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검을 허리춤에 차고 타국의 여자를 안아든 모습은 여자문제만큼은 숙맥이라던 이와이즈미답지 않았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와이즈미가 안아든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는 여자의 까만 머리통을 제 가슴 쪽으로 돌려놓아 미녀인지 추녀인지, 나이가 적은지 많은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머리카락 한 올 마저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아래로 흘러내린 소매 속 조그만 손모양을 보고서야 아아, 미인이구나. 미인이야. 라고 다들 추측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와이즈미는 얼른 품에 집어넣어 많은 사람들이 본 것은 아니었다.
부모는 이와이즈미가 데려온 여인이 누군지 알고 몹시 당황했으나, 그래도 우선은 키타가와의 왕녀를 집 안으로 들이게 했다. 몸소 따라왔던 아오바죠사이의 황자가 이와이즈미가의 잔치를 빛내주었다. 사람들은 이와이즈미가에 며느리가 들어왔구나, 하였으나 그날은 아무런 말도 돌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다른 이들도 이와이즈미가 단패궁을 데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유달리 흉흉한 소문이 돌던 여인이니 집안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참견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에서는 성인이 된 아들의 일이라하며 말을 아꼈다.
*
하녀는 마루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카게야마를 조심스레 불렀다.
"아기씨."
이와이즈미는 따로 본가를 나와 살림을 꾸렸으니 응당 카게야마를 마님이라고 불러야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아직 카게야마였다. 키타가와의 후계를 보호하기 위해 이와이즈미가 직접 집으로 모셔온 것이라, 오이카와는 혼례는 아직 치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상관없었지만 밑의 사람들은 이와이즈미와 함께 사는 왕녀를 무어라 불러야할 지 몰랐다. 마님이라고 하기엔 무게가 컸다. 왕녀라고 부르자니 아오바죠사이에서는 적당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님이라고 부르자는 말도 나왔으나, 아이를 낳으면 이와이즈미로 성이 바뀔 것이라하여 기각되었다.
어린 공주는 아기씨라고 부르기도 하니 토비오쨩도 그러면 좋겠지.
호칭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종자들에게 오이카와는 그렇게 알려주었고, 그날부터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아기씨가 되었다.
"아기씨. 안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으음.."
"에그, 주인나리께서 보시면 제가 경을 칩니다."
카게야마는 둥실둥실 불러온 배를 끌어안고 졸다가 퍼뜩 눈을 떴다. 어린 하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님은.."
"잠시 나가셨습니다. 아기씨께서.."
하녀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카게야마는 궁금하단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가, 곧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키타가와를 떠날 때 카게야마는 모든 것을 궁에 두고 왔다. 아끼던 강아지도, 활도, 키타가와에서 정을 붙인 것들은 전부 두었다. 가장 놓고 싶지 않은 이들을 두고 왔으니 카게야마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마지막까지도 단패궁의 상궁은 걱정이 컸다. 누구도 타국으로 데려가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카게야마에게 이 하녀를 붙여준 것이 바로 상궁이었다. 고아로 나 궁에 들어온 궁녀는 성실한 성품으로 단패궁의 궁녀는 아니었지만 상궁이 좋게 본 이였다. 상궁의 제안을 들은 궁녀는 평생 궁에 있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겠다 싶어 얼른 카게야마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선택을 무척 잘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암.."
카게야마는 눈을 비비다가 하품했다. 구김살없는 주인의 모습을 보며 하녀는 웃었다.
"피곤하시면 안에 들어가 주무세요."
"안 돼."
"왜 그런 말씀하세요."
"이와이즈미님..어제도 못 봤고.."
기다릴래. 어린 아기씨는 부축하려는 손을 거절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기둥 옆에서 쿵쿵 머리를 찧으며 부른 배를 안고 있는 카게야마의 모습은, 키타가와 하녀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참, 아기씨. 하녀는 결국 카게야마를 방 안으로 들였다. 졸면서도 싫어, 싫어. 하고 떼를 쓰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 아이였다. 하녀는 몰랐으나 아오바죠사이에 온 카게야마는 유독 어리광을 부렸다. 받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다시 한 번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겪는 사람같기도 했다.
"..저거 할래."
카게야마는 미뤄둔 바느질감을 가리켰다. 하녀가 얼른 손에 그것을 들고 왔다.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된 조그만 배냇저고리는 이와이즈미가 입던 옷의 안감으로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옷을 아들이 입으면 큰 병을 앓지 않고 건강히 자란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하녀가 가져다준 저고리를 들고서 카게야마는 신중하게 바늘을 들었다. 갑자기 불러온 배 때문에 좀처럼 오래 앉아있지 못하니 시간 날 때마다 카게야마는 바느질을 했다.
"아기씨께서는 참 바느질을 잘 하십니다."
곁에 있던 하녀가 칭찬했다. 문득 상궁 생각이 난 카게야마는 키타가와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
한참동안 바느질감만 붙들고 있으니 하녀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었다. 밖에 있다가 문 한 장으로 바람을 막으니 조금 더웠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친 카게야마는, 바느질을 하다가 무심코 배를 어루만졌다. 얘는 덥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더운데... 동그랗게 튀어나온 배를 만져보던 카게야마는 순간 놀라 손을 뗐다.
"...?"
속에서 넘실넘실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동안도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선명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신기한 눈으로 배를 쳐다보았다.
"...움직여?"
카게야마의 손이 배를 살짝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도 살가죽을 밀어내듯 꾹 누르는 감각이 돌아온다.
"..우와.."
바느질감을 놓은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배를 문질렀다. 아까처럼 세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명히 이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누군가에게 이 신기한 일을 말해주고 싶었다. 실은 임신한 여인들이 전부 겪는 일이었으나 카게야마는 몰랐으므로 제게만 있는 일인가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문을 열어 지나가는 이가 없나 살펴보던 카게야마는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다들 바빠보이니 말할 사람이 없었다.
"....."
가끔 카게야마는 아무도 없는 순간 심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외로움이 어디서 나온지를 알고 있기에 카게야마는 입밖으로 그 말을 내지는 않았다. 공허한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이와이즈미는 타국까지 온 카게야마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굉장히 쓸쓸해지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도.."
정말 혼자는 아니었네. 카게야마는 배를 쓰다듬었다. 대답하는것처럼 안에서 아기가 움직였다.
"..나는 귀가 정말 좋은데, 너도 귀가 좋을까?"
그럼 내 말이 들려? 카게야마는 배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말을 걸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자 우선 근처에 있던 바느질감을 들어 배에 대본다.
"이건 네 옷이야."
그러면 또 배를 툭툭 걷어찬다.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까르르 웃었다.
"네가 태어나면 입힐 거야. 알아들어?"
이번엔 조용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나? 카게야마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
몇마디를 던져본 카게야마는 곧 자연스럽게 배에 대고 말을 걸었다. 그 얼굴엔 홍조가 떠있어, 누군가 보았다면 분명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봤을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초기에 입덧을 하여 힘들었고, 배가 부르니 더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활을 쏘고싶다, 밖을 나가 돌아다니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또 자연스레 키타가와의 생각이 났다. 잘 지내고 있을까. 모두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억지로 생각을 지우려고 하면 더 울컥 밀려오는 것이 있어, 카게야마는 잘 지내겠지, 라고 혼잣말을 했다. 배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다른 이야기를 할까?"
우울한 이야기를 하여 그런가 싶어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예전 이와이즈미가 자신의 부은 발을 주물러준 것이 떠올랐다. 아오바죠사이로 온 직후였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님은 참 좋으신 분이셔."
카게야마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와이즈미는 최대한 신경을 썼다. 오이카와가 기가막힌 것처럼 말해주었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카게야마도 알았을 것이다. 장자인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먼저 혼인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을 부렸다. 덕분에 기다리던 밑의 동생 둘이 먼저 장가를 갔으니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괜찮다고 했지만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가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싫었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정말로 괜찮을까? 카게야마는 잘은 불안감과 이와이즈미에 대한 고마움에 얼굴이 달았다.
카게야마는 방을 둘러보았다. 카게야마만을 위해 이와이즈미가 꾸며놓은 방은,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보석이나 예쁜 옷같은 것이 카게야마의 위안이 되지 않으리란 걸 이와이즈미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모두 주었다.
"이 것봐. 네가 태어나면 목에 걸어줄 목걸이야."
카게야마는 보석더미 속에서 옥과 금으로 된 목걸이를 꺼내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랐으나 배 안에선 또다시 태동이 있었다.
"이와이즈미님이 구해오셨는데.. 예쁘지?"
남자아이에게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고운 목걸이였다. 카게야마는 또 잔뜩 옷감을 헤쳤다. 보물상자같은 방 안 곳곳에서 이와이즈미가 준 선물이 나왔다.
"너를 낳으면 이와이즈미님이 같이 놀러가자고 그랬어."
집 안에만 있어 답답해하는 카게야마를 달래며 이와이즈미는 고운 옷을 꺼내 보여주었다. 이 옷을 입고 나가자는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리고 이것도.."
카게야마는 멈칫했다가 화살을 집어들었다. 활을 두고 왔다고 하자, 이와이즈미는 새 활을 약속하며 그 징표로 화살을 주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위험하다고 하여 하녀가 치우려고 했지만 카게야마는 고집스럽게 방에 두었다.
계속해서 말을 걸던 카게야마는 혹시나 싶어 귀를 기울여보았다. 신기하게도 세상 전부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제 뱃속만큼은 알 수 없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임신을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대답없는 배를 쓰다듬으며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사실 늘 같이 계셔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떼를 쓰면 안되니까."
코를 훌쩍훌쩍거리고 있자니 위로하는 것처럼 태동이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씩 웃었다.
"그치만 같이 계실땐 늘 잘해주셔."
이와이즈미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아? 아오바죠사이에서 가장 검을 잘 쓰시는 분이야. 강직하시면서도 다정하시니 너도 태어나면 좋은 아이가 되겠지?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떠올렸고, 그의 피를 이은 아이를 떠올렸다. 분명 좋은 아이가 될 것이었다.
"난 활이 좋은데 너는 검을 더 좋아할까?"
하긴, 이와이즈미님을 닮았다면 너도 검을 잘 쓸테고..귀여울 것 같고. 끊임없이 말하던 카게야마는 말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열린 문 사이로 오이카와가 웃고 있었다.
"이와쨩. 들었지? 토비오쨩이 네가 귀엽대."
"그렇게 부르는 거 그만두라고.. 했잖아."
카게야마는 얼른 문을 열었다. 얼굴을 붉힌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이와이즈미님!"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이카와의 눈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토비오쨩 좀 봐. 이와쨩. 이와쨩을 기다렸나본데."
"오이카와님께선 무슨 일이세요?"
"그런데 아직도 이와이즈미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하긴, 혼례는 아직 치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나. 중얼거리는 오이카와를 무시하고서 이와이즈미는 마루로 올라왔다. 손에는 포도가 들려있었다. 탐스러운 포도를 보았다가, 다시 얼굴을 들면 이와이즈미는 이제 완전히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 먹고싶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
"잠결에 그랬는데.."
"어제 제 방에 오셨어요?"
되묻는 카게야마의 어조에는 놀라움이 담겨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가 놀라는 만큼 부끄러워했다. 하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와이즈미는 멋쩍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제게 이와이즈미의 소식을 말하다가 망설였던 하녀를 떠올렸다. 포도를 사러나갔던 걸 알았으나, 아마도 카게야마를 놀라게 해주기 위해 입을 다물었던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둥그렇게 눈을 뜨고서 포도를 받았다. 좋은 향기가 손 안에서 가득 찼다.
"제가 포도를 먹고싶다고 했나요?"
"아니었나..?"
"잠결에 제가 그랬다니까.."
"아니었..나.."
이와이즈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카게야마는 손에 든 포도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포도를 보니 식욕이 돌았다. 한 알을 똑 따서 입에 넣자 서둘러 이와이즈미의 손이 앞에 다가왔다. 우물거리던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를 쳐다보았다. 이와이즈미는 껍질, 하고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에 남은 껍질을 그 위에 뱉어내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힉 놀랐다.
"이와이즈미님!"
"됐어. 내가 치울게."
포도 껍질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이와이즈미는 손에 쥐었다. 보다 못한 오이카와가 혀를 찼다.
"손님은 계속 세워둘 거야?"
"네가 억지로 따라온 거잖아. 오이카와."
봄처럼 상냥하던 목소리가 단숨에 험악해진다. 카게야마는 쿡쿡 웃었다.
*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게 한 번 눈짓한 후 억지로 오이카와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카게야마는 포도를 들고서 고개를 뺐다. 이와이즈미의 옷자락이 사라진 후에야 카게야마는 방으로 돌아왔다. 하녀가 뒤를 따라오며 포도를 받았다.
"나리께서 포도를 가져오신다더니, 정말이셨네요. 아기씨."
"더 먹을래."
"씻어드릴게요."
벌써 하나 먹었는데? 카게야마가 대답할 새도 없이 하녀가 포도를 들고 갔다. 멀뚱히 자리에 앉은 카게야마는 종전의 이와이즈미를 생각하고서 달아오른 뺨을 문질렀다. 껍질, 이라고 갑자기 말씀하셔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던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이카와님은 왜 또 오셔서 그러신담. 카게야마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기씨."
하녀가 알알이 딴 포도를 그릇에 담아왔다. 짙은 적색의 포도알이 흰 그릇에 가득 담겨 예뻤다.
"어찌나 향이 진한지 씻는 동안 부엌에 포도향이 가득 찼답니다."
"이와이즈미님과 오이카와님께도 좀 가져다 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하녀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서 웃었다.
"주인나리께 여쭤보았지만, 아기씨께서 드셔야한다며 물리셨습니다."
"..괜찮은데."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혔다.
*
한동안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포도를 입에 넣으며 귀를 기울였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이름이 들리는 것을 봐서는 나랏일인 듯 하여, 카게야마는 엿듣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입 안에서 포도를 굴리며 이와이즈미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집에 계시는 걸까? 어제 얼굴을 보고 가셨으면..여기로도 또 오시면 좋겠다. 곰곰이 떠올리니 이와이즈미와 함께 지낸지도 몇 달이 다 되었다. 그 동안 이와이즈미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대해주었으나 정작 카게야마는 감사인사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카게야마는 오늘에야말로 꼭 이와이즈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리고 또, 또..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와이즈미와 입을 맞춘 지도, 아오바죠사이로 온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태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진 카게야마는 포도물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던 카게야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활짝 웃었다.
"이와이즈미님."
"카게야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편하게 자야지.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 번 쓸어주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다정하게 흘러내린다. 또한 그보다 더 상냥한 눈을 하고서,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하는 얼굴이 그토록 좋을 수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기다렸어?"
"그럼 제가 기다리지 않았을 것 같으세요?"
"미안."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조금은 투정을 부린다. 이와이즈미는 얼른 사과했다. 그러나 사과라기보다는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어조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저두요.."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깜박 떴다. 이와이즈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이와이즈미님. 손 주세요."
"손?"
또 포도를 먹었어?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손을 잡아 카게야마는 제 배에 올려두었다. 둥그렇고 따뜻한 배 위에 손을 얹은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왜..? 하고 물었다. 카게야마도 같이 이와이즈미를 따라 손을 얹는다.
"어..?"
아까와 달리 조용한 배를 문지르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이와이즈미는 가만히 손을 올려두었다. 카게야마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이와이즈미를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응? 왜?"
"분명히.."
아까는 움직였으면서 왜 이러지. 카게야마는 아기가 원망스러워졌다.
"배를 두드렸어요."
"어?"
"아기가.."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카게야마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반색하며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태동이 있었어?"
"태동?"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걸 태동이라고 하는거야."
"원래 다들 그러나요?"
카게야마의 물음에 이와이즈미는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들떠있던 부인은, 금방 시무룩해져 손을 떼는 것이었다.
"...왜?"
"저는.. 저만 그런 줄 알고.."
의기소침해져서 내뱉는 말이 귀여워 이와이즈미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신기한 일이라 이와이즈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인데, 이미 알고있다고 하니 괜히 속상했다. 카게야마는 동그란 배를 안고서 슬쩍 몸을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무릎걸음으로 카게야마를 쫓았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 고개만 숙여 본다. 카게야마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웃음이 식지않은 얼굴로 이와이즈미는 말했다.
"왜?"
"웃지 마세요."
"어디 보자. 다시 만져봐야지."
숨기는 사람처럼 양 손으로 배를 붙잡은 카게야마를 이와이즈미는 억지로 안았다. 뒤에서 끌어안긴 카게야마는 벗어나려고 몸을 바둥거렸으나, 이와이즈미는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옷 아래의 둥실한 배를 만지며 귓가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포도 냄새 난다."
이와이즈미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어깨를 떨던 카게야마는 망설이다가 이와이즈미에게 기대었다.
"이와이즈미님한테서는 박하 냄새가 나요."
첫날밤에도 이와이즈미에게서 풍겼던 향기였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익숙해 카게야마는 좀 더 몸을 비볐다. 이와이즈미의 몸이 조금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와이즈미님."
"...."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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