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자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 양산을 들고 있었다. 고개가 꺾인 오이카와의 눈엔 이상하게도 그 양산만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달린 레이스가 귀여웠다. 그리고 양산 아래에 반쯤 가려진 그 얼굴, 평범한 생김새의 입술은 오이카와를 보며 "어머나" 라고 말했다. 오이카와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몸이 붕 떴다. 아, 나는 지금? 머릿속은 1초가 1년처럼 늦게 흘러간다. 오이카와는 땅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정적, 그러나 곧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차문을 열고 급히 뛰어오는 발들, 사람들의 웅성거림, 괜찮아요? 누군가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오이카와는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뜨거운 열기가 울컥 치밀어 올라 숨이 막혔다. 어? 오이카와는 숨을 쉬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뒤늦게 돌로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조금씩 퍼졌다가 점차 심장에서부터 혈관을 따라 고통이 흘러내렸다. 헉..일어서려고 해봐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건 손만이 아니었다. 머리, 가슴, 팔, 다리.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다리가 신경 쓰였지만 감각은 없었다. 어라, 나,
나 지금 죽는 거야?
오이카와 토오루의 하루
새 배구화를 사오는 길이었다. 손에 든 종이봉투 안의 내용물을 위해 오이카와 토오루는 두 달 치의 용돈을 모았다. 신상 배구화를 신어봤을 때는 그 기쁨보다 먹지 못한 우유빵들이 생각났으나, 어쨌거나 오이카와는 배구화를 샀다. 드디어 샀다. 고교시절의 마지막 기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생일도 내일이니까, 그동안 열심히 한 오이카와씨한테 주는 선물! 오이카와는 들뜬 기분으로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빨리 집에 돌아가 다시 신을 제대로 신어보고 싶었다.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오이카와는 초록불이 되자마자 맞은편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오이카와씨는 그 다음부턴 기억이 안 나는데."
"당연하죠. 당신은 바로 차에 부딪혀서 정신을 잃었으니까요."
오이카와의 앞에 선 여자는 입만을 생긋 올려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습관인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바로 앞에 서있는데도 얼굴은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 양산이 핑그르르 돌았다. 작고 귀여운 레이스 또한 여자의 머리 위에서 팔랑거렸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오이카와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오이카와씨는 어떻게 된 거고 여긴 어디야?"
"오이카와 토오루군은 죽었답니다."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실제로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감정은 죽음과 동시에 거세됐는지 많이 슬프진 않았다. 죽은 자신보단 남아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더 컸다. 생일이라고 오이카와씨의 선물을 준비해놨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쓰러진 거리 위였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내리쬐는 하얀 햇빛을 양산으로 가리며, 여자는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기억나세요? 어머나, 라고 제가 말했었죠?"
"....."
"사실은 말이에요. 오이카와 토오루군이 죽으면 안됐거든요."
"...네?"
"그게 참 곤란하게 됐어요."
여자는 양산을 접었다. 반을 가리던 얼굴은 전부 다 보였지만 여전히 흐릿한 인상이었다. 오이카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목소리는 귀에 제대로 닿지 않고 또렷하던 입조차도 우물거리는 모양으로 시야에서 천천히 뭉개졌다. 오이카와는 여자의 얼굴을 보는 걸 포기하고서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으면 안됐다는 뜻은 뭔데."
"말 그대로에요. 죽으면 안 될 사람이 죽었네요. 오이카와군이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저도 놀랐다구요."
".....아니, 오이카와씨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일종의 행정착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은 제 모습을 볼 수도 없거든요."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되니 놀라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화가 났다. 오이카와는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양산을 가져왔다. 검은 양산을 머리 위로 펼치자 무척 시원했다. 이래서 여자들이 양산을 쓰는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작 하기로 한 일이 양산 쓰기라는 게 스스로도 조금 웃겼다. 그러나 태연해 보이는 행동과 달리 양산으로 가린 눈동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행정착오라고?
"그래서?"
오이카와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오이카와씨는 죽으면 안됐는데 죽었으니 다시 살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곤란하단 거예요."
여자는 이제야 대화를 할 마음이 들었다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제 실수긴 하더라도 함부로 되살릴 수는 없거든요."
"...."
"저도 오이카와군에게 무언가를 받아야만 그게 가능해요."
"실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 정말 여유롭네.."
오이카와는 양산을 조금 더 내린 채 생각했다. 무언가라니, 지나치게 무책임한 말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요구하는 건 소중한 것. 목숨과 같은 가치를 지닌, 소중한 사람들의..
"그런 건 요구하지 않아요."
여자는 오이카와의 생각을 읽은 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마 저는 오이카와군이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를 골라 가져갈 것 같네요."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다면 분명 오이카와군에게도 필요 없는 거겠죠."
그러니까 그건 제가 가져가요. 제법 매서운 말투. 여자는 손을 내밀어 오이카와의 얼굴을 가린 양산을 붙잡았다. 환한 햇빛이 정수리로 쏟아지나 싶더니 눈을 깜박이자, 마치 양산 속에 도로 들어온 것 같은 어둠이 펼쳐졌다. 그 어둠 속에서 불현듯 오이카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배구화를 담은 종이봉투가 그대로 손 안에 걸려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눈을 들자 마침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우르르 옆을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이번에는 조금 천천히 횡단보도를 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집에 돌아와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 살폈다. 옛 이야기들처럼 혹시라도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부모님이나 사촌동생이나 혹은 친구들이 없어졌을까봐 하나하나 다 확인했다. 전화를 하고 라인메시지를 보내며 오이카와는 무엇이 없어졌는지를 열심히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전부 다 제자리였다. 오이카와가 이상한 메시지를 보낸다는 게 소문이 났는지 이와이즈미에겐 먼저 메시지가 왔다. [오이카와, 너 뭐하냐. 생일 깜짝 파티 같은 건 없으니까 그만 찔러봐.] 그쯤 되니 오이카와는 박스 안의 배구화를 들여다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전부 다 오이카와씨의 꿈이었어?
아찔했던 현기증은 완전히 가셨다. 흐릿하던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은 길에서 깜박 졸아 기묘한 꿈을 꾸었던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여기는 편이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까닭 없이 그는 불안했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이 뭔데? 오이카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알지 못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은 더해갔고 쉽게 피곤해졌다. 저녁을 먹고 몸을 씻고 올 때까지도 오이카와는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꿈이라고 하자."
씻고 자리에 누운 오이카와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이라니, 성적표 같은 거?"
당연하게도 거기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으으, 신음한 후 몸을 옆으로 돌렸다. 책상 아래에 둔 새 배구화가 보였다. 여자의 검은 양산이 떠올랐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방금 전까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던 몸은 노곤하다 못해 어디에 맞은 것처럼 아팠다. 무거운 몸을 다시 한 번 뒤척이고서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없어진 건 찾지 못했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도 전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설마 뭔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건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성적표 정도는 없어져도 되니까... 오이카와는 턱이 아프도록 하품을 한 번 한 후 눈을 감았다. 몇 십분 뒤면 생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다.
3.
오이카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으로 많은 축하메시지를 받았다. 학교에 가면 토오루, 토오루 하며 여학생들이 따라왔다. 선물이 든 봉투들을 받고 있으면 지나가던 놈들이 부러움 반, 짜증 반이 섞인 얼굴로 쳐다봤다. 어쩌겠어. 오이카와씨가 잘생긴 탓인 걸☆ 오이카와는 의기양양하게 선물들을 책상 위에 쏟아놓았다. 그런 시작이었다. 평소와 같은 수업, 평소와 같은 연습. 체육관에 가면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자마자 후배들이 생일 축하한다는 말부터 건넸다. 환대를 받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뭐야."
"이와쨩, 빨리 선물 내놔."
"무슨 선물."
"흐음. 킨다이치?"
공을 정리하던 킨다이치가 예! 하고 뛰어왔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당장 저 못생긴 이와쨩이 뒤에 숨기고 있는 걸 뺏어와."
"예? 어..저..이와이즈미씨는 못생기지 않았..."
중간에 낀 킨다이치만이 어쩔 줄을 모르고서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결국 한숨을 쉬고서 뒤에 감췄던 걸 꺼냈다. 와! 오이카와가 잽싸게 받아들었다. 오이카와가 괜찮다고 말했던 옷가게의 로고가 적힌 봉투였다. 봉투 속을 들여다보는 오이카와의 곁에서 킨다이치도 궁금한지 얼굴을 기웃거렸다.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화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수증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생일 축하한다!"
"킨다이치. 이와쨩이 지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시끄러워 망할카와!"
오이카와는 자리를 피하는 이와이즈미의 등을 보며 크게 웃었다. 킨다이치는 눈치를 보다가 이와이즈미 쪽으로 뛰어갔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도, 그리고 후배들-같은 중학교 출신인 쿠니미와 킨다이치 까지도 모두 오이카와의 선물을 잊지 않았다. 그게 기쁘면서도 조금 허전한 감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선물더미에 거의 파묻혀있던 오이카와는 아, 하고 휴대폰을 열었다. 수많은 메시지들 중에 오이카와가 찾고 있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바쁜가? 건방진 후배가 선배의 생일에 축하 인사도 하지 않고 말이야.. 고작해야 몇 개월 정도의 선배였어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는 깍듯한 대접을 바랐다. 생긴 것과 달리 천성이 운동계인 후배는 오이카와의 요구에도 대부분 따라주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오이카와의 생일엔 존경의 의미로 축하 메시지를 넣을 것. 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카게야마는 그걸 쭉 지켰다.
대부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짤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중학교 땐 그래도 요구르트와 함께 직접 만든 카드를 줬었는데... 오이카와는 휴대폰을 넘기며 피식 웃었다. 이거 마시고 서브 알려주세요! 오이카와씨! 라고 소리치던 후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트레칭을 하던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왜 웃어?"
"아니, 갑자기 토비오쨩 생각이 나서,"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키득거렸다.
"왜, 토비오쨩이 나 중학교 때 말야, 그때 써줬던 촌스러운 카드 기억해?"
아마도 미술 시간에 만들었을 법한 조그만 카드는 어디서 구했는지 배구공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오이카와 인생에서 가장 촌스러운 카드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그것을 다른 카드들과 함께 보관했다. 언젠가 카게야마가 이 카드를 보여주며 토비오쨩 이거 기억나? 하고 놀릴 심산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이와이즈미를 보면 이와이즈미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카드..?"
"어, 이와쨩도 옆에 있었잖아?"
"..난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이와이즈미를 쳐다봤다. 뭐가?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여전히 의아했다.
"토비오쨩? 그게 누군데?"
"...어?"
"토비오쨩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물었다. 오이카와가 잠시 대답하지 못한 사이 감독이 이와이즈미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일어나는 모습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감독에게 바로 달려가 버리고 만다.
"누구, 라니..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농담인가? 농담이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마침 쿠니미가 오이카와 쪽으로 걸어왔다. 쿠니미쨩? 오이카와는 조금 급한 목소리로 쿠니미를 불렀다. 그러나 불러놓고 보니 할 말은 없었다. 헛기침을 한 오이카와는 쿠니미에게 잘 지내지? 같은 질문이나 던졌다. 쿠니미는 '또 무슨 장난인지..' 같은 얼굴로 오이카와를 보고 있었다.
"쿠니미쨩."
"..예."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그렇죠.. 저 가볼까요?"
"아니, 잠깐."
오이카와는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쿠니미에게 물었다.
"토비오쨩도 잘 지낸대?"
"예?"
"토비오쨩 말이야. 연락 아직 안 하나?"
쿠니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쿠니미 곁을 지나가던 킨다이치도 오이카와는 잡아 세웠다. 두 번째로 오이카와에게 붙들린 킨다이치 역시 쿠니미와 눈을 마주치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토비오쨩. 너희 둘 다 알잖아?"
"..저.."
킨다이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뭐?"
"토비오쨩.. 이라니."
그게 누구죠? 킨다이치가 물었을 때 오이카와는 깨달았다. 검은 양산의 여자가 가져갔다는, 오이카와가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카게야마 토비오.
4.
오이카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상 서랍을 열었다.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은 전부 다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받았던 편지 뭉치들을 오이카와는 죄다 방바닥으로 꺼냈다. 하나하나 펼쳐서 보았지만 카게야마가 자신에게 줬던, 바보 같은 카드는 없다. 급하게 휴대폰을 열어 연락처의 이름을 확인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은 여전히 없었다. 몇 번을 더 확인하고 나머지 편지까지 전부 꺼내본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카게야마 토비오. 키타가와 제 1중 출신으로 카라스노 고교의 배구부 세터. 학년은 달라도 같은 포지션으로 경쟁했고, 함께 배구를 했다. 그 기억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박혀있는데도 카게야마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오이카와는 당황한 나머지 아래층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나서야 그는 머리를 들었다.
"어머, 이게 다 뭐니?"
"아..정리할 게 있어서."
"빨리 내려와. 먹고 싶어 하던 케이크 사왔어."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편지를 서랍 안에 쑤셔 넣고 내려와 그는 식사를 하고 생일케이크를 먹었다. 그러나 맛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토비오쨩이 사라진 거라고? 설마? 오이카와는 잠시 모두가 짜고 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누가 생일에 그런 장난을 칠까. 그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찻잔을 두 번이나 쏟았다. 꾸중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죄송하다고만 말한 오이카와는 서둘러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카게야마의 집이라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비슷한 위치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일부러 아오바죠사이보다 조금 더 먼 카라스노로 갈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가볍게 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갑자기 사람이 사라져버리는 일 따위, 다른 학교에 간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비오쨩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다. 조급한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문은 열려 있었다. 오이카와는 문패를 확인했다. [카게야마] 라는 이름을 보자 그는 매우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굳어있던 얼굴이 그제야 살짝 펴졌다.
초인종을 누른 오이카와는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언젠가 전화해본 적이 있는 카게야마의 어머니였다. 누구세요? 그 말이 눈물 나도록 반가워 오이카와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오이카와입니다. 중학교 때 카게야마의 선배였는데요."
"아아, 그런가요."
"잠깐 카게야마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기계음이 울렸다. 문이 열린다. 오이카와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세요?"
갈색머리 남자아이가 오이카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따라 나온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토비오, 무슨 일이니? 하고 물었다.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아니었다.
"토비오쨩?"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
"...너..."
낯선 남자아이는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카게야마보다 조금 작은 키. 갈색 머리카락에, 비슷한 색의 눈동자. 카게야마와는 딴 판인 [카게야마 토비오]는 오이카와를 수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명패를 확인했다. [카게야마] 라는 문패까지는 오이카와의 기억과 맞았다. 그러나 저 문을 열고 나온 건 오이카와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는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켜 어지러웠다. 검은 양산을 쓴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아마 저는 오이카와군이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를 골라 가져갈 것 같네요....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다면 분명 오이카와군에게도 필요 없는 거겠죠.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사라져버리길 바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기억을 헤집어가며 점차 불안해졌다. 중학교 땐 카게야마의 존재가 무척 힘들었다. 배구는 다 같이 하는 거라는 걸 잊은 채 혼자서 카게야마를 이겨내려고 애썼다. 한계까지 다다라 카게야마를 때리려고 한 적도 있다. 카게야마의 재능이 무섭고 부러워 없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래서인가? 그래서, 그 여자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카게야마를 데려간 건가? 그러나 결코 사라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시끄러운 경적이 들렸다. 오이카와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길 한가운데를 걷고 있던 모양이었다. 차가 다시 한 번 짜증스럽게 경적을 울렸다. 오이카와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쌩 지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오이카와는 멍하니 자리에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곧바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왜 그러나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주위는 조용했다.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5.
오이카와씨!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오이카와를 졸졸 따라다녔다. 토비오쨩, 오이카와씨는 토비오쨩 전담이 아니니까 저기로 갈래? 오이카와가 대놓고 타박을 해도 작은 카게야마는 공을 들고서 언제나 비슷한 말을 했다. 오이카와씨! 저도 가르쳐주세요. 저도 킨다이치처럼 가르쳐주시면 안 됩니까? 그 말에 오이카와는 혀를 쭉 빼물었다. 오이카와씨 절대로, 싫어든!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존재 자체가 싫었던 후배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시할 수 없는 자극제가 됐다.
배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같은 팀만 있어서 가능한 스포츠도 아니었다. 맞은 편, 코트 너머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순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자신을 동경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이기고 싶어 하는 건방진 후배. 존경한다면 생일 축하를 매년마다 하라고 했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꼬박꼬박 지켰다. 그것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매년 똑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어느 순간부턴 기다리기도 했다.
오이카와는 눈앞에 선 여자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토비오쨩의 메시지가 오지 않았어."
"...그렇네요."
검은 양산은 달을 가렸으나 오히려 낮보다 더 또렷하게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가져가겠다고 한 게 토비오쨩이었어?"
"오이카와군에게 말했잖아요.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를 가져가겠다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간질였다.
"저는 그래서 그렇게 했답니다."
"왜, 하필.."
"어라."
여자는 망연자실한 오이카와를 보며 조금 웃었다.
"기억을 지우는 걸 잊어서 돌아왔더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당신에겐 설명이 필요했군요."
"무슨 설명.."
"카게야마군이 신경 쓰이는 거겠죠. 이곳의 카게야마군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 거기서 또한 행복하게 살 거예요."
여자는 오이카와에게 양산의 안쪽을 보여줬다. 오이카와는 홀린 듯 그 양산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카게야마가 보였다. 자신은 모르는 이들 틈에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몇 번 보지 못한, 즐겁게 웃는 얼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누군가 닦아주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카게야마는 고맙다고 말했다. 오이카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자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카게야마군.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놨어요."
"....."
"이제 오이카와군의 인생에서 변수는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잘못한 대가로 모든 변수들을 다 없애줬거든요."
"그렇다면.."
카게야마가 서브를 올렸다. 오이카와를 보고 따라한 것과는 다른 폼이다. 오이카와는 양산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물었다.
"토비오쨩이 내 인생의 변수였단 말이야?"
"바로 알아듣네요."
"...."
"중학교 때 당신은 자칫 엇나갈 뻔했죠. 그런 위험요소를 당신의 곁에 둘 수는 없었어요."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이젠 그런 식으로 카게야마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해야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턱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은 서로 떨어져서 살아요. 그게 좋을 거예요."
"....."
"모두 행복하게 정리를.."
"좋을 대로 이야기하지 마."
여자의 눈동자 속에 화난 오이카와의 모습이 박혔다. 오이카와는 여자의 양산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졌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멋대로 변수니 뭐니 하면서 떠들지 말라고."
"오이카와군."
"카게야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단 이야기잖아?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 도대체 나를, 카게야마를 얼마나 무시하는 거야."
흥분한 나머지 평소의 말투와도 달랐다. 여자는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왜 화를 내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의 소중한 것들 중엔 카게야마군은 없었어요."
"......"
"단지 소중하게 여기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다구요. 그러니까 가져갔는데, 제 선택이 틀린 건가요?"
여자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결국 소리쳤다.
"소중하게 여기는 걸 무서워하고 있다면, 정말론 소중해서 견딜 수 없단 뜻이잖아!"
"......"
"나는 토비오쨩이,"
"....."
"..토비오쨩을! 나는!"
오이카와의 마음이 다시 한 번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건방지고 귀여운 후배.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상대. 카게야마를 향한 것들은 언제나 오이카와의 마음속에 꾹꾹 눌러놓아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절대로 입 밖으로 내고 싶지도 않고 낼 수도 없는 그런 것들. 매년마다 기다려온 메시지를 오이카와는 소중하게 읽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아마도...그 건방진 후배가 오이카와에겐.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게 꼭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오이카와는 땅바닥의 양산을 쳐다보았다. 펼쳐진 양산 안쪽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그 양산을 주워 돌려주며 오이카와는 말했다.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가 없는 곳에서 웃는 건 싫어. 당장 돌려놔."
"....하지만 오이카와군."
"아, <소중하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 이라고 했지?"
오이카와는 여자의 앞에 바짝 다가와 그녀를 노려보았다.
"토비오쨩은 오이카와씨에게 무척 소중해!"
".....어머나."
열렬한 고백에 여자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오이카와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아무것도 줄 수 없으니 빨리 되돌려놔."
"....사람의 마음은 모르겠네요. 저는."
여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이카와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군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
"어쩔 수 없네요. 대신 다른 걸 가져갈 수 밖에. 미안하지만 이번에 가져간 건 돌려주지 않아요."
그래도 저 때문에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것을 제 선물로 드릴게요.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여자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야?"
대답 대신 검은 양산이 펼쳐졌다. 아주 오래전에 겪은 것 같은 아찔한 현기증.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글쎄요, 저는 누구일까요? 제 생각에 저는 아마도...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어둠 속이었다. 오이카와는 주위에 팔을 뻗어 더듬거렸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무언가 닿았다. 그것을 그는 꽉 쥐었다.
6.
종이봉투가 손 안에 걸려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눈을 들자 마침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졌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우르르 옆을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횡단보도 앞에 선 채로 종이봉투를 열어보았다. 비어있다.
"..뭐지?"
어디다가 물건을 빠트리고 왔나. 오이카와는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이카와는 하는 수 없이 빈 종이봉투를 그대로 들고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카라스노의 체육복을 입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를 보자마자 조금 입술을 삐죽인다. 오이카와는 짓궂은 표정으로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이런 곳에서 토비오쨩을 만나다니."
"..오이카와씨는 무슨 일로.."
"으응, 그게...오이카와씨도 잘 모르겠어."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빈 종이봉투도 수상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딱히 대답을 못하자 고개만 갸웃하다가 그 옆에 섰다. 같이 신호등을 기다리며 오이카와는 불현듯 떠오른 걸 말했다.
"토비오쨩."
"예."
"내일 무슨 날인지 알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은 못하는 후배의 얼굴엔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키득키득 웃으며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거짓말하면 혼나요? 토비오쨩."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오이카와씨한테 모른 척 하는 건 토비오쨩이고.."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응, 무슨 날인데?"
그렇게 물으면 카게야마는 조금 안절부절 못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이다. 오이카와씨 생일이잖아요. 축하드립니다. 오이카와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져 카게야마의 동그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으응, 오이카와씨 생일이야. 내일 제대로 메시지 넣어야해?"
"....우으."
"싫어?"
"아니요.."
"이번엔 직접 만든 카드 같은 거 없고?"
"없습니다!"
카게야마를 놀리는 사이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뀌었다. 카게야마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기에 오이카와는 오랜만에 선배 기분을 낼 겸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 졸졸 따라오는 카게야마의 뒤로 검은 양산을 쓴 여자가 지나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 오이카와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윤곽이 흐릿한 여자는 오이카와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곤 그대로 가던 길을 간다.
우와, 카게야마가 옆에서 감탄했다. 무엇을 보나 싶어 고개를 드니 해가 져가는 하늘이 주황색으로 반짝거리며 빛났다. 토비오쨩은 아직도 애네, 노을 보고 감탄하고. 그렇게 말하자 카게야마는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라구요. 오이카와는 피식 웃었다.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곧 생일이다. 왠지, 오이카와는 내일도 괜찮은 하루가 계속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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