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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101. 3월 30일



해가 뜨고, 먼지투성이의 병사가 구르듯이 궁으로 들어왔다. 밤새도록 말을 바꿔 달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가 내리자 말은 거품을 물며 비틀거렸다. 얼른 마부들이 달려와 말을 돌보았다. 물이라도 한 잔 얻어먹으면 좋았겠으나 일의 중요성을 알기에 병사는 얼른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장군이 섭정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단단히 밀봉된 서신은 원칙대로라면 여러 절차를 밟아 섭정에게 보내져야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곧바로 섭정에게 가져오라는 엄명이 있었다.  내관은 병사의 품에서 나온 서신의 문양이 킨다이치의 것임을 확인하고 섭정궁으로 찾아갔다. 병사가 왔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져있어, 섭정은 내관을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


내관과 궁녀가 있는 것도 잊고서, 체통을 잊은 섭정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급히 휘갈겨 쓴 글씨는 오직 두 단어만이 적혀있었다.



구출 

환궁



섭정 쿠니미 아키라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쿠니미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누군가 쿠니미를 뵙기를 청한다고 궁녀가 알렸다.



홀 : 병사

짝 : 사관



계속 같은 목적으로 섭정궁을 찾아왔으니 쿠니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며칠 만에 겨우 사관을 만날 기분이 들었다. 쿠니미가 허락하자, 나이가 어려보이는 사관은 얼른 들어왔다. 쿠니미의 마음이 바뀔 것을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쿠니미는 천천히 사관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함부로 쿠니미와 독대를 청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나이든 사관들은 모두 쿠니미의 명에 따라 붓을 놓았다. 27일 밤의 일에 대해 모두 함구했다. 그러나 이 젊은 사관은 그것이 무척 불만인 모양이었다.


"전하."

"....."


궁 안의, 나라의 일을 기록하는 건 사관의 소명이었다. 키타가와의 어떤 왕도 사관의 기록까지 막았던 역사가 없었다. 그런 일을 섭정이 명령했으니 젊은 혈기에 참지 못했으리라. 같이 일해온 사관들은 충분히 말렸을 텐데.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고 권력을 전부 움켜쥔 쿠니미에게 목을 들이미는 꼴이 우습기도 했고.


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잔뜩 몸을 웅크려 엎드린 사관이 이마를 땅에 대고 말했다.


"전하. 단패궁 마마께서 나가신 일이 벌써 사흘이니 이제는 신들이 더 이상,"

"키타가와에서 오직 한 분이신 귀한 몸께서, 시정잡배에게 끌려갔다는 수치를 적을 필요가 있을까."


쿠니미의 말에 사관은 이마를 댄 채로 간절히 말했다.


"허나 킨다이치 장군의 활약으로 이미 단패궁께서는 환궁하실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

"전하..!"

"...출궁한 기록은 허락하지 않는다."


사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쿠니미가 느리게 말했다.


"가장 막중한 국사를 적는 것이 사관들의 일이지."

"..! 그렇습니다."

"...단패궁께서 환궁하시면 그것만을 적어두거라."


어차피 사서를 읽는 건 후대의 일이었다. 나간 기록이 없는 카게야마가 갑자기 며칠 후 킨다이치와 궁으로 돌아왔다고 적어둔다면 뒤의 사람들은 알아서 추측할 것이다. 사관의 끈질긴 방문보다는, 모든 일이 정리되자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내린 변덕이었다. 사관은 쿠니미가 양보해준 뜻을 깨닫고 조용히 물러갔다.  


*


쿠니미가 사관을 내보내는 사이,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에게 오사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오사와는 이미 키타가와에서는 자신이 권력을 다시 잡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경까지 도망간 건 실제론 도망친 것이 아니라, 후쿠로다니의 고위층과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킨다이치는 머뭇거렸다.


"아마 오사와는 네가 아닌 쿠니미를 데려오려고 했던 것 같아."

"어째서...?"

"글쎄."


킨다이치는 말을 완벽하게 끝내지 않았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알 것 같았다. 아마 쿠니미가 잡혔다면 협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죽였을 것이다. 쿠니미는 권력의 정점에 서서 나라를 안정시켰고 유일한 대적자인 오사와까지 내쫓은 남자였다. 쿠니미 아키라가 죽는다면 파장이 지나치게 컸다. 그러니 눈엣가시같은 섭정을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지 않을까. 카게야마는 거기까지 생각한 후 한숨을 쉬었다. 쿠니미의 궁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생각났다. ...쿠니미가 그걸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오사와의 계획을 알고 애초에 자신이 잡혀갈 생각을 했던 걸지도 몰라.


"카게야마? 아파?"


킨다이치가 말이 없어진 카게야마를 걱정하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와서 다행이네."


뜬금없는 말에 킨다이치가 입을 쩍 벌렸다.


"내가 와서 오사와도 놀랐을 테고, 덕분에 네가 뒤쫓아서 진을 친 것도 늦게 파악했나봐."


다행이야. 그렇지?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다가 이젠 화가 난 킨다이치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왜?"

"그런 말 하지도 마."

"킨다이치."

"내가, 우리가 얼마나..."

"....."

"네가 잘못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찡그린 킨다이치의 눈가가 새빨갛게 변했다. 울지마, 하고 달래주려던 카게야마는 무심코 팔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우시지마의 능력으로 회복된 팔은 아직도 고통이 남아있었다. 살짝 찌푸린 카게야마를 보고서 킨다이치가 더 놀랐다. 괜찮아? 카게야마. 주물러줄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어깨를 문지르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문득 카게야마는 꿈에서 활을 가져간 아버지가 생각났다. 어쩌면 활을 쏘는 건 더 이상 안 될지도 모르겠네.. 시큰거리는 어깨를 계속 감싸고 있자 킨다이치는 결국 나가서 우시지마를 찾았다.


*


킨다이치가 막사를 나간 짧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조금 우스운 생각을 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킨다이치는 자신이 쿠니미 대신 잡혀와 다행이라는 말을 듣고서 화를 냈다. 쿠니미는 자신을, 자신은 쿠니미를 살리고 싶어한다. 닮은 거라곤 까만색의 머리카락밖엔 없는 줄 알았는데. 고통이 누그러들자 자연스럽게 떠오른 남자의 얼굴에는 상상 속에서도 근심과 눈물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서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걱정했다. 빨리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을 들었다. 피로해보이는 얼굴의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치자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카게야마가 서둘러 말했다.


"피곤해보이십니다."


카게야마의 말에 자리에 앉은 우시지마가 멈칫했다. 고통으로 기절한 카게야마를 돌보며 우시지마는 꽤나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임산부의 몸에 난 치명상이었기에 그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했다. 알아주기를 바라고 치료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우시지마를 걱정하자, 그는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욕심을 느꼈다. 킨다이치는 우시지마를 불러놓고서 따라들어오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부하가 부르는 바람에 장군은 어쩔 수 없이 우시지마만을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우시지마는 헛기침을 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서 쉬셔요."

"네가 아프다는데 도로 돌아가라고 하느냐."

"저는 튼튼하니 금방 나을 것입니다."


우시지마님 덕에 이렇게 빨리 나았으니까요. 카게야마의 손바닥이 느리게 어깨를 문질렀다.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을 텐데도 우시지마 앞에서 내색하려하지 않는다. 곧고 강한 심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로, 카게야마는 우시지마를 보며 어서 가서 쉬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우시지마는 카게야마를 진심으로 좋아한 것이다. 



"카게야마."


우시지마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는 또 네, 하고 대답했다. 처음, 아주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긴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저 동그란 머리에 손수 황후의 관을 씌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키타가와로 왔다. 우시지마가 말없이 쳐다만 보자 카게야마는 부드러운 얼굴로 웃었다.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기까지도 또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시지마는 갑자기 카게야마의 모든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우시지마님. 왜..."

"카게야마."



1~3 : 내가

4~6 : 나와

7~9 : 만약

0 :



세 번째로 불리는 이름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우시지마의 손이 다가왔다. 어깨를 잡으려고 하던 손이 어깨를 피해 뒷머리를 감쌌다. 피할 새도 없이 우시지마의 얼굴이 다가왔다. 입맞춤. 가까워져보는 우시지마의 눈을 보며 카게야마가 가장 처음 한 생각은 그것 뿐이었다. 그러나 입술과 입술이 닿기 전 우시지마는 멈췄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뒷머리를 감싸쥔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치료해준 값으로 너를 받아가야겠다고 하면 어찌하겠느냐."

"...우시지마님?"

"...너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인데."


남장을 하였어도, 치마를 입어도, 여전히 카게야마 토비오는 카게야마 토비오로 남아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카게야마가 변하기를 바랐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호랑이를 뒤쫓던 그 모습 그대로,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다.


"대답해보거라."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숨이 우시지마의 턱끝에 닿아 간질거렸다.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손을 내려 새벽까지 공을 들였던 어깨를 만져본다. 우시지마의 손이 닿는 순간 카게야마가 몸을 살짝 떨었다.


"나는 지금 너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 깔았다.



홀 : 우시지마님은

짝 : 협박이



"...협박이,"


너무 친절하세요. 카게야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시지마님께서 그런 말씀 하실 분이 아니란 것을 제가 잘 알아요."

"나와 가지 않겠단 말이구나."

"...우시지마님과 같이 가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카게야마는 집요한 우시지마의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다시 쳐다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우시지마의 눈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작별을 말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카게야마가 천천히 말했다. 


"궁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우시지마님과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우시지마와 함께 하고 싶었던 날들이 훨씬 많았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궁에 제가 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나 역시 그렇다고 해도?"

"....."

"나 또한."


우시지마는 입을 다물었다. 이 마음은 언제 이렇게 깊어진걸까. 마지막 인사를 받으며 우시지마는 생전 처음으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의 치유력으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처였다. 


"..우시지마님께서는 다 죽어가는 저를 두 번이나 살려주셨지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우시지마의 귀에 들려왔다.


"함께 있지 않다고 해서 감사함을 잊지 않을게요."

"....."

"...두 번 살려주신 이 목숨,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거짓으로라도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랬다. 자신이 살려준 목숨이었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눈 앞의 존재는 우시지마가 없었다면 아마 다시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상처와 흉터를 짊어지고서 새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다. 정순한 눈동자가 우시지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힘차게 날아가려는 카게야마가 감탄스러우면서도 밉고, 또한 사랑스러웠다.


우시지마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

"우시지마님."

"잘 들어두거라. 카게야마. 행복하지 않으면 그때는,"

"....."

"..그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무조건 데려와 내 곁에 둘테니 그리 알거라."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웃었다. 그 웃음에서 우시지마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쨌거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다.




"이리로."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큰 손 위에 손을 올려놓자 우시지마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부상이 깊어 우시지마로서도 몇 번을 나눠 힘을 써야했다. 잡은 손은 과연,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킨다이치가 자신을 부를 때 그는 잠깐 망설였다. 무리해서라도 카게야마를 고쳐줄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이곳에 더 남아 카게야마와 함께 있을 것인가. 목숨에 해가 안 갈 정도로만 치유를 늦출 수도 있었다. 우시지마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행복하겠다고 했으니."


하지만.


"흠 없이 돌려보내줘야하겠구나. 나도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우시지마님?"

"혹여 이 상처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어야겠지."


우시지마는 피곤한 기색을 감추고 카게야마의 어깨를 쥐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닿았다. 



1~9 : 감사합니다 

0 :



우시지마의 눈이 감겼다. 카게야마 또한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온기가 어깨 아래, 살갗 속까지 파고들다가 통증을 거둬가고 있다. 화끈거리며 끓었다가 다시 미지근하게 어루만지고 또 부드러운 온도로 휘감겨온다.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깨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문득 카게야마의 귀에 거친 호흡이 잡혔다. 살며시 눈을 뜨자 우시지마가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카게야마의 어깨에 집중하는 그 얼굴을,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헐떡이며 보았다.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어깨에서부터 심장까지 단숨에 훅 번졌다.


"우시지마님. 이제 그만,"


어깨가 한결 편해진 걸 확인한 카게야마가 얼른 우시지마의 손을 잡았다. 감았다 뜬 우시지마의 눈은 살짝 붉어져있었다. 천천히 입술이 벌어졌다가 확인하듯 카게야마의 이름을 부른다. 예, 하고 카게야마가 얼른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가 걱정스러웠다.


"우시지마님?"


말없이 카게야마를 보던 우시지마의 입술이 카게야마에게로 가까워졌다. 입술로 향하려다가 멈칫한다. 뺨에 닿으려다가도 그저 급하게 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카게야마가 다시 고개를 올리자 우시지마는 그제야 찾은 것처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주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우시지마가 물었다.


"아프지 않느냐."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감사합니다. 우시지마님. 카게야마는 아직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은 우시지마의 손을 꽉 쥐었다.


*


카게야마는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젯밤 검에 꿰뚫렸던 어깨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깊은 상처를 단시간에 치유하기 위해서, 우시지마는 평소보다 무리한 힘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우시지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시지마님. 감사합니다."

"무리할 것 없다. 쉬거라."


우시지마 또한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주었다.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가 아래로 내린다. 긴장하고 초조한 마음들이 전부 사라져간다. 카게야마는 그 손이 이끄는 대로 눈을 감았다. 최대한 빨리 몸을 치료했으니 너 역시 피곤하겠지, 그런 말소리가 들리다가 점차 작아졌다. 소근소근거리는 말소리. 마지막으로 선명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킨다이치의 목소리였다.


카게ㅇ, 단패궁께선 주무시는 겁니까?

상처가 회복되었어도 몸은 피곤할 것이니 자게 두거라.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서 깊은 잠을 자기 시작했다.




킨다이치는 갑자기 잠에 빠진 카게야마가 걱정스러웠다. 우시지마는 괜찮다고 했어도 죽은 듯이 잠을 자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엔 없었다. 어차피 우시지마 또한 바로 움직일 수 없으니, 내일로 환궁은 미뤄야했다. 카게야마가 자는 동안 처리해야할 일들을 해놓자. 킨다이치는 우선 그렇게 마음 먹었다.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역시 오사와 사야코의 일이었다.


죄인 오사와 타카히로는 당연히 사형이 집행될 것이다. 오사와 사야코는 카게야마를 도왔으나 죄인의 딸이었다. 어떻게 처리해야할까를 생각해야했다. 아비가 죽는다고 해서 사야코가 오사와라는 이름을 달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란 상상은 들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오사와는 섭정 쿠니미의 사병 제한 정책에 앙심을 품고 도망간 것으로 되어있었다. 난을 두 번이나 일으켰으니 명분이야 많았으나, 사야코를 신경쓰지 않으면 카게야마가 슬퍼할 게 분명했다. 킨다이치는 고민하며 괜히 먹물을 머금은 붓을 휘둘렀다. 흰 종이에 먹물이 튀어 까만 점으로 얼룩졌다.



홀 : 오이카와

짝 : 이와이즈미



조촐한 막사 안으로 이와이즈미가 들어왔다. 알게 모르게 킨다이치에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남자였다. 앞을 막는 병사들을 베며 오사와를 찾는 길을 만들었다. 묵직하게 찌르는 느낌의 검은 화려하지 않아도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 카게야마를 찾는 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들어오자마자 카게야마의 이야기를 꺼냈다.


"카게야마는 당장 말을 타진 못할 텐데. 마차를 구하려면 시간이 걸릴테고."

"안 그래도 근처 농가가 있어 찾아보니 축제 때나 쓰이는 마차가 있었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쓰인다는 작년에 새로 마련한 것이라 제법 튼튼했다. 킨다이치는 그 마차를 가져와 병사들에게 수리를 하도록 했다. 원래대로라면 마차를 미리 궁에서 준비해야했으나 그럴 정신어 없을 정도로 모두가 다 급한 때였다. 킨다이치의 이야기를 들은 이와이즈미는 그래, 잘됐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홀 : 얼굴에 

짝 : 그럼



이와이즈미는 일어서려다가 문득 킨다이치를 보고 물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네. 염려하는 다른 일이라도...?"


다른 나라의 사람. 특히나 아오바죠사이의 사람이니 자세한 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한 고민거리를 물어보자 킨다이치는 입을 달싹였다. 머뭇거린 틈을 깨달은 이와이즈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춘다.


"카게야마에 대한 일이라면 도움이 되고 싶어."

"단패궁 마마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


이와이즈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여자? 하고 물었다. 이번 난을 일으킨 남자의 여식이라는 여자는, 발이 불편한데도 카게야마를 보호하듯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몹시 인상깊었다. 사야코는 킨다이치가 오사와를 추적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증거가 될까 싶어 킨다이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남긴 주머니와 구슬을 챙겨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오사와 사야코를 살려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울 순 없었다. 아무리 공이 커도 오사와의 딸이었다. 분명 반발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킨다이치가 이야기를 하자 이와이즈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대에서, 키타가와에서 일어난 난리가 벌써 두번째니 정에 끌려선 안 돼."

"....알고 있습니다."

"그 핏줄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겠지."


오사와가 카게야마가 여자임을 알았어도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사야코 역시 어떻게 살려둔다고 해도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쿠니미나 킨다이치에 대한 과도한 충성으로 사야코의 목숨을 노릴 지도 몰랐다. 이와이즈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음, 하고 입을 떼었다.


"...여기서 오사와 사야코가 죽는다면?"

".....무슨."

"...불에 탄 여자시체가 한 구 나왔는데, 아마도 사야코라는 여자의 것이겠지."

"....."

"비록 죄인의 핏줄이지만 군을 도왔으니 시신 정도는 수습을 해주는 게 좋겠어."


이와이즈미의 말을 들은 킨다이치는 잠시 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반응에 이와이즈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장군은 젊고 유능했으나 곧은 점이 오히려 시야를 좁히고 있었다. 오사와 사야코의 핏줄이 문제라면 오사와를 덜어내면 된다. 이와이즈미는 킨다이치가 쓸만한 각본을 말해주었다.


"의지가 된 사야코가 죽고, 카게야마 또한 상심에 빠져 건강이 위험할 뻔 했는데,"

"...예."

"마침 민가에 마차를 구하러 갔다가 사야코와 비슷한 외양의 여자를 발견한거지."

"....그 여자가."

"세이코라는 여자인데, 카게야마를 잘 돌보니 카게야마가 허락한다면 궁에 데려가도 괜찮지 않을까."


사야코清子. 세이코清子. 부르는 법이 다를 뿐 한자는 같았다. 성을 버리게 된다면 오사와 사야코는 더이상 귀족이 아니게 된다. 그래도 만약 같이 가길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와이즈미와 킨다이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사야코가 막사 앞에 있었다.


"폐, 아니 단패궁 마마님의 안부를 여쭈러 왔다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야코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신기하게도 그 하는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어차피 그대로 팔려나갈 목숨을 마마님께서 구해주셨으니, 할 수만 있다면 곁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다른 길을 알아봐줄 수도 있다. 좋은 혼처나..."

"저는,"

"아참. 그렇지."


킨다이치는 품에서 오사와가 남겨둔 주머니를 꺼냈다. 그 것을 보자 사야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가져오셨습니까."

"돌려주마."


추적에 도움이 되었던 주머니를 구슬과 함께 돌려주자 얼른 사야코가 손을 뻗었다. 킨다이치는 그제야 그 뻗은 손바닥 안의 동그란 화상 자국을 봤으나 눈을 슬그머니 돌렸다. 역시 달군 구슬을 손으로 직접 잡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킨다이치는 굳이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카게야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마음 먹었던 날, 충동적으로 사야코는 이 주머니를 훔쳤다. 킨다이치에게 발견되길 원해 놓고 가면서도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랐다. 주머니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사야코는 기뻐했다. 그리고 킨다이치를 보았다가, 다시 이와이즈미를 보았다.


"살아서 마마를 곁에서 모실 수 있다면 신분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오사와 사야코. 신중하거라."


아무리 그래도 귀족의 딸이다. 한때는 왕과 비등할 정도의 권력도 손에 넣었던 집안의 여식이었다. 이제와서 카게야마에게 해를 끼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궁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전처럼 왕비로 갈 수 있단 말과 달랐다. 궁인으로 들어가면 결혼을 하거나 죽기 전엔 궁을 나올 수 없다.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고민도 없이 대답할 줄은 몰랐다. 킨다이치는 다시 물었다.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장군님. 저는."

"....."

"세이코입니다."


성도 없고, 아비도 없어 혼자 자라온 여자 세이코는 카게야마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


오이카와는 불쑥 막사 앞에 섰다. 입구의 양 옆을 지키고 섰던 병사 둘은 긴장했다. 들어가볼까? 혼잣말같은 말에 병사들은 어떻게 대꾸해야할지 몰랐다. 들어간다고 하면, 감히 오이카와를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병사들은 오이카와가 무심히 막사 앞에 서있는 것만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말을 거는 것도 큰일이었다.  


"오이카와씨가, 들어가볼까?"


오이카와는 침묵하는 병사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엔 또렷하게 병사들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서로 잠시 눈길을 주고 받았다. 곧 조금 더 나이가 든 쪽이 고개를 숙이고서 대답했다.


"단패궁 마마께선 아직 주무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이카와의 출입을 막을 이유일 수는 없었다. 그저 병사는 카게야마가 아직 자고 있음을 알렸다.


"그래."

"....."

"오이카와씨도 알아."


오이카와는 가볍게 대꾸했다. 아침부터 그는 진영의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찔러보는 중이었다. 기껏 왔으나 도움이 된 일은 없었다. 보란듯이 써주겠다고 생각한 능력도 정작 카게야마를 구하는 일엔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쓰러진 카게야마를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 사실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우시지마의 속을 긁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에 오기 전 우시지마를 찾아갔었다.




"우시와카쨩."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오이카와."


피곤해보이는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힐끔 보았다. 방금 카게야마의 막사에서 나온, 보기 싫은 얼굴은 수척할 정도로 상해있었다. 더불어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은 슬픔과 우울함이 있다.  얼굴을 보면 카게야마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나빠져 투덜거렸다.


"우시와카쨩. 헛고생했네."

"무슨 말이지."

"토비오쨩, 시라토리자와로 데려가고 싶었잖아?"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나."


정곡을 찌르는 우시지마의 말을 오이카와는 무시했다. 그는 못들은 척 계속 입을 열었다. 뭐든 쏟아내고 싶었다.


"우시와카쨩 생각보다 더 바보라 오이카와씨 기분 좋은걸. 힘만 쓰고 가다니 말이야."

"....."

"뭐, 시라토리자와로 안 간다고 해도 어차피 키타가와는 아오바죠사이 쪽이니까, 오이카와씨야 뭐..."


...그리고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우시지마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우시지마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행복해지겠다고 말하더군. 우시지마는 그렇게 대꾸했다.


너 또한 카게야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게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은 피곤한 안색과 달리 또렷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보는, 누구보다 경박하고 화려한 남자의 눈 또한 깊게 가라앉았다. 우시지마는 방금 한 대화를 되새겨보듯 눈꺼풀을 짧게 닫았다가 떴다.


"내게 행복하겠다고 말했다."

"....."

"네 말대로 나는 원하는 사람은 얻지 못했지만."

"...."

"그래도."


꼬박 하루를 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려와, 다른 사람의 품으로 돌아갈 여자를 고쳐주었다. 만약 이 마음이 식으면 언젠가는 바보같은 일을 했다고 자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그 날이 올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아파하는 걸 내 손으로 치료해줬으니, 이만하면 키타가와를 찾아온 보람이 있지."


두 번이나 카게야마의 목숨을 살려준 남자가 씩 웃었다. 그 웃음엔 조금의 기만도 없었다. 능수능란하게 혀를 놀릴 줄 아는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앞에서 처음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충동적으로 카게야마의 막사를 찾았다.


*


마지막으로 여유롭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꽤 괜찮은 안녕이라고도 생각했다. 있잖아, 토비오쨩. 오이카와씨는 키타가와에서 토비오쨩이랑 노는 거 꽤 재밌었어. 조금 더 진지했어야했을까. 하지만 그런 작별은 오이카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손 안에 완벽히 잡을 수 없는 거라면 서둘러 작별을 하고 싶었다. 꽃을 피울 수 있었던 마음도 자국을 남긴 선명한 아쉬움도 모두 덮어두는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처음 봤을 때의 기묘한 고양감, 반짝거리는 재능에 대한 호승심. 단지 그 정도의 감정만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었다. 


토비오쨩은 오이카와씨한데 조금 귀찮고, 조금 거슬리는 그런 남자아이야. 오이카와는 병사들이 비켜준 문 앞에 섰다. 토비오쨩은 그 정도일 뿐이거든. 오이카와씨한테는... 귀찮은. 정말 귀찮아서. 


아.


"...정말 왜 이렇게 된 건지."


오이카와는 화가 난 사람처럼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잠든 카게야마 토비오는 남의 속도 모르고 쿨쿨 잠들어 있었다. 카게야마의 살갗이 백옥처럼 하얗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햇빛에 잘 익은 곡식처럼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피부는,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창백했다. 새하얀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자 어제 저녁의 일이 떠올랐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이 얼굴을 보지 못했을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곁에 털썩 앉았다.


"토비오쨩."


카게야마의 숨소리가 오이카와의 귀에 들렸다. 이렇게 감쪽같이 잠든 흉내를 내진 못할 것이다. 가만히 옆에 앉아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뺨을 콕 찔렀다. 말캉하게 들어갔다가 금방 밀려나오는 따뜻한 볼. 콕콕, 두 번 찔렀다가 눈앞에 있는 게 환자라는 걸 생각하고 오이카와는 손을 뗐다. 그리고 또 한참을 쳐다보았다.


"....."


얼굴을 볼까, 말까. 꽤나 망설였는데 막상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무사한지 눈으로 확인하니 이제 정말로 남은 건 없었다. 오이카와는 잠이 든 카게야마를 마지막으로 훑어보았다.  아이도 괜찮고, 카게야마도 괜찮고, 이제 정리가 다 되면 다시 키타가와의 궁으로 카게야마를 데려다주고.


그리고 자신은.


"....오이카와님.,?"


망설이는 사이 속눈썹이 꼼지락거리다가 더디게 떠졌다. 오이카와는 창백한 얼굴 속에 감춰졌던 찬란한 눈동자를 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닮은 눈이 보이자 비로소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깜짝 놀랐으나 카게야마는 잠에 취해 오이카와의 동요를 깨닫지 못했다.


"...오이카와님이.."


여기에..카게야마는 가물가물거리는 눈을 힘겹게 떴다.


"왜. 오이카와씨가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주려고 해도 튀어나오는 말은 이런 것들 뿐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워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같기도 했다. 깨지 말고 푹 쉬라고 할수도 있었음에도, 오이카와는 굳이 카게야마의 곁에 앉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흐암, 입을 가리지 못하고 작게 하품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눈으로 쫓았다.



홀 : 어제 

짝 : 신기해서



"어제,"


카게야마는 쉽게 잠을 쫓아내지 못했다. 고개를 몇 번 흔들다가 꿈을 꾸는 사람처럼 말을 한다.


"어제 오이카와님을 봤어요."

"...우시와카쨩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는데..."

"...."

"아니었어." 


오이카와님이 와주셨네. 비몽사몽간에 말하는 말들은 격식이 없었다. 우시지마의 말에 따르면 완전히 회복되는 건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보다가 이마를 톡 건드렸다.


"그래. 오이카와씨 여기 있거든요. ."

"네에.."

"오이카와씨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놀리는 말이었는데도 눈을 감고선 단숨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

"오이카와님, 보니까 굉장히 안심이 돼서."

"....그건 무슨 말?"

"오이카와님,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강하니까..."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다시 잠이 드는 것이다.


"제일 강하니까...도와주러 오신거면.."

"....."

"오이카와님이, 저를.."


활 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충분히 잘 쏘잖아? 오이카와씨가 왜 토비오쨩한테까지 가르쳐줘야해? 한 번도 제대로 귀여워해준 적이 없는데도 신기하게 자신을 따랐다. 귀찮다고 밀어내도, 계속 같은 말을 하던 조그만 입술. 오이카와님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이카와님처럼 멋진 활을 쏘고 싶어요.


"....토비오쨩은 정말 바보네."


오이카와는 지쳐서 도로 잠이 든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토비오쨩? 자? 아기처럼 잠든 카게야마는 정말 꿈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이젠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 위를 손으로 휘휘 저어보았다. 이상하게도 비죽 웃음이 나왔다. 전이나 지금이나 카게야마는 똑같았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말하면 오이카와씨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해?"

"....."

"...있잖아. 오이카와씨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줄거야."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닿는 정도의 위치에서 내린 가벼운 입맞춤은 꿈과 함께 사라질 터였으나, 오이카와로서는 겨우 인정한 마음의 형태였다. 


*


그는 막사를 나왔다. 그러고보니 카게야마가 뭔가는 먹었는지 궁금했다. 막사 앞에 선 병사들에게 묻자 물과 육포 조금을 부탁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대로 된 식사는 불가능할테니 알아서 챙긴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육포는 회임한 여인에게 먹일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한참 자다가 일어날 테니 미리 식사를 준비해놓으라고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먹이고, 바로 가야하니 서두르도록."

"알겠습니다."


나참, 오이카와씨밖엔 이런 일을 신경쓸 사람이 없어?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며 자리를 떴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잠이 든 사이 



1~3 : 우시지마

4~6 : 이와이즈미 

7~9 : 오이카와

0 : 사야코



이와이즈미는 킨다이치와 함께 죄인들을 살펴보러 갔다. 일부러 함께 온 건 아니었다. 사야코의 일이 정리된 킨다이치가 이와이즈미에게 따로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성국의 증언이 있다면 오사와를 처벌하는 게 더 쉬워질거란 핑계였으나 이와이즈미는 다르게 생각했다.


죄인에게 적법한 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있어야 했다. 킨다이치는 아마도 카게야마를 찌른 남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허리춤의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다보니 저녁부터 꼬박 킨다이치를 돕고 있었다. 고생을 사서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킨다이치의 부탁을, 이와이즈미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서 뭘 확인하려는 거야."


이와이즈미의 물음에 킨다이치는 세이코의 이름을 댔다.


"증거도 나왔고, 세이코가 말하길 오사와가 후쿠로다니로 망명할 계획이 확실했다고 하니,"

"으음."

"그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말하라고 해서 과연 말할까."


킨다이치는 이와이즈미를 보았다가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말하게 하면 됩니다."


*


카게야마는 기지개를 폈다. 잠을 푹 잔 머리는 맑았으나 기억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었지? 고개를 돌려보면 익숙한 여자가 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야코였다. 그래, 나는 오사와에게 납치를 당해서... 카게야마는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미지근한 수건이 조금 마른 채로 올려져있다.


"....."


간밤의 일로 사야코 또한 피곤했겠지.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옆에 놓인 밥상을 발견했다. 음식을 보자 허기가 느껴져 카게야마는 얼른 물부터 마셨다. 자신때문에 일부러 준비했을 음식을 서둘러 먹고서, 카게야마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지키고 섰던 병사들이 카게야마에게 인사했다. 그 인사를 받아주며 카게야마는 내심 놀랐다. 막 해가 져 황금색 노을이 하늘에 번지고 있었다. 


".....환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나 빨리 하루가 지나갔다. 왠지 모를 초조함에 카게야마가 묻자, 병사 한 명이 얼른 대답했다.


"단패궁 마마께서 기침하시는 대로 준비하라고 들었습니다."

"어서 알리거라."

"예, 그러면,"

"아니. 지금 출발하면 밤새도록 가야하잖아."


카게야마는 허망히 해가 진 하늘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쿠니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일찍 출발하지 못했으니 밤새 걷자고 조르기엔 면목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자 병사가 다시 아뢰었다.


"마마. 어차피 돌아가는 길은 평지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킨, 킨다이치 장군께서는?"

"죄인을 문초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찾아가볼까? 카게야마는 고민하며 다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 소리에 졸던 사야코가 눈을 떴다.


"사야코."


사야코를 불렀던 카게야마는 멈칫했다. 킨다이치가 죄인을 문초하는 중이라면 사야코의 아버지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오사와의 딸인 사야코가 함부로 자신과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사야코가 아무리 아버지를 싫어한다고 해도, 사야코가 그의 딸로 남아있는 이상은. 지금은 연약한 여인이라하여 이곳에 자유롭게 뒀지만 언젠가 또 그녀에게 문제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야코가 일어나 카게야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야코."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너.."


도망치게 해야 돼. 카게야마는 황급히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마땅한 건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있으면 큰일이니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

"예?"

"마음같아선 함께 환궁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네 아비가 문제구나."


망할 오사와. 카게야마는 속으로 욕을 하며 사야코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사야코는 웃고 있었다. 상황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에 카게야마는 조금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오사와 타카히로가 문초를 받고 있다고 하니, 그 불똥이 네게 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폐하께서 저를 지켜주시면 되겠지요."

"그럴 수 있다면...!"


카게야마는 말하다가 다시 사야코를 쳐다보았다. 사야코는 계속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사야코?"


평소의 사야코답지 않아 카게야마는 의아하게 불렀다. 사야코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장난스러운 눈동자는 순간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변했다.


"단패궁 마마."

"....?"

"소녀는 세이코라고 합니다."

"세이코?"


카게야마는 당장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들어 눈만 깜박였다. 세이코는 고개를 숙였다.


"아랫마을에서 살던 소녀가 운이 좋아 마마의 눈에 들어,"

"...?"

"마마를 간호한 공으로 궁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세이코]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는 알아들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세이코, 네가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세이코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랬구나."

"..마마를 바로 모실 수는 없을 것이나, 함께 궁으로 가는 것은 허락받았으니.."

"....정말."


정말 다행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카게야마에게 세이코는 눈물을 글썽였다. 함께 백년해로 하길 바란 적도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꿈이었다. 하지만 이젠 함께 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도대체 왜 이런 길을 택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세이코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결말이었다.


"마마. 이 세이코, 충심으로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세이코는 조용히 카게야마의 앞에 인사를 올렸다. 귀족 아가씨였던 사야코가 변변한 신분도 없이 궁에 들어간다면 훨씬 힘든 삶을 살게 될 게 분명했다. 그것을 알기에 카게야마는 머리를 숙인 사야코를 그저 쳐다만 보았다. 하지만 사야코는 카게야마가 부를 때까지 몸을 숙인 채 일어서지 않았다.


"....."


사야코, 하고 부르려던 카게야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사야코가 살아가려고 마음 먹었다면 그것을 막을 명분은 자신에게 없었다.


"...세이코. 일어나거라."


세이코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웃어준다. 폐하때문이지만, 폐하때문이 아니랍니다. 마치 카게야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

"앞으로,"


쭉 모실 수 있게 되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세이코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


세이코의 시중을 받아 카게야마는 어깨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우시지마의 능력을 쏟아부은 어깨는, 전날 밤 꿰뚫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히 아물어 있었다. 그러나 세이코는 살풋 이마를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어깨를 문지르던 손을 떼었다. 동그란 흉터자국이 카게야마의 어깨에 남아있었다.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세이코는 한숨을 쉬었다.


"마마의 고운 피부에 흉이 남았으니 어쩝니까."

"...괜찮다. 이 정도의 상처라면 옷 속에 잔뜩 있으니까."


세이코는 들리지 않게 다시 한숨을 쉬었고, 카게야마는 괜히 어깨를 더듬었다. 오돌토돌하게 남은 작은 흉터를 보니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단 실감이 났다. 활을 맞고, 우시지마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카게야마는 곧바로 아이들과 함께 죽었을 것이다.


"살아있으니까,"


카게야마는 세이코를 쳐다보며 말했다.


"살아있으니 이 정도의 흉터가 대수겠느냐."

"...예. 그렇습니다."


살짝 찌푸렸던 세이코 역시 카게야마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으니 더 이상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카게야마의 막사 안으로



홀 : 이와이즈미

짝 : 킨다이치



다시 옷을 올려 입자마자 인기척이 들렸다.


"카...."


들어온 킨다이치는 세이코를 발견하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눈치빠르게 세이코가 물러섰다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카게야마, 다시 킨다이치가 부르기도 전에 카게야마가 일어서 킨다이치의 어깨를 잡았다.


"서도 돼?"

"다친 건 다리가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킨다이치는 여전하단 얼굴로 웃었다. 그로서는 카게야마의 그런 대답조차 반가웠다.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의 앞에서 팔을 붕붕 휘둘렀다.


"우시지마님께서 잘 치료해주셨어. 걱정할 것 없어."

"그래. 정말....정말."


정말 다행이야.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에게 어깨를 잡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카게야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오사와를 놓치지 않았다면 카게야마가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 오사와를 잡았다면, 카게야마는 아예 이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게야마를 좀 더 잘 지켰다면, 카게야마에게 조금 더 빨리 말을 해주었다면. 아니, 카게야마를... 


후회는 많았으니 시작점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길었다. 그리고 킨다이치는 어느 날 밤 카게야마가 깨어나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스로 카게야마를 친 날이었따. 가장 가까운 이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킨다이치의 왕은, 슬픔을 잊으려는 것처럼 계속 잠을 잤다. 킨다이치는 그 깨어나지 않는 얼굴을 보며 차라리 자신이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카게야마를 배신했다. 이 이기적인 마음을 과연 카게야마가 이해해줄까. 킨다이치는 분명 오사와를 잡은 후 카게야마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약간의 변명. 카게야마의 자신에 대한 변치 않는 우정과 사랑에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키고 싶었던 카게야마를 눈 앞에서 잃을 뻔한 순간 킨다이치는 모든 게 헛된 일처럼 느껴졌다.


제 아무리 계획을 짜서 움직이려고 해도 삶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반대로 튕겨나가 킨다이치는 그것을 쫓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무엇을 자신하여서 나는, 감히 카게야마를 지켜주겠노라고 장담했을까. 킨다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카게야마의 덤덤한 목소리를 듣자 킨다이치의 코 안쪽이 아렸다.


"킨다이치."

"...."

"...야."


카게야마는 킨다이치를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고개 들어봐. 킨다이치. 그러나 킨다이치는 미동도 없이 정수리가 땅에 닿을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킨다이치..?"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킨다이치를 다시 한 번 불렀다. 잠시 조용하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울고 있나? 카게야마는 더이상 킨다이치를 부르지 못했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킨다이치는 계속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


눈물을 꾹 삼키고 있던 킨다이치는 순간 놀라 눈을 깜박였다. 카게야마가 킨다이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향해 숙인 머리를 천천히 만지며, 카게야마가 말했다.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

"....."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다, 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온화하고 따뜻했다. 킨다이치는 참았던 눈물을 결국 한 방울 흘렸다. 




킨다이치는 눈에 먼지가 들어간 척 손등으로 눈을 슥 비볐다. 카게야마는 모른 척 해주었다.


1~3 : 다른 분들
4~6 : 언제
7~9 : 그러고보니까
0 : 집에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킨다이치는 눈을 돌린 카게야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예전의 카게야마라면 모른 척 하기는 커녕 자신이 울고 싶어한다는 것도 몰랐겠지. 킨다이치는 카게야마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왠지 키가 좀 큰 것 같았다. 거추장스럽다며 스스로 잘라내던 머리카락도 제법 보기 좋은 모양으로 자라있었다. 어릴 적 카게야마에게 왕녀님이라고 불렀던 일이 생각났다. 자신은 그렇게 부르는 건 부끄럽다고 불평했지만, 쿠니미는 가끔 카게야마를 왕녀님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다. 어쩌면 쿠니미 아키라는 그때부터 카게야마를 좋아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킨다이치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집이, 궁을 말하는 게 맞아?"

확인하듯이 물어보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무감으로 돌아가던 궁은 카게야마에게 언제부터 집이 되었을까.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배에 눈을 두었다. 조금 튀어나온 뱃속엔 찬란한 생명이 차있을 것이다. 킨다이치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네가 돌아갈 곳을 집이라고 부르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거기에 데려갈거야."

산 속에 집짓고 우리 둘만 살까? 그 농담을 듣고서 킨다이치는 산 속에 작은 집을 짓게 했다. 갈 곳이 없어진 카게야마에게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없다. 카게야마에게 집이 있다면. 

킨다이치가 무슨 생각을 하며 말을 하는지 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심각한 얼굴의 킨다이치를 보며 웃지 못했다. 제대로 대답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 : 그래 
0 :


웃어 넘길 수 없는 킨다이치의 표정에, 카게야마는 살짝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카게야마. 정말이야?"
"같이 가야지. 너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말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배를 보았다. 조금 부풀어있는 배.

"...남자아이야, 여자아이야?"
"...어?"
"아이."

킨다이치에게 지켜달라고 한 아이가 궁금했다. 카게야마는 알아듣지 못하고서 되물었다가, 아, 하고 기쁜 얼굴로 웃었다. 모처럼 보는 환한 미소였다.

"아직 못 들었지. 어떨 것 같아?"
"....글쎄."

웃는 얼굴이 기분 좋아보였다. 후계를 위한 남자아이라면 좋겠지만 단순히 그런 웃음처럼 보이진 않았다. 카게야마는 킥킥 웃고는 킨다이치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킨다이치는 이마를 조금 찌푸렸다가 살며시 얼굴을 댔다. 카게야마는 누가 들을새라 소곤소곤 속삭였다. 뭐? 정말이야? 곧 킨다이치가 깜짝 놀라 묻자 카게야마는 다시 활짝 웃었다.

쿠니미, 쿠니미도 알아? 킨다이치가 급하게 묻자 카게야마는 깔깔거렸다.

"당연히 알고 있지."
"우와...."
"대단하지?"

카게야마는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여기 두명이 있는데, 나중엔 배가 많이 커질거래. 듣는 이야기마다 귀에 달았다. 킨다이치는 왠지 제가 더 뿌듯해져서 동그란 배를 쳐다보았다.

"빨리 가야겠네."
"어?"
"집에, 빨리 가고 싶다며."


홀 : 그렇기는 한데 
짝 : ...응


"그렇기는 한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너무 많이 잤잖아."
"뭐?"
"벌써 해도 지고 어두워. 나는 피곤하지 않아도 다들 피곤할거고."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도 돼."

오사와가 목적이었으나 이제 남은 건 카게야마의 환궁 뿐이었다. 조금 더 고집을 부려도 된다고 권유하는 킨다이치의 말에도 카게야마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 상태로 밤에 움직이는 건 위험해. 죄인들도 호송 중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네가 빨리 가고 싶다고 했잖아."
"좀 참아야지."

카게야마는 단순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쿠니미도 좀 기다리라고 해."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 카게야마는 자연스럽게 킨다이치에게 명령했다. 금방이라도 떠나려던 킨다이치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웃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할게."

*


카게야마가 원하는 대로 환궁은 미뤄졌다. 그덕에 모두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사야코가 없는 틈을 타 오사와에 대해 물었다. 오사와가 전부 다 말하였냐는 물음에 킨다이치는 빙긋 웃었다.


"물론 전부 확인했지."


킨다이치는 결코 죄인을 때리지 않았다. 피를 보지 않고 자백을 받기 제일 쉬운 방법은 물고문이었지만 그것도 선호하지 않았다. 장군은 줄 수십개를 가져와 오사와의 앞에 쏟았다. 그리고 오사와가 입을 다물 때마다 의자에 앉은 오사와의 몸을 묶었다. 처음엔 우습게 여기고 코웃음을 치던 오사와는 아마도 시간이 지날 수록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사방에서 압박하는 줄. 단단히 묶인 줄 위에, 또 다시 거친 밧줄을 동여맨다. 처음엔 팔다리로 시작해 흉부를 압박하자 오사와는 괴로워했다. 살가죽은 줄 사이사이에 끼어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럽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입을 다물면 또 다시 줄을 든 병사들이 다가온다. 차라리 때리고 윽박질렀으면 오기로 버텼을 터였으나 킨다이치는 그러지 않았다. 터놓을 말을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 후 손수 줄을 병사에게 건내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와이즈미조차 허, 하고 감탄을 했다.


"그는 너와 오사와 사야코를 팔아넘겨서 후쿠로다니로 망명하려고 했어."


킨다이치는 짤막히 말한 후 막사 밖을 힐끔 보았다.


"줄줄 불더군. 그 동안 궁에서도 너를 해칠 계획을 세웠던 거지."

"....."

"그, 남자. 너를 찌른 남자 또한 오사와의 말이었고."


동생의 죽음에 의심을 품은 남자를 오사와는 교묘히 이용해, 카게야마가 단월일에 외출을 하면 없애버릴 심산이었다고 했다. 거의 미쳐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생각난 카게야마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궁녀의 죽음에 대해 아는 건 없으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킨다이치는 자신도 모르게 죄인을 보겠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예전의 왕이었던 신분이 아니다. 그러니 직접 죄인을 볼 필요도, 확인할 일도 없다. 그리고 킨다이치는 회임한 카게야마에게 나쁜 것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카게야마의 안색을 살피며 킨다이치가 말했다.


"제 입으로 이용했다고 말했으니 옆에 있던 그 놈도 들었겠지."

"...순순히 믿을까?"


카게야마는 남자의 울분이 그렇게 쉽게 풀릴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대꾸했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

"어차피 궁으로 돌아가면 처형당할 테니까."


회임을 한 카게야마를 찌른 건 중죄 중의 중죄였다. 또한 말을 들어보니 단패궁에 불을 지르려고 했고, 탈옥을 하여 카게야마를 납치한 장본인이다. 아무리 이용당했다고 하더라도 도가 지나쳤다. 카게야마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자 킨다이치는 고개를 저었다.


"용서할 순 없어."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오해는 풀고 싶었는데."


예전이라면 눈 하나 깜박 안 할 원한에 마음이 가는 건 임신을 했기 때문일까. 카게야마는 배를 한 번 쓰다듬어보았다. 모든 걸 전부 정리하고 간다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에게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선 신경쓰지 말라고 한 후 막사를 나갔다.



저녁은 간소하게 배만 채우는 분위기였다. 카게야마도 세이코의 시중을 받으며 저녁을 먹었다. 시간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하곤 다들 움직이더라도 그 모양엔 여유가 있었다. 카게야마 또한 잠시 주변을 걷다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마마.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세이코는 철저히 카게야마에게 공손히 대하며 궁녀노릇을 잘 해냈다. 잠을 자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보고 묻자 카게야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묻지 못한 세이코가 나가고, 카게야마는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밤이 깊었다. 막사 밖의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보인다. 지키고 선 병사들은 꾸벅꾸벅 조는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바깥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를 살펴보았다. 혼자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쿠니미."


아침 일찍 떠나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오늘만큼 빨리 달이 지고 해가 뜨길 기다려본적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물기가 없어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낮에 한참 잤으니 더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하품을 연신 하던 카게야마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보초를 서던 병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발자국이 점차 자신의 막사 쪽으로 가까워졌다가, 또 한참을 머뭇거리며 서있는다. 카게야마는 까닭없이, 저 사람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그랬다.


"....."


한참을 서있던 발자국이 다시 뒤로 물러갔다. 그러다가 저벅저벅 다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다.


"누구,"


카게야마가 말하려던 순간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카게야마..?"

"...하ㅈ..이와이즈미님!"


꾸벅꾸벅 졸던 병사들이 카게야마의 외침에 깼다. 막사 앞에 선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보며 놀랐다가도, 금방 웃었다.


"아직 안 잤구나."


누군가를 생각하며 카게야마가 잠을 못 이루던 때에 이와이즈미 또한 잠을 설쳤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이와이즈미의 손을 먼저 꽉 잡았다.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녹을 듯이 웃다가, 잠시 바라본 후 묻는다.


"아직도 안 자다니, 아이를 가졌으니 잘 자야지."

"잠이 오지 않았는 걸요."

"나도 그렇더라."


카게야마가 왜요? 라고 물어봤으면 아마 카게야마는, 자신이 쿠니미를 생각하였듯 이와이즈미 또한 카게야마를 생각했다는 것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렇군요. 하고 웃었다. 이와이즈미는 조금 아쉬웠으나 미련은 억지로 떨쳐냈다.


"얼른 자야하지 않아? 내일 일찍 출발할 거야."

"매일 잠을 잤는데 조금 못잔다고 해서 문제가 있을까요?"


오히려 의아한 듯 묻자 이와이즈미는 할 말이 없었다. 어, 그건 그렇네. 이와이즈미는 스스로의 대답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마침 답답해서 걷고 싶었는데, 같이 걸으세요."

"이 밤에.."

"막사 주변만, 평지니까 괜찮아요."

"....."



1~9 : 그러자 

0 : 으음...



평소라면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는 것이 아쉬워 이와이즈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같이 가주실 거예요?"

"같이 가자고 말을 꺼냈으면서, 요게."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볼을 건드렸다. 카게야마가 까르르 웃었다. 밝은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됐다. 다친 곳은 전부 다 나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직접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그는 이 밤에 찾아왔다. 불순한 의도라고 오해할까봐 두려웠으나 웃는 눈동자는 그저 사랑스러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갈까?"

"예."

"멀리는 가지 못해."


알아요, 긍정하는 목소리는 밤이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아련한 느낌이었다. 아니다.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쓸쓸하기 때문이었다. 


*


카게야마는 편한 신으로 바꿔 신었다. 다행히 달이 떠있어 완전히 어둡진 않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병사들도 드문드문 돌아다니고 있어 적막하진 않았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나 어쩌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으로 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잠깐 갸웃거렸다.


"근처에 시내가 있나봐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래? 나는 안 들리는데.."

"저 앞이에요. 이와이즈미님. 한 번 가봐요."


개운한 밤공기에 몸이 씻겨내려가 카게야마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이와이즈미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보이는 카게야마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 네가 가자면 가자. 이와이즈미는 서두르려는 카게야마를 말리며 뒤를 따라갔다. 처음 봤을 때보다 긴 머리카락, 동그랗게 튀어나온 배. 무엇 하나 이제 자신이 붙잡을 수 없기에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이와이즈미는 한참 카게야마를 따르며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물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곧 달빛 아래 반짝이는 작은 개울이 나왔다. 그리고 코끝에 풍기는 꽃향기. 카게야마가 탄성을 질렀다. 


"보세요, 꽃이 저렇게 피었어요."


이와이즈미 또한 보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왜 흔한 꽃을 보고 기뻐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아직 개울 근처에 피어있는 꽃창포를 보며 역시 이곳을 찾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개울 근처로 다가가자 넘어질까 두려워 이와이즈미가 얼른 다가왔다.


"저 꽃이 가지고 싶어?"

"예."

"...내가 꺾어줄게. 여기 있어."

"아니, 저건."


카게야마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쿠니ㅁ, 섭정의 생일에 아무것도 주지 못해서요."

"섭정에게."

"제가 직접 꺾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가 다시 다가가려고 하자 이와이즈미가 막았다.


"하지만 네가 다쳐서 가면 나도, 섭정도 마음이 좋지 않을 거야."

".....그래도."

"앉아 있어."


이와이즈미는 제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하는 수 없이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옷 위에 앉았다. 소매를 걷은 이와이즈미는 가장 예뻐보이는 것을 골라 꺾었다. 은은히 빛나는 꽃은 밤이슬을 맞아 더욱 아름다웠다.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럽게 딴 꽃들을 모아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카게야마는 품에 안고서 감사인사를 했다.  보라색 꽃과 카게야마가 무척 잘 어울렸다. 하긴 무슨 꽃이었어도 어울리지 않는게 없었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얼마전 자신이 꺾어주었던 개나리를 떠올렸다.


샛노란 개나리꽃을 두고서 카게야마는 가장 먼저 봄을 본다고 기뻐했고, 그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며 장난을 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애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유치함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눈앞에 서서 꽃향기를 맡아보는 카게야마는 짧은 시간 동안 훌쩍 자란 것 같았다. 자신만이 어리고 들뜬 시간 속에 남아 있었다. 


"이 꽃을 찾으러 온거지?"


부드럽게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인다. 이와이즈미는 빙그레 웃었다.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이와이즈미님."

"편하게 부르라고 했잖아."

"..하지메님."


하지메님. 카게야마는 꽃을 가슴 가득 끌어안았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보려다가 손을 내렸다. 여동생이라고만 생각한 사람이 이렇게 여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연모하게 되었다. 오라버니로서 축하를 해줘야했다. 하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토비오."

"...! 네."

"섭정을 좋아하게 됐어?"

".....좋아한다는 게,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또 생각하면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짜증도 나는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말했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거라면 좋아하는 게 맞죠?"

"응. 그래."

"....그럼.. 하지메님 말이 맞나봐요."


카게야마는 부끄러운지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주었다. 꽃을 살펴보던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어두움 속에서도 반짝였다. 변하지 않고 아름다워 반짝거리는. 이와이즈미는 손을 잡으면 놓기 싫어질 것을 알면서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좋아하는 마음도 있지. 떠오르면 행복해지고, 절로 노래를 부르고 싶고, 아까 봤는데도 다시 찾게 되고."


그리고 헤어질 걸 알면서도 사랑해버리고 마는 마음도 있다. 이와이즈미는 뒷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카게야마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좋아하는 마음은 복잡하군요. 하지메님."

"하지만 카게야마 너는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더 행복해질거야."


그 말에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를 쳐다봤다. 어째서요? 당돌하기까지 한 의문에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왜냐면 나는 네 덕에 행복해졌거든."

"하지메님이.."

"그러니 분명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욱 행복하겠지."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였다. 여기서 마음을 설핏 드러내니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이와이즈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짧은 밤이었다. 아쉬움과 한탄으로 보내기엔 아까운 시간이었다.


둘은 조용히 다시 밤길을 걸어왔다. 막사 근처로 오자 불빛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아주었다. 꽃을 품에 안아 꽃같은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메님, 하고 부르려는 카게야마의 말을 이와이즈미는 막았다.


"전에 내가 가르쳐준 게 있어. 기억나?"

"...예?"

"술을 따르는 건 부부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던 거."

"아...."


언젠가 네 잔을 받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런 남자가 없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숙였다. 싱싱한 꽃향기가 물씬 풍겼다.


"네 처음은 나지만, 부부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

"하지메님."

"그런 걸 혹시 섭정이 신경쓴다면 언제든 아오바죠사이에 연락해. 토비오."


내가 혼내줄 테니까. 이와이즈미는 씩 웃곤 뺨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서 가서 자렴. 이와이즈미는 손수 막사 앞까지 카게야마를 데려다주었다. 카게야마는 들어가려다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와이즈미는 계속해서, 카게야마가 볼 때마다 손을 흔들어줬다.  머뭇거리던 카게야마가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작게 감사해요, 라는 입모양도 보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자리에 서서 카게야마가 누웠을 막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또 한참 뒤에야 제 막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문득 옷에 코를 대보았다. 카게야마에게서 묻어나온 꽃향기가 남아 있었다. 곧 사라질 향기를 맡으니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함께한 순간들은 아프지 않았다. 


아름다운 밤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아침이 올 것이다.





3월 30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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