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Q/카게른/ㄴ황제와 까마귀

[오이카게] 2. 황제와 까마귀




160403 오이카게 전력으로 쓴 "횃대"(클릭하시면 새창으로 연결됩니다) 앞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황제와 까마귀"-"횃대" 순이지만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횃대를 읽지 않으신 분들도 읽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mm





어디 한 번, 뭐가 태어나는지 볼까? 아오바죠사이의 아름다운 황제가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것은 두 팔로 끌어안아야만 겨우 들 수 있는 알이었다. 단단한 알의 겉면은 하얗다못해 푸르스름한 윤기까지 돌았다. 황제가 친히 사냥을 나갔다가 가져왔다는 알은, 아마도 신수神獸의 일종일 것이니 그 진귀함은 틀림없으나 무슨 알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본디 사람과 네발 달린 짐승은 알을 낳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새나 물고기의 알이 아니겠냐는 말이 나왔다.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는 저 속에서 개구리가 나와도 놀라지 않겠노라고 말하곤 자신의 궁에서 돌보게 했다. 


청옥으로 단을 만들고 감히 흑룡포를 덮어 만든 자리는 정체모를 알에겐 과분했으나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황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매일 알을 닦으라고 명했는데, 덕분에 궁인들은 매 정해진 시간마다 돌아가며 장미수를 적힌 비단으로 알을 문질러야했다. 황제의 몸이라고 해도 이렇게 닦지는 않았을 것이다. 궁인들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황제의 유희에 어울려주었다. 푸르스름한 알은 궁으로 와 그렇게 석 달을 보살핌 받았다.


석 달 하고 하루 째 되는 날 알을 닦을 이는 궁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궁녀였다. 순번대로라면 이 궁녀의 차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석 달을 보람 없이 알만 닦는 것이 싫다하여 누군가 꾀를 부린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알 따위, 꼭 제 손으로 닦지 않아도 무어가 문제란 말인가. 결국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궁녀는 윗사람에게 떠밀려 조심스럽게 황제가 머무는 궁으로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려준 황제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했다. 사람은 많을 텐데도 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 궁을 걸으며, 궁녀는 손에 든 붉은 비단을 꽉 쥐었다. 설마 황제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 하긴 마주치면 또 무슨 소용이야. 황제는 신과 같았다. 궁녀는 또한 어렴풋하게 보았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만개한 꽃처럼 호사스러우면서도 거목처럼 위엄이 넘치던 용안. 그런 신과 같은 황제의 눈에 고작 자신과 같은 궁녀가 밟힐 리 없었다. 궁녀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걸으며 생각했다. 젊고, 아름답고, 그리고 그것이 영원하다면 세상에 부러울 일이 없을 터였다. 


"...여기 계시네."


눈짓으로 길을 안내받아 들어간 방엔 소문으로만 듣던 '알'이 있었다. 궁녀는 얼른 다가가 준비한 장미수에 비단을 적셨다. 장미꽃잎을 동동 띄운 물에선 좋은 향기가 풍겼다. 하지만 그 향기가 찬 물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건 아니기에, 궁녀는 금세 새빨갛게 얼룩진 손을 호호 불었다. 매일 닦아 반들반들한 알을 문지르며 궁녀는 중얼거렸다.


"차라리 나도 알님으로 태어났다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러면 신 같은 황제께서는 나를 아껴주시고, 귀하다 하시면서, '어허! 누가 감히 네게 이런 험한 일을 시킨 것이냐. 당장 그 자를 불러 오거라. 치도곤을 한 후 혀와 손을 자르고 궁에서 내쫓아주마!' 화를 내겠지. 그러면 자신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머, 폐하! 소녀를 그렇게 아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녀 그저 폐하께서 같이 계셔주시면 아무래도 좋사옵니다.' 궁녀는 잠시 그런 황홀한 상상을 했다. 그녀는 꽁꽁 언 손으로 알을 닦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취했고, 그래서 알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궁녀는 히죽 웃었다.


"폐하께서 오시면 그땐 내가,"


내가 폐하의 가장 총애 받는 여인이 되는 거야. 궁녀로 들어온 이상 황제의 사랑을 받고싶단 욕심은 분명 있었다. 황홀한 꿈을 입에 담는 순간 젖은 비단을 쥔 손이 미끄러졌다. 어린 궁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알의 표면엔 처음 보는 무늬가 박혀있었다. 궁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붉은 비단이 바닥으로 나풀나풀 떨어진다. 뻗은 손끝이 알에 살짝 닿았다가, 움켜쥐려는 순간 그대로 뒤로 사라져간다. 파란 알에 달라붙어있는 거미줄 같은 무늬. 매일 매일 정성스럽게 닦은 알. 궁녀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무늬, 무슨 무늬지. 알은, 단 위에는 알은 더 이상 없다. 무늬, 아니야. 알에 금이 갔어. 알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어. 


"....!!"


비단이 바닥으로 소리 없이 떨어짐과 동시에 도자기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또한 맑은 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궁녀는 덜덜 떨며 단 뒤를 무릎으로 기어갔다. 깨진 알의 잔해와 그리고, 궁녀의 눈에 흠뻑 젖어있는 까만 무언가. 그것이 날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건 잠시 뒤에야 깨달았다. 


"...알, 알님?"


궁녀는 제발 [그것]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얀 막이 붙어있는 날개가 궁녀의 소리에 반응해 꿈틀거렸다.



***



"태어났다고?"


아오바죠사이의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후궁들을 들이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피할 핑계가 필요할 때였다. 알에서 과연 무엇이 태어났는지 보러가겠노라는 황제의 부드러운 축객령이 떨어졌다. 그나마 황제가 가까이 두는 근위대장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다시 말했다.


"폐하. 제발 좀 새겨들으시옵소서."

"이와쨩. 어차피 난 후손을 빨리 남겨야할 필요도 없고, 굳이 여인을 들여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걸."

"단지 황손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오이카와는 습관적으로 웃어주었다. 이와이즈미의 말이 맞았다. 황제는 까마득한 시간을 살고 있으나 신하들은 그렇지 못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들의 여식을 고루고루 후궁으로 뽑아 치세를 안정시키는 것 또한 황제의 중요한 일이었다. 이전 오이카와는 몇 명의 후궁들을 두었으나 그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새 후궁을 뽑아야하는 때에 오이카와가 미적거리니, 여식을 가진 '새로운' 신하들이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황제는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뭐, 그것은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일단은 오이카와씨 다녀올게.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말을 잘랐다. 이번에는 붙잡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헛기침만 내뱉는 신하들을 그대로 두고 알을 찾았다. 무엇이 태어났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 알만한 개구리가 태어났을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커다란 개구리를 키우는 남자에게 딸을 바치고 싶어 할 부모는 없겠지. 


오이카와는 입술 끝만을 올려 웃었다. 주름이라곤 하나도 없는 깨끗하고 흰 피부는 오이카와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상하지 않고 있다. 그는 걸으며 또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하고 윤기가 도는 고운 손. 손을 보며 오이카와는 후궁으로 두었던 여인들이 생각했다. 아무리 하얗게 분칠을 해도 이마와 목과 손등의 주름은 숨길 수 없어, 그녀들은 나중엔 오이카와가 자신을 찾는 걸 반기지 않았다. 나이 든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잊히는 일보다 더욱 끔찍한 듯 했다. 나이가 드는 걸 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오이카와 자신이 늙지 않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프지도 늙지도 않는 영원한 몸.


오이카와는 어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궁녀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까마득한 옛날보았던 얼굴과 달랐다.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삶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눈 한 번 깜박했는데 그사이 한 세월이 흘러간 느낌이었다. 문 앞에 서자 이미 궁인들이 무릎을 꿇고 오이카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황제의 뒤에 선 궁녀가 문을 열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먼저 문고리를 잡자 황급히 물러서며 알린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오이카와가 직접 문을 밀었다. 그는 권태를 물리게 해줄 무언가가 이 안에 있기를 바랐다. 애초에 정체불명의 알을 주워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색다른 흥분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코끝에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궁 곳곳에 피워두는 향과는 달랐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냄새가 방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태어났기에 이런 냄새가 풍길까. 오이카와가 눈짓했다. 따라온 궁녀가 얼른 자리로 오이카와를 모신다. 궁녀가 알을 닦다가 그만 깨버렸다는 소리는 들어 알고 있었다. 알 속의 것이 죽었다면 처벌했겠으나 마음에 들면 상을 내려야겠지. 오이카와 토오루는 생긋 웃으며 높은 자리에 앉았다.


"볼까?"

"어서 모, 모셔라."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궁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목소리에 의문을 품기도 전 오이카와의 눈이 번뜩였다. 안쪽 방에서 나온 건 창백하게 질린 여자였다. 그 '궁녀'일 것이다. 침착하지 못한 모양새였다. 감히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가 놀라서 엎어지듯 고개를 숙인다. 오이카와의 뒤에 선 궁녀가 못마땅하여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나기보단 궁금하여 오이카와가 물었다.


"설마 알 속에서 태어난 게 눈 앞의 궁녀인가?"


엎드린 궁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이, 그. 더듬는 사이 메구미,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턱을 괴고 궁녀를 쳐다보던 오이카와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다.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메구미, 한 번 더 부르더니 도로록, 뛰어나온다. 오이카와는 저절로 그 발자국을 쫓았다. 어설픈 걸음으로 비틀거리다가, 힘든 지 걸음을 멈췄다가, 또 푸드득, 하는 소리. 푸드득.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 구미."


메-구미, 걸음걸이만큼이나 서툰 발음으로 궁녀를 부르는 나온 것은 발가벗은 남자아이였다. 머리카락은 달도 뜨지 않은 밤처럼 새까맣고, 눈은 그 밤 속 고요한 호수물결처럼 검푸르렀으며, 갓 태어난 팔과 다리는 아이의 것 답지 않게 사슴처럼 길쭉했다. 아름답게 자라나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란 오이카와의 눈에도 들 만큼 만족스러운 외모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건 다리보다 먼저 쓰는 법을 익힌 것 같은, 한 쌍의 검은 날개. 


오이카와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남자아이는 곧바로 궁녀의 곁에 앉았다. 메-구미. 메-구미. 태어나 처음 들은 것은 저 이름일까. 오이카와는 도로 자리에 앉았으나 눈은 소년에게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그의 몸에선 이상한 윤기가 돌고 있었다. 메구미-궁녀는 기겁을 하며 소년을 밀어냈다. 새도 사람도 아닌 모습이 징그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다시 소년이 달라붙으니 하는 수 없이 치맛자락으로 소년의 손을 닦아주었다. 


"폐하. 알에서 나온 건 이.."


궁녀는 소년을 무어라고 불러야할 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 이분 이십니다. 소년은 궁녀가 자신을 황제에게 소개하는 데도 앞을 보지 않았다. 파란 눈동자는 궁녀가 닦아주는 손만을 보고 있었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소년의 몸에 도는 윤기가 하얀 막 때문임을 알았다. 갓 태어난 짐승의 새끼를 어미가 혀로 닦아주는 걸 오이카와는 본 적이 있었다. 소년 역시, 혼자 닦아낼 수 없으니 궁녀에게 의지해 몸을 부탁하는 것이다. 얌전한 소년을 보며 오이카와는 무척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이것은 쓸모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손을 내밀었다. 


"뭐가 나올 지 기대했는데 까마귀가 나왔네. 이리로."


궁녀 메구미는 얼른 소년을 밀어 보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어서 가보세요. 그러나 소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여전히 메구미, 메구미 뿐이었다. 곁에 서있던 궁인들이 결국 소년을 떼어내자 화난 듯 날개를 파닥거린다. 메-구미! 소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도 결국엔 황제의 앞으로 끌려와 발치에서 꿈틀거린다. 서투른 다리로 도망을 가긴 버거워보였다. 오이카와는 새삼스럽게 웃으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얼굴은 오이카와를 보자 조금 풀렸다. 알아듣지 못할 말로 감탄하다가, 막이 덜 닦인 반들반들한 손가락이 오이카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궁인들을 말리고서 오이카와는 소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황금실로 자수를 놓아 반짝이는 옷이 신기한지, 옷자락을 꽉 쥐었다가 입에 물어보기도 한다. 가까이에서 움직일수록 기분 좋은 향기가 퍼졌다. 오이카와는 키득거렸다.


"오이카와씨의 옷이 좋나보지?"

"메, 구미."

"말할 줄 아는 건 그 이름 뿐 인거야? 까마귀쨩은 바보네."


황제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말했다.


"오이카와 토오루."

".....?"

"오이카와야."

"오,"


발음이 힘든지 파란 눈동자 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감히 황제의 이름을 말할이가 없기에 오이카와로서도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몇 번을 더 말하자 까마귀는 입을 뗐다.


"오이카아."

"오이카와."

"오이, 카, 와."

"좋아. 잘했어."

"오이카와."


눈을 깜박거리던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궁녀 메구미는 벌벌 떨다가 시선이 쏠리자 다시 땅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까마귀가 손으로 궁녀를 가리켰다.


"메-구미."

"....."

"메구미."


오이카와는 부드러운 얼굴로 웃었다.



***



소년의 남다른 외양을 참고하여 학자들은 푸른 알이 [카게야마]라고 불렸던 까마귀 수인족의 것임을 오이카와에게 알렸다. 옛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카게야마가 어째서 아오바죠사이에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라진 신수가 황제 앞에 나타났으니 길조가 아니겠느냐고 마무리가 되었다. 정말로 남다른 발육이라, 태어나자마자 걸었던 카게야마는 며칠이 지나자 뛰기도 했고, 또 거기서 일주일이 지나니 날개를 전부 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기를 즐겼다. 그것을 버릇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황제가 껄껄 웃으며 좋아하니 누구도 벌을 내리진 못했다. 극진한 총애였다.


황제는 소년이 말을 익히자 카게야마의 토비오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는 은혜를 내렸다. 새를 닮은 날개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미동의 이야기는 금방 퍼졌다. 또한 여인을 마다하는 황제가 특이한 소년을 곁에 두고 즐기시니 남색을 하는 것이 아니냔 말도 돌았으나, 황제는 신과 같으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다만 그렇게 카게야마를 아낀다면 카게야마를 돌보는 궁녀를 후궁으로 올려야한다는 신하들의 주청이 계속 되었다. 황제는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토비오쨩 말인데."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가 놓는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쏜 화살은 멀리 떨어진 과녁에 정확히 꽂혔다. 곁에 서있던 이와이즈미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와이즈미에게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활시위를 당기며 말했다. 


"까마귀들은 반짝이는 걸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친구인 이와이즈미에게 묻는 말이니 이와이즈미 또한 황제가 아닌 오이카와에게 편하게 대답한다. 오이카와가 쏜 화살이 다시 한 번 과녁에 꽂혔다. 앞전과 같은 자리에 꽂혀 화살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것을 보고도 오이카와는 또 화살을 집어 들었다. 평소보다 유독 화려한 황제의 옷차림에 눈을 두며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과하게 입은 거냐?"

"과하다니."


광택이 도는 황금색의 비단에, 또한 금실로 빼곡하게 용을 수놓았다. 이와이즈미는 아까부터 옆에서 번쩍거리는 오이카와 덕에 눈이 부셔 과녁을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오이카와의 외모가 그보다 못하다면 어릿광대처럼 우스운 꼴이 됐겠지만, 그게 또 어울려 이와이즈미는 단지 [과하다]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저 자체로 태양 같군. 이와이즈미는 계속 웃는 낯이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오이카와를 힐끔 쳐다보았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입어야 토비오쨩이 좋아하니까."

"으음."

"그리고 말이야, 까마귀들은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만큼이나 어미를 좋아한대."

"어미라면,"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사람."


궁녀 메구미. 황제의 총애를 받는 소년이 따르는 여인이었다. 오이카와는 무슨 상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어린 궁녀 또한 욕심을 드러내며 오이카와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솔직한 사람을 오이카와는 싫어하지 않았다. 욕심을 아는 만큼 다루기 쉽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가 손짓했다. 과녁 옆에 서 있던 궁인들이 서둘러 화살을 뽑았다.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 까마귀 때문에 궁녀를 황후로 올리기라도 하겠다는 거면 관둬."

"설마."

"듣자하니 평이 안 좋더라고."


카게야마 토비오를 등에 업은 궁녀는 지위는 아직 없어도 기고만장하게 군다는 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궁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라고 명해놓았다. 그 일을 이와이즈미는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싶어 꺼낸 말을 오이카와는 웃어 넘겼다.


"궁녀까진 아니더라도 토비오쨩이 원한다면 후궁으로 삼을 수는 있지."

"폐하."

"그렇게 부르는 자리 아니거든요."

"오이카와. 진심이냐?"


이와이즈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토비오쨩]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오이카와. 너답지 않아."

"얼굴은 예쁘게 생겼고, 진귀한 날개도 달려 있잖아?"

"...."

"그렇다고 해둬야지."

"...무슨 소리야."


이와이즈미는 영문을 알지 못해 되물었다. 오이카와는 미소를 지었다.


"홀대받는 기분이 새롭기도 하고."

"...홀대?"

"토비오쨩에겐 내가 처음이 아니야."

"...."

"그게 좀 신기해."


오이카와의 마지막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살이 쏘아졌다. 명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도 또다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결핍을 처음 깨달은 황제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토비오쨩이 본 게 오이카와씨라면 오이카와씨를 가장 좋아해줬을까?"

"...그렇게 거슬린다면."


이와이즈미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궁녀가 문제라면 궁녀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된다. 그 간단한 일을 오이카와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다시 한 번 과녁을 쳐다보며 말했다.


"응. 거슬린다면 없애버릴까?"

".....황제 폐하께서 원한다면 문제될 일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를 가장 좋아할 것 같진 않아."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리고 먼저 정리해야할 일이 있어."


슬슬 무슨 수를 써야겠네. 즐겁다는 듯 말하는 얼굴은 진지했다. 오이카와는 과녁을 노려보았다. 활시위가 흔들림 없이 당겨졌다가, 순간 멈췄다. 오이카와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부름에 이와이즈미 역시 오이카와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늘에서 빙글빙글 도는 까만 그림자가 보였다. 어느새 훌쩍 큰 카게야마는 몸만큼이나 큰 날개를 펼치고서 내키는 대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여기에 있다는 건 아마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궁녀가 종종 걸음으로 오이카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연이라는 듯 인사를 하고 있으나 이미 오이카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궁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느라 궁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폐하."


궁녀가 오이카와에게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오이카와가 듣지 못하자 궁녀는 다급히 카게야마를 불렀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카게야마가 훌쩍 뛰어내렸다. 검은 깃털 몇 장이 떨어지고, 오이카와는 흙에 더러워진 카게야마의 맨 발을 보았다.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손을 내밀었다. 카게야마는 잠깐 메구미를 쳐다보곤 오이카와를 향해 다가왔다. 


"오이카와."

"응. 토비오쨩."

"예쁘다."


카게야마의 손이 화려한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이와이즈미는 놀란 눈을 했다가 자리를 피했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 궁녀가 남은 자리에서 다시 입을 연건 카게야마였다.


"메구미. 이거 예뻐."

"...폐하. 아직 카게야마님께서 예법이 아직 부족하시니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예법은 필요 없어. 토비오쨩은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돼."


오이카와는 웃으며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살갗이 거칠거칠했다. 오이카와는 힐끔 궁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궁녀는 오이카와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였다. 역시 알기 쉬웠다. 


"오늘따라 메구미쨩도 아주 눈부시네."

"황송하옵니다. 폐하."

"아름답게 꾸몄으니 오이카와씨의 눈이 즐겁군."

"폐하께서 보살펴주신 은덕입니다."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젊고 예쁜 궁녀에겐 오이카와가 보내준 장신구들이 잘 어울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좋은 물건을 많이 보내주었으나 카게야마가 입은 옷은 오이카와의 성에 차지 않는 것뿐이었다. 분명히, 좋은 물건을 보내라고 일러주었는데. 오이카와가 직접 골랐던 보석과 비단들은 신기하게도 궁녀에게 가 있었다. 카게야마를 훑어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궁녀가 얼른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님께서는 날아다니길 좋아하시고, 또 옷을 쉽게 더럽히시니 가까이에 있는 제가 보석을 달면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카게야마님. 그렇지요? 궁녀가 초조한 목소리로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멀뚱멀뚱 궁녀를 보았다. 오이카와의 눈에 자꾸만 흙이 묻은 카게야마의 발이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대꾸했다.


"반짝이는 거 좋아. 메구미도 좋아."

"토비오쨩을 상대하려면 보통 부자가 아니면 안 되겠는걸."


오이카와는 화려한 황룡포를 손수 벗었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몸에 직접 덮어주었다. 본인이 어떤 총애를 받는지 가늠할 수 없는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였고, 메구미를 포함한 궁녀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이걸 가져가."

"오이카와?"

"더럽혀도 괜찮아. 마음대로 입어도 돼."

"우와.."

"날아다니는 것도 좋아?"

"제일 좋아."


카게야마는 품이 큰 황룡포를 온 몸에 둘렀다. 예쁘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황룡포를 둘러 쓴 카게야마를 옆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활을 집어 들었다.


"오이카와씨가 하는 거 볼래?"


카게야마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불어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으나 활을 잡은 자세는 그대로였다. 조용한 적막 속을 가르고 곧 화살이 날아간다. 과녁 가운데에 정확히 박힌 화살을 보며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날개를 퍼덕였다.


"오이카와! 저거!"

"토비오쨩도 해볼래?"

"응."

"좋아. 조심해야 돼."


활을 잡은 카게야마는 신이 난 듯 즐겁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자 오이카와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눈을 뒤로 돌리면 궁녀가 카게야마를 노려보고 있다. 오이카와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잔뜩 구긴 얼굴은, 방금 전까지 아름다웠던 여자의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그 표독스러운 얼굴을 살폈다. 오이카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얼른 카게야마를 향해 웃었다.


"응. 토비오쨩."

"이거."


카게야마가 내민 손 안엔 연한 색의 나뭇잎이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나 흔한 잎사귀. 어디서 가져왔어? 라고 물어보면 아까 올 때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대답한다. 오이카와는 잎사귀를 받았다. 흠 하나 없는 나뭇잎은 햇살을 받자 녹색으로 반짝거렸다. 오이카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예쁜 잎사귀네. 토비오쨩, 고마워."

"반짝반짝해."

"응. 정말 그러네."


이 까마귀에겐 보기 좋은 거라면 보석이나 잎사귀나 다 똑같을 테지. 오이카와는 무지에서 나온 순수함이 꽤 기꺼웠다. 



***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는 어명을 들은 메구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처음엔 그저 겁이 나 아무런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메구미의 뒷배가 되어주겠다고 나선 신하들이 있었다. 상으로 황제를 모시게 해달라고 말하게 한 것도 그들이었다. 사람도 아닌 것을 아끼는 황제의 심중은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그 소년을 발견하여 인생이 달라졌다. 메구미는 쌓인 보물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런 귀한 물건들을 짐승에게."


황제가 직접 보내는 물건의 대부분은 카게야마의 것이었다. 잘 모를 때엔 메구미는 그것을 제가 가졌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충고를 듣고 카게야마에게 돌려주었다. 까마귀는 값어치도 모르고서 몸에 황금을 끼얹고 놀았다. 메구미는 짜증이 났지만 우선 겉으론 카게야마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오래가진 못했다.


"카게야마님! 카게야마님!"


신경질을 내며 부르자 하늘을 날아다니던 카게야마가 메구미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기죽은 표정이었다. 볼 때마다 구박하니 짐승이라도 겁을 먹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삐죽거린 카게야마가 다가오자 메구미는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날지 말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렇지만."

"어째서 제 말을 안 들어주세요? 절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아니야!"


카게야마는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가시지 말라니까요! 카게야마의 손목을 꽉 잡은 메구미가 화를 냈다. 어찌된 영문인진 몰라도 카게야마는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본 메구미를 따르게 된다고 했다. 메구미의 입장에선 어딜 가도 졸졸 따라오니 귀찮기 그지없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그런 카게야마 만을 황제가 아낀다는 사실이었다. 카게야마를 보러 찾아오는 황제를 유혹하라고 신하들은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꾸며도 황제는 이 볼품없는 까마귀만을 쳐다볼 뿐, 자신은. 자신에겐..!


"아야!"


메구미는 흠칫 놀랐다. 잡힌 손목이 아파 카게야마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님? 카게야마를 불러보아도 흠칫 놀라 메구미의 눈을 피한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짐승에게 짜증이 난 메구미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을 때,


"토비오쨩."


고귀한 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메구미가 얼른 바닥에 엎드렸다. 오이카와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카게야마는 밝게 웃었다. 오이카와! 끌어안고 활 쏘는 법을 알려준 후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보고 웃을 수도 있게 되었다. 경계심을 가졌던 어린 짐승이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반들반들하고 부드러운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토비오쨩. 오이카와씨가 보고 싶었어?"

"응."

"오이카와씨가 좋아?"

"좋아."


카게야마가 고분고분 응하자 오이카와의 입매가 더욱 더 위로 치켜 올라갔다. 순한 짐승을 다루듯 몇 번 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래. 좋아하는 거 잔뜩 가져왔으니까 옆방에 가봐."


올 때마다 보물들을 손에 쥐어주니 카게야마가 싫어할 리 없었다. 카게야마는 탄성을 지르고서 궁녀들을 따라 갔다. 혹시나 황제가, 자신이 카게야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았을 까봐 덜덜 떠는 메구미는 덜덜 떨었다. 하지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들고 쳐다본 황제의 얼굴은 태연했다.


"토비오쨩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네."

"...폐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여자야. 오이카와씨가 후궁을 잘 들였어."


오이카와는 자리에 앉아 메구미를 쳐다보았다. 칭찬을 할 때마다 욕망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오이카와는 그것이 결코 싫지 않았다. 황제는 웃으며 턱을 괴었다.


"토비오쨩은 진귀한 성수이니 오이카와씨가 잘 돌보고 싶거든. 메구미쨩 덕에 오이카와씨가 아주 편해."

"제게 맡겨만 주시옵소서."

"토비오쨩을 보러 앞으로 오이카와씨가 자주 올 텐데 말이야."


은밀한 이야기를 하듯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절로 메구미 또한 숨을 죽였다.


"왔는데 토비오쨩이 궁 안에 없다면 오이카와씨는 실망하겠지."

"...예?"

"날개가 있는 새는 함부로 날아다녀서 큰일이야. 저렇게 크니 새장에 넣어둘 수도 없고."


그렇지? 오이카와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메구미를 쳐다보았다. 그 웃음에 메구미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가 눈짓하자 메구미의 앞에 보석으로 만든 함이 올려졌다. 메구미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날이 잘 선 가위가 있었다.



***



황제의 사랑을 받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겠다던 메구미였으나 막상 가위를 들자 두려워졌다. 그러나 황제는 분명히 경고했다. 까마귀가 궁 안에 없으면 오이카와 또한 메구미를 찾지 않을 것이다. 궁녀로 들어와 황제의 여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품었다. 그것이 이뤄졌는데 여기서 바보같이 망설이기는! 메구미는 황제가 내려준 가위를 들고서 카게야마에게 다가갔다. 까마귀는 자고 있었다.


메구미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카게야마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여인처럼 얼굴선이 섬세하고 고왔다. 그러나 여자 같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메구미의 짜증을 돋는 것이었다. 군살이라곤 없는 길쭉한 팔과 다리. 태어났을 때부터 달려있던 날개에선 좋은 향기가 풍기고, 피부는 따로 보살펴주지 않았을 때에도 제법 부드러웠다. 황제는 이 까마귀를 품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메구미를 안은 적 또한 없다. 메구미는 짐승에게 질투를 하고 마는 자신이 무척 싫었다. 난 사람이야. 이까짓 짐승에게...! 메구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인기척을 느낀 카게야마가 뒤척거렸다.


".....!"


메구미? 잠이 덜 깬 카게야마는 곧바로 메구미를 알아보고서 불렀다. 저렇게 부르는 목소리도 싫었다. 메구미는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었다. 카게야마가 멍한 얼굴로 메구미를 다시 불렀다.


"까마귀야. 넌 나를 좋아하지?"

"....메구미?"

"그러니까 한 번만."


날 좋아한다며? 밤중에 은빛 가위가 기괴하게 번뜩였다. 메구미는 떨리는 손으로 카게야마의 날개를 콱, 잡았다. 



***



모두 잠든 밤 시끄러운 소동이 일었다. 후궁이 황제가 아끼는 신수의 날개를 해치려 했다는 것이었다. 안쪽의 힘줄을 자르기 위해 날붙이를 넣었던 후궁은 모든 것이 폐하의 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가 그 신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는 사람들은 후궁의 변명을 믿지 않았다. 필시 황제의 자비를 믿고 함부로 날뛰다가 투기까지 해버린 게 분명했다. 애초에 궁녀일 때부터 보란 듯이 값비싼 보물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잖아? 분수를 몰랐던 거지. 모두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친히 궁을 찾아와 상황을 정리했다. 후궁은 다시 궁녀의 신분으로 돌아가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궁녀를 후궁으로 추천한 신하들 또한 좌천되었다. 후궁을 올려 황제의 신임을 사려던 신하들의 주청도 일시적이나마 사라졌다. 홀로 궁에 남아 놀란 카게야마를 달래며 오이카와는 속삭였다. 토비오쨩. 가엾기도 하지.


"많이 놀랐겠구나."

"메구미, 아팠어."


놀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머리를 기댄 채 벌벌 떨었다. 아팠어, 아팠어. 가위가 반이나 들어갔던 날개는 붕대로 감쌌으나 카게야마는 고통스러워했다. 생전 처음 겪는 아픔이기에 더욱 힘든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 떨리는 손을 잡고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토비오쨩을 해치려했으니까 네 곁에 둘 수 없어."

"....."

"아쉬워?"

"....."


오이카와가 생각해도 훌륭한 계획이었다. 충동적으로 가져온 알에서 길조인 신수가 태어난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이용해 궁녀를 후궁으로 들였고, 또 후궁을 내쫓았으며, 탐욕스럽게 권력의 맛을 보려 애쓰던 신하들을 손쉽게 제거했다. 당분간 후궁을 들이란 소리도 없겠지. 약간의 죄책감은 오직 이 어린 까마귀에게만 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구미쨩이 보고 싶어?"


카게야마는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는 놀라는 시늉을 했다가 천천히 웃었다. 


"그렇게 토비오쨩이 따랐는데도?"

"메구미, 무서워."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메구미를 카게야마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사람의 악의를 전부 다 알지는 못했지만, 카게야마는 메구미를 무섭다고 생각했다. 무섭다는 대답에 오이카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조차 자제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설마 이렇게 되리라곤 오이카와 또한 예상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오이카와씨는?"


머리에는 황금 관. 반짝이는 비단옷. 목과 팔에 무거울 정도로 치장한 금붙이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서 머리를 들었다. 다정하게 웃는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머리를 기댔다. 날개를 착 접어 오이카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오이카와는 좋아."

"왜?"

"반짝거려."

"이 옷들이 말이지."


오이카와가 쿡쿡 웃자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 여기."

"....."

"처음부터."


카게야마의 손이 얼굴을 더듬는다.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손을 오이카와는 잡았다. 한 손이 붙잡혀도 카게야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른 손을 꺼내어 여기랑, 또 여기. 하고 오이카와의 팔과 손을 만졌다. 오이카와는 자신을 보자마자 다가와 손을 내밀던 카게야마를 기억해냈다. 



처음부터. 



오이카와씨의 전부가 반짝거린단 뜻이지? 그렇게 물으면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해본 적 없던 황제의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결핍된 마음이 무언가로 차오른다. 무지하고 솔직한 목소리가 오이카와를 휘둘렀다. 아마 평생 이 까마귀는 오이카와가 자신을 이용해 날개를 다치게 했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리고 모르게 해야 했다.


"...그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나머지 손까지 잡아 제 손 안에 쥐고 말했다.


"토비오쨩이 원한다면, 이 오이카와씨는 전부 토비오쨩 거야."


상냥하게 말하는 목소리 속엔, 시작된 애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월간 오이카게(http://monthlyoikage.tistory.com/) 제 3호 참여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Q/카게른 > ㄴ황제와 까마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1. 횃대  (10) 201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