 제멋대로 말하네."


선배에게도 내키는 대로 툭툭 내뱉는 후배는 사교성이라곤 없었다. 아마 배구부 내에서도 그런 카게야마의 성격 때문에 곤란해 하는 후배들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뻔뻔한 얼굴로 배구부를 휘젓고는 했다. 그나마 선배한테는 공손해서 다행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여자애를 사귀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여자애..?"


카게야마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사귀지 않습니다."

"왜? 언젠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 말에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분할 정도로 까맣고 반들반들한 머리카락, 배구밖엔 모를 거라고 생각한 조그만 머리통은 땅을 향해 푹 숙이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괜히 쓰다듬어주며 나는 물었다.


"그럼 그 사람이랑 사귀게 될 수도 있겠네. 토비오쨩."

".....아니에요."

"응?"

"저 싫어해요."


그 사람. 카게야마는 코를 한 번 훌쩍였다. 뭐라고 말해야할 지 몰라 나는 머뭇거렸다. 후배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다. 짝사랑인가? 카게야마와 안 어울리는 단어였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이기도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손가락을 깊게 넣어 까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토비오쨩 답지 않네. 고백이라도 해보면?"

"....."

"아참, 토비오쨩은 어떻게 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오이카와씨는 자주 고백 받아봐서 알지만. 알려줄까?"


그제야 카게야마의 얼굴이 빼꼼 들렸다. 나는 무심코 그 파란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간단해. 할 말이 있다고 부르고, 토비오쨩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말하고.."

"말하고..?"

"얼른 차이면 되겠네요."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게 뭐에요. 오이카와씨는 매일 저 놀리기만 하고... 투덜거리며 말하는 귓바퀴가 왠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게야마의 집은 우리 집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조금 길을 돌아서 카게야마를 데려다주었다. 카게야마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등을 돌려 걸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점차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나는 카레를 먹으라고 말하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씻고 침대 위에 누우면, 보들보들하고 빨간 색이었던 조그만 귀가 생각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몇 주 후, 일학년의 카게야마 토비오가 호모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


어떻게 그 소문이 삼학년인 내 귀에까지 들려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부원들의 태도에서부터 드러난 위화감은 누군가의 말로 기정사실이 되었다. 배구부 일학년 카게야마 토비오는 호모새끼다.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 질이 나쁜 농담이었다. 남자는커녕 여자에게도 눈을 주지 않는 후배였다. 하지만 나는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카게야마의 말을 문득 떠올렸고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뱀처럼 끈질기게 교사 주변을 노려보며 맴돌았다. 그런 식으로 돌던 소문은 카게야마 토비오가 옥상에서 선배와 키스를 하고 있더라는 목격담이 나왔을 때 허물을 벗고서 독니를 드러냈다. 이를 단단하게 박고서 독을 뿜어낸다. 어딜 가나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일학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믿을 수 없는,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안녕. 토비오쨩. 오이카와씨랑 저 것 좀 버리고 오자."


멀쩡하게 체육관에 들어온 카게야마는 소문 따윈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들어오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나는 일부러 카게야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카게야마는 질질 끌려오듯 내 손목에 잡혀왔다. 순순한 태도였으나 짜증이 났다. 핑계거리였던 쓰레기봉투를 쥐고,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고서 나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요즘 오이카와씨보다 인기 많더라. 토비오쨩."

"? 무슨 말씀이세요."


카게야마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화가 났다. 


"요즘 토비오쨩한테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고는 있어?"

"....."

"남자 좋아한다고, 호모라고. 그런 거.."


비난을 하다보면 또 불쑥 그것들이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동성애자는 차별을 당해선 안 된다. 누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유였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초조해진 채로 카게야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답이 없자 이번엔 달래듯 말해보았다. 


"..좋아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

"그냥,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건..토비오쨩테도 안 좋으니까."

"....."

"..무슨 말 좀 해봐."


카게야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소각장에 쓰레기봉투를 집어던졌다. 손목을 놓으려는 순간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그거 맞아요."

"....뭐?"


나는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어린 후배의 얼굴은 창백해진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섬세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내가 너를 비난할까봐? 나는 아니라고 말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헐떡이는 것처럼 말했다.


"맞아요."

"...뭐가 맞단 거야. 오이카와씨한테 어서 설명해."

"...남자 좋아하는 거. 맞아요."


카게야마는 뒷걸음질 쳤다.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잡지 못했다. 먼저 가볼게요... 카게야마 토비오는 체육관으로 달려갔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


훈련은 평소대로 진행됐다. 카게야마는 어떤 수군거림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 태평한 얼굴이라, 나중엔 아무렇지 않게 부원들과도 섞였다. 나는 그 카게야마를 힐끔거렸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남자를 좋아한다. 남자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조그만 목소리도 떠올랐다.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코치가 모두를 불렀다. 새로 나온 비상연락망을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것을 받자마자 맨 밑으로 눈을 내렸다. 일학년들의 이름은 옹기종기 모여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은 그 중에서도 맨 앞이었다. 신경 쓰이는 후배를 다시 쳐다보면 카게야마 또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파란색의 눈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후다닥 연락망으로 내려간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남자를 좋아한다... 그 생각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 강박이 혐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씨."


훈련이 끝난 후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같이 가도 될까요?"


눈앞에 있는 건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작은 천재. 언젠가 자신을 앞지를 게 눈에 보이는 배구선수. 고집스러울 정도로 쫓아다니는 후배. 그리고, 남자를 좋아하는..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건지 카게야마는 또 졸졸 나를 쫓아왔다. 입을 다물고 있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따라온다.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해 입을 열면 자제 못하고 어떤 말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카게야마 또한 침묵했다. 집 앞에서야 오이카와씨.. 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


-아, 배구부 카게야마 토비오?

-걔 대단하대. 말만 하면 뭐든 다 해준다고..

-에이 설마. 그보다 남자한테 그러고 싶어한단 말이야?

-왜, 삼학년에 그.. 그런 선배들 있잖아. 좀 소문 안 좋은..


*


삼학년 교실로 카게야마가 들락날락 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만날 리가 없는 카게야마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카게야마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소문들을 헤치고 걸으면서도 그 소문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질이 안 좋은 놈들과 어울렸다. 제 발로 찾아가고 있으니 억지로 강요받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관심 없는 척 눈을 돌렸다. 배구부의 카게야마는 여전히 카게야마였다. 말을 거는 사람은 점점 줄었어도 끝까지 배구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모습이 안타까운지 자주 카게야마를 챙겨줬다. 나도 표면적으로는 카게야마와 같이 하교하는 걸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저 사교성 제로의 후배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선배들과 노는 걸 수도 있다. 그 중 한 명과 사귄다고 해도, 자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화가 났다. 카게야마가 눈에 보일 때마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늘 훈련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지? 뒤늦게야 나는 비상연락망을 기억해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낸 메시지는 카게야마의 말투처럼 바보같이 반듯했다. [왜?] 다시 묻자 한참 뒤에 답이 돌아왔다. [몸이 안 좋습니다.] 핸드폰 사용에 능숙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변명을 생각하느라 늦은 건지 궁금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을 보낸 후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점심시간이니 체육관에 가려다가, 세수나 할까 하고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바로 앞 시간이 체육이었는지 웃통을 벗고 머리에 물을 끼얹는 놈들로 득실거렸다. 비어있는 세면대는 없었다. 나까지 땀투성이가 되는 기분이라 얼른 빠져나왔다. 가는 길의 구교사 낡은 과학실에도 화장실은 있었다. 별로 쓰지 않는 곳이었다. 몇 년 전 거기서 여고생이 자살을 해 한창 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남자 학교에 들어와서 자살한 건지 뒷말이 많았다. 좋아하는 남학생이 있었는데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여기 선생이 임신을 시켰는데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 거다. 목을 매달자 덜 자란 아기가 빠져나왔다더라, 죄다 흉흉한 소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거기까지 가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건물 안에는 나무 바닥 냄새와 포르말린 냄새가 풍겼다. 자살 소동 이후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바닥은 삐걱삐걱 큰 소리가 났다. 화장실 문은 열려있었다. 다행히 청소 정도는 하고 있는지 깨끗했다. 그러나 들어서려는 순간, 나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대낮에 귀신이 나올 리가 없는 데도 소름이 돋았다.


"...ㅇ..."


귀신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신음소리라는 걸 알았기에 더욱 끔찍했다. 맨 오른쪽, 화장실 부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구역질이 났다. 


"좋아?"

"읏.."

"좋아하잖아."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입을 맞추는 소리, 그리고 또... 몸과 몸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상적인 것으론 들리지 않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났다. 차라리 여고생의 귀신을 보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학교에서, 지금 무슨.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하면 받아들이기보단 부정하게 된다. 나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음에도 고개를 저었다. 신음소리가 들렸다.

신음 소리가.


"카게야마. 이리 와봐."


카게야마의 신음 소리가.


"아으.."

"아이고 귀여워라. 아파?"

"...ㅇ..아.."

"이렇게 열심이어서 어쩌나. 오늘 연습도 빼먹고."

"다시는..ㅇ..다신..아!"


쥐어짜내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찔해졌다. 굳어있던 두 다리가 이번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이 풀렸다. 녹고 있는 양초처럼 그대로 바닥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들렸다. 확실히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방금 전까지 더웠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토기가 올라와 벽을 잡으며 비틀거렸다가, 입을 손으로 막고서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진정할 수 없었다. 나는 체육관으로 뛰어 들어온 후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머리를 벽에 대고서 한참을 있었다. 곧 점심시간은 끝나고,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어코 머리를 뗐을 땐 이미 5교시 수업 예비 종이 울리고 있었다. 멍하게 그 종소리를 들었다.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와이즈미가 찾는 메시지를 보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토비오쨩. 뭐해?


나는 체육으로 나와 대자로 누웠다.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내면,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카게야마에게 답이 왔다.


-수업 들었습니다.

-오이카와씨는 수업 안 들어갔어.

-왜요?

-글쎄다.

-아프신가요?


내용 없는 핑퐁이 계속 되었다. 아프다고 변명한 건 너잖아. 토비오쨩.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몸이 계속 떨려왔다. 


-토비오쨩.

-예.

-토비오쨩은 오이카와씨한테 거짓말 안하는 착한 아이지?


그 말에는 답이 늦었다. 잠시 후 카게야마는 답장을 보냈다.


-오이카와씨한테는 절대로 거짓말 안 할게요.


거짓말. 배구밖에 모른다던 후배의 말은 정말로 거짓말투성이였다. 


*


다음날 카게야마는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불편한 것처럼 허리를 매만져서, 코치는 카게야마를 구석에서 쉬게 했다. 카게야마의 시선은 토스를 올리는 내 모습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카게야마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연습을 못하는 상황인데도 카게야마는 나와 같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옷까지 전부 다 갈아입고 나서야 체육복을 입은 카게야마가 쪼르르 쫓아왔다. 오이카와씨, 저.. 따라오려는 카게야마에게서 나는 등을 돌렸다.


"오늘은 오이카와씨가 먼저 가볼 곳이 있어서, 따로 가자."

"아.. 예."

"...그리고 앞으로도 같이 가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

"예?"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묻는다. 내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그 얼굴을 보고서, 경멸을 담아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너 때문에. 카게야마 너 때문에 어제. 꾹 참고서 말하려는 목소리는 저절로 날이 서 있었다.


"이 정도는 바로 알아들어야지. 토비오쨩. 오이카와씨, 이제 곧 졸업인데 토비오쨩만 돌봐주기엔 신경써야할 게 많거든."

"....."

"..그리고."


카게야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신경이 뚝 소리를 내며 끊겼다. 고개를 돌렸다. 계속 쌓이고 넘쳐흘러 온 몸을 터트릴 것처럼, 오갈 데 없는 짜증과 분노를 쏟을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토비오쨩."

"예."

"토비오쨩은, 부끄러움도 없어?"


어떻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내 앞에서 저런 얼굴을 할까. 카게야마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서 체육관을 나왔다. 속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했다. 그래도 내 말이 카게야마에게 상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교문을 나올 때까지 뒤에서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누가 누구와 잤다는 소문들이 그동안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 토비오가 선배들에게 [대주고] 다닌다는 구체적인 소문은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소문에 대해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워낙에 은밀하게 돌았고, 운동부인 카게야마에게 따로 누군가 물어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는 카게야마에게 나쁘게 돌아갔다. 악질적인 소문들은 계속 해서 불어났고 나는 카게야마와 따로 하교를 했다. 


"뭐?"


엄마의 말에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왜,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너랑 같은 학교 후배 아니니? 널 알던데.."

"...그런데 왜.."

"그 집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는데, 그 애 혼자 있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하더라. 오늘 반찬 사고 있는 걸 보고 초대했어."

"....."


대답 없는 내 얼굴을 보고서 엄마는 이상하단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사이가 안 좋아?"

"....뭐.."

"안 오려고 하는 걸 억지로 엄마가 불렀어. 저녁만 먹이는 게 어때서."

"반찬만 주면 되는 걸 왜 집까지 불러요."


볼멘소리가 나오자, 엄마는 내 집에 내가 초대한 걸로 그러니? 하고 결국 잔소리를 했다. 카게야마와 같이 집에 오지 않은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방으로 올라와 휴대폰을 붙잡았다. 생각이 있다면 토비오쨩도 오지 않겠지. 그러면서도 나는 문자를 보냈다.


-오지 마


시간이 약간 흐른 후 답이 왔다.


-오이카와씨한테할말있어요 들어주세요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안 들을거야


이번엔 답이 오지 않았다. 


*


그날 밤 카게야마는 정말로 우리 집에 왔다. 엄마는 카게야마에게 이것저것 내밀었고, 카게야마는 부끄러운 얼굴로 밥을 먹어치웠다. 나는 밥알을 깨작거린다고 몇 번이나 등짝을 얻어맞았지만 사실 그건 카게야마에게 말을 좀 걸어보라는 엄마의 신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흘렀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게야마가 식탁에서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때 동물원 안에 있던 돌고래가 생각이 났다. 사람들 앞에서 재주를 부린 후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서 좁은 수족관을 부유하던 돌고래의 까만 눈.


"감사합니다. 저 가볼게요."

"좀 더 있다가지? 쓸쓸할 텐데. 우리 토오루 방에서 자고 가도 되고."

"괜찮아요."


일층 밑에서 두런두런 대화가 들려왔다. 일부러 방문을 열어두고 그 소리를 듣다가 견딜 수 없어져서 밑으로 내려갔다. 카게야마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나를 발견하고 어설프게 눈을 피했다.


"..토비오쨩 데려다주고 올게요."


엄마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슬리퍼를 구겨 신고 카게야마의 뒤를 따랐다. 카게야마는 서투른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도 보기 싫었다.


"오이카와씨한테 할 말 있다며."


카게야마네 집 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말했다.


"..안 들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

"갈게요."

"..토비오쨩, 진짜 호모야?"


대문에 열쇠를 끼워 넣던 카게야마의 손이 멈칫했다.


"그런 거...이상하잖아. 남자끼리 왜 좋아해. 미쳤어? 오이카와씨가 여자 소개시켜줄까? 어?"


나도 모르게 간절한 목소리가 되었다. 카게야마는 내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 뵐게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아치 짓 하고 다니는 그런 놈들이 그렇게 좋아? 배구도 빼먹을 만큼?"

"……오이카와씨가 그걸 어떻게 알ㅇ……"


나는 카게야마를 돌려세워 멱살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절망으로 까맣게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툭 건드리면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될 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문으로 카게야마를 밀어붙인 채 노려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카게야마는 저항 없이 바닥으로 밀려나갔다.


"오이카와씨 봤어! 봤다고! 낡은 과학실에서..!"

"...그걸..봤..?"


카게야마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울분에 차 소리쳤다. 


"오이카와씨한테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카게야마의 입술이 달싹였다.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카게야마는 말했다. 저 그 선배들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 안 좋아해.


"그러면... 도대체 누굴..."


나는 그 상황에서도 오직 그것만이 궁금했다. 카게야마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털지도 않은 채,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듯한 카게야마를 붙잡고 다시 물었다. 누굴 좋아하는 거냐고!!!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그게 제일 궁금하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대문을 열쇠로 열고는 고개를 저었다.


"말 못해요."

"……뭐?"

"오이카와씨한테 거짓말하기 싫으니까."


그리고 카게야마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망치듯이.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을 치는 카게야마의 모습은 처음이어서, 나는 그 떨리던 등이 도무지 잊히지가 않았다.


*


그 후로 졸업을 할 때까지 카게야마와 따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나를 피했고, 나 또한 억지로 다른 일에 눈을 돌렸다. 카게야마 토비오.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작은 천재. 언젠가 자신을 앞지를 게 눈에 보이는 배구선수. 고집스러울 정도로 쫓아다니는 후배. 그리고, 남자를 좋아하는.. 카게야마 토비오. 카게야마의 태도가 워낙에 아무렇지 않아서여서 그랬는지, 소문은 졸업할 때쯤엔 이미 흥미를 잃고 다른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너 들었어? 새로 온 여선생이랑 B반의 누구누구가 사귄대. 그러나 나는 카게야마에 대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마지막에 보았던 등을 생각했다. 마지막에 내게 보여주었던, 처참할 정도로 흔들리던 등.


*


아오바죠사이에 진학하고, 카게야마 토비오와 키타가와 후배들에 대한 소식만을 간간히 전해 들으며 나는 중학생 때의 일을 전부 묻을 수 있었다. 가끔 동네에서 카게야마와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카게야마아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카라스노에 갔단 소식은 놀라왔다. 그렇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카라스노에서 카게야마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국에 나가는 건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어도, 나는 배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올라가기 전 키타가와-아오바죠사이 출신들의 후배들이 모여 축하를 해주었다. 카게야마는 당연하지만 그 자리에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카게야마는 이사를 갔다고 했다. 가끔 도쿄에서 내려와 카게야마의 집을 지나치면, 정원에서 못 보던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다녔다. 지금 집에 있는 건 나이 많은 노부부라고 했다.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나는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바뀌지 않은 건 내 오래된 휴대폰 정도였다. 


오랜만에 미야기로 내려온 나는 이와이즈미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만 술잔을 떨어트렸다. 뭐? 내가 다시 묻자 이와이즈미는 씁쓸하게 카게야마의 말을 꺼냈다.


"...너도 몰랐지. 나도 이번에 들었어." 

"카게야마..카게야마가 뭐?"

"우리 왜, 중학교 때 이상한 소문 돌았잖아."

"....."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애초에 이와이즈미는 그런 소문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나도 이와이즈미처럼 카게야마를 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렴풋하게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바로 어제 겪은 일처럼 되살아난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카게야마가..죽었어?"

"양아치 몇몇이랑 좀 친하게 지냈잖아. 그게 협박당한 거였대. 사진 찍히고..그..이상한 사진들."

"....."

"그거 돌려받으려고 애쓴 모양이더라. 말해줬으면 도와줬을 텐데.."


배구 못하게 될까봐 어지간히 겁이 났나봐. 이와이즈미는 말하다 말고 눈을 가렸다. 코 안쪽에서 열이 차올라 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이와이즈미를 볼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떻게.. 그걸 알았어. 이와쨩."

"그 새끼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카게야마 불러내고, 괴롭히고 그랬나봐. 그래서 이사도 한 번 간 모양이더라고. 카게야마가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안 받아주니까 술 취한 채로 칼로.."


이와이즈미는 괴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내 얼굴이 무슨 표정일지를 생각했다. 짐작이 가지 않는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는 목에 메어 말했다.


"카게야마가.. 병원에 바로 가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

"너희 집이랑 가깝지 않았어? 옛날 집으로 가달라고 한 모양이더라고. 택시 안에서 그러고서.."


칼에 찔린 카게야마가 피를 흘리며 밤거리를 헤맨다. 손을 들어, 택시를 급하게 잡는다. 어디를 가냐는 택시 기사의 말에 카게야마는 곰곰이 목적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몰라도 카게야마는, 예전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나는 택시를 탄 카게야마를 상상했다. 피를 흘리며 창백해져가는 얼굴로,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그 애는. 토비오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아.. 기왕 왔으니 너도 인사 한 번 가자. 나도 갈테니까."


이와이즈미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 앞이었다.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서, 나는 우리 집 앞에 섰다가 또 카게야마의 집을 찾았다. 잠자고 있던 강아지가 깨서 조금 짖었다. 나는 그 짚 앞 가로등에 몸을 기댔다. 휴대폰을 켜자 여기저기 연락들이 가득했다.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서 지워버리며, 나는 맨 마지막에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주변 사람들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계속 휴대폰을 바꾸지 않았다. 귀찮아. 아직 쓸만해. 고장도 안 났는데 뭘. 그런 이유들을 대면서도 나는.


-오이카와씨한테할말이있어요 들어주세요


아주 오래 전이었으나 잊을 수 없는 그 날. 카게야마에게 온 문자를 지우지 않은 휴대폰을 쥐고서 나는.. 나는 내가 만약, 아주 만약에, 카게야마의 말을 들어주겠다고 답을 보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 지를 상상하고는 했다. 오이카와씨, 하고 나를 부르는 카게야마, 졸졸 쫓아와 귀찮던 카게야마, 거짓말은 할 수 없다는 카게야마. 조그맣고 빨개진 귀가 사랑스러웠다. 귀엽다고 생각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숨을 쉬기 괴로웠다. 토비오쨩. 고백은 말이야. 간단해. 할 말이 있다고 부르고, 토비오쨩이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말하고... 만약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날로 돌아가게 된다면 너는, 내게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네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알겠어. 토비오쨩. 들어줄 테니까, 그러니까 빨리 오이카와씨한테 와.


카게야마에게 늦은 답장을 보내고서 나는 가로등에 기대 눈을 감았다.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카게야마에게서, 토비오쨩에게서 답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은 눈에선 눈물이 흘러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조여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오이카게 전력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참여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