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야마를 좋아해온 시간과 카게야마가 존재했던 시간은 쿠니미에게 같았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없는 동안 쿠니미는 계속 제 아픈 다리를 매만졌다. 카게야마를 붙잡기 위해 만든 상처만이 카게야마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줬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를 그대로 놓친 저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해 그는 이상한 생각도 했다. 혹시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건 그저 망상이었던 건 아닐까, 갈 곳 없던 마음이 이상의 여인을 스스로 만들어 잠시라도 행복하려 했던 것이다. 킨다이치에게서 답이 올 때까지 그렇게 쿠니미는 나약하고 끔찍한 밤들을 보냈다.
홀 : 이제
짝 : 빨리
하지만 이제, 카게야마는 돌아온다. 쿠니미는 자칫 어둠으로 끌려들어갈뻔한 정신을 다잡았다. 공식적으로 카게야마는 이 궁 밖을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오사와와 카게야마는 상관이 없어야 했다. 회임을 한 카게야마가 납치를 당했다가 돌아온다면 후에 무슨 헛소문이 퍼질 지도 몰랐다.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연회도, 떠들썩한 구출담도 그는 원하지 않았다. 조용히 카게야마가 제 자리에 돌아와준다면... 쿠니미는 냉정히 생각하다가 또한 머릿속이 하얘졌다. 돌아온 카게야마는 분명히 자신에게 따져 물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쿠니미에게 전부 다 말해보라고 한 후, 실망할 것이다. 쿠니미의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실망한 카게야마는 어떻게 할까.
궁을 나갈까? 나를 미워하며 궁을 나가게 될지도 몰라. 카게야마가 나를.
바로 얼마전, 운명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제발 살아만 있어달라고 애원하던 마음은 간사해져 또다시 바뀌었다. 욕심내지 않을테니 제발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하지만 무사한 걸 알고 나자 또다시 그리워졌다. 쿠니미는 불확실한 결말들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괴로운데도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죽겠노라던 다짐은 애타게 바뀌어 그것조차 약속할 수 없었다. 쿠니미는 충격을 받아 크게 떠진 카게야마의 두 눈을 기억했다. 카게야마를 다시 복권시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목숨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죽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을 따르는 중신들은 키타가와를 위해 일해달라고 말했다. 쿠니미는 키타가와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카게야마에겐, 돌아온 카게야마에게는 내가 필요할까? 분명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키타가와를 위해 일해준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카게야마 본인에게는, 죽어도 소용없는 목숨이 살아서는 카게야마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까. 평생 카게야마를 위해 바치겠다고 말해온 목숨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존재한거지. 쿠니미의 가여운 상념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누군가 방문했다.
홀 : 남궁
짝 : 북궁
홀 : 히나타
짝 : 츠키시마
그 얼굴은 쿠니미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것이었다. 사실은 정말로 싫었다. 카게야마를 자신들 쪽으로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남자였다. 예의를 지켜야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쿠니미는 왜 찾아왔냐는 말부터 불쑥 물었다. 주인을 잃어 경황이 없는 쿠니미에게 여유는 없었다. 츠키시마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싫다는 얼굴로 보지마."
"....."
"나도 섭정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거든."
둘 다 뜻이 맞았다. 츠키시마가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쿠니미는 차를 내오지 않았다. 츠키시마도 딱히 요구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츠키시마 쪽에서 가만히 있으니, 결국 쿠니미가 먼저 재촉했다. 츠키시마는 명백히 귀찮아하는 것 같은 쿠니미의 말에도 딱히 기분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몇 번 망설이다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카게야마. 츠키시마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이제 돌아온다고 들었는데, 다른 소식은 없는지 궁금해서."
그러나 오래 생각해온 사람처럼 이름을 부른 후엔 문장이 술술 나왔다. 츠키시마는 확실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쿠니미는 츠키시마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구출하고, 환궁하신다는 말 외엔 없었습니다."
"하긴, 조금 다쳤더라도 치료가 가능한 사람이 같이 갔으니 상관없나."
"...다쳤을 리가."
쿠니미는 츠키시마의 말이 못마땅했다. 그것을 물어보러 왔냐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자 츠키시마는 혀를 찼다. 그는 약간 한숨을 쉬었고, 또 짜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돌아오면 우린 내일이라도 카라스노로 돌아가야겠어."
"...이렇게 급하게 떠나신단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
뜻밖의 말이라 쿠니미조차 잠깐 놀랐다. 츠키시마는 말하고나니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제 손님으로 남아있을 필요는 없고, 히나타도 돌아가서 기반을 쌓는 게 낫겠지."
카게야마가 츠키시마 자신이나 히나타의 아이를 가지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패라면 실패였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던 계획은 실패였다. 그것만을 위해 온 츠키시마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어떤 이해관계도 이제 카게야마에게는 품지 않고 있다. 무사히 카게야마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츠키시마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냉정히 자신을 살피는 쿠니미에게 츠키시마가 말했다.
"...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키타가와가 떠나는 히나타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준다면 더 빨리 떠나줄 수도 있지."
"연회라도 열어드릴까요."
"노골적으로 빨리 가길 바라고 있네."
"....지금 저는 츠키시마님의 빈정거림을 부정할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머리가 다른 일로 꽉 찼거든요. 쿠니미는 그렇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뜻은 알았으니 더이상 쿠니미가 할 말은 없었다. 츠키시마 또한 그렇기에, 그 무례한 축객령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츠키시마는 말했다.
"얼굴 정도는 보고 갈테니 당장은 안 가."
"...그러시겠죠."
"....."
츠키시마는 섭정의 궁을 나왔다. 그는 큰 길을 따라 걷다가 돌아가기 전 단패궁 앞에 섰다. 담 너머로 단풍나무의 머리끝이 보였다. 영원히 붉은 나무라고 했었나. 시위들이 츠키시마를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괜히 나무 핑계를 대며 궁 안을 들어가보면, 주인이 없는 궁은 궁인들이 돌아다녀도 텅 빈 느낌이었다. 궁녀가 츠키시마에게 다가와 인사하고는 무슨 일로 오셨냐는 얼굴로 곁에 섰다. 츠키시마는 대답 대신 단풍나무를 다시 쳐다보았다.
저 나무에 올라타서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가 생각났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외모였지만, 츠키시마는 보자마자 단패궁의 주인이란 걸 알았다. 제발 조용히 해달라는 얼굴로 손가락으로 쉬, 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장난을 쳤지만 어쩌면 그의 뜻대로 해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훌쩍 나무에서 내려온 여자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분한 얼굴로 츠키시마를 쳐다봤었다.
"....."
단풍 나무 아래 서있던 여자의 이름은 카게야마 토비오. 어쩌면 츠키시마가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는 이름이다. 츠키시마는 단풍나무 바로 밑에 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왠지, 무척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
죄인들은 포승줄에 묶였다. 특히 오사와 타카히로는 요주의 인물이기에 함거에 가두었다. 킨다이치 유타로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오사와같은 이를 어떤 재판도 없이 죽인다면 분명히 뒤에 말이 나올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죄목을 읊어주고 절차를 밟는 게 제일이었다.
킨다이치의 앞에서는 피를 보지 않았으나, 킨다이치가 없을 때 어떤 꼴을 당했을 지 짐작이 가는 모양새로 오사와는 함거에 올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옷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멍자국들. 킨다이치가 묵인하였으므로 남은 흔적이었다. 그는 이미 의지를 잃고 순순히 병사들에게 끌려갔다.
다만 딱 한 번 그가 함거의 창살에 달라붙었던 건 그의 딸인 사야코가 카게야마를 따라 지나갈 때였다. 카게야마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마차로 가던 사야코는 익숙한 노성에 발걸음을 멈췄다.
"사야코!!"
제 딸이 자신을 팔아넘기고 몸을 보전했다는 걸로 타카히로가 화를 낼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사야코는 카게야마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화를 내던 목소리는 곧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자의 목소리는 비굴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사야코, 사야코, 네가 무슨 소리에 속아넘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비를 좀 보거라."
"....."
"저자들이 정말 너를 받아줄 것 같으냐? 이미 반역으로 나를 몰아갈 준비를 한 저들이 너를,"
"....."
"정말로 받아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 주제를 생각해라. 여인으로도 어디에도 쓸모없는 너를 내가 이만큼 키워서..!! 그저 달래보려던 목소리가 분을 참지 못하고, 사야코의 치부를 드러내자 카게야마가 먼저 그를 돌아보았다. 탐욕과, 그 탐욕에 대한 좌절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독이 퍼지는 것 같았다. 소용있을 때만 딸로 생각하는 거냐고 카게야마가 쏘아주려고 할 때, 그리고 상황을 보던 킨다이치가 타카히로를 조용히 시키라고 병사들에게 눈짓을 할 때, 그보다 먼저 사야코의 입이 열렸다.
"저는..."
".,.사야코. 아비다. 네 아비다,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오사와의 눈이 커졌다.
"무슨, 소리..."
오사와 타카히로는 지금껏 한 번도 권력을 움켜쥐고 놓아본 적이 없었던 남자였다. 비록 지금 실패하여 수치를 당하고 있어도,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게 숨쉬는 것 보다 더욱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딸에 대한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신은 비록 비참하게 죽더라도 버러지처럼 살아남은 여식이 있다. 지금껏 말을 잘 들어온 딸은 아비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틀림없다고 믿었다. 핏줄을 막연하게 믿은 오사와는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수가 없었다. 세이코가 표정없이 말했다.
"제 이름은 세이코로, 단패궁 마마 밑에서 일하는 궁녀입니다."
".....그게..무, 무슨.."
"오사와 댁의 소저께서는 지난 밤 화재로 돌아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오사와에게 다가가려는 병사를 킨다이치는 막아세웠다. 카게야마도 입을 다물었다. 세이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하게 하고 싶었다.
"혹시, 그 탓으로 실성을 하신 것인지요."
"사, 사야코, 사야...!"
"참으로 안 됐습니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사와 사야코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눈은 울고 있으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조차 어려있었다.
"오늘 부로 더 이상 오사와의 성을 가진 이가 없을테니 잘 되었습니다."
"....!"
"불행하게 아비의 그늘에서 살아온 딸도 그것을 바랐을 테지요."
사야코, 라고 부르려던 목구멍이 막혔다. 세이코는 고개를 돌렸다. 마마. 가세요, 카게야마를 부축하여 마차에 오른다. 타카히로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분노와 멸시, 그리고 당혹이 섞인 눈으로 보던 남자는 허..하고 웃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 공허한 웃음이었다.
상처를 주면 가슴의 한이 다 씻겨내려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코는 마차에 타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카게야마는 세이코를 달래줄 방법을 몰라 머뭇거렸다. 카게야마가 어색하게 손을 올리려고 할 때 즘 세이코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흉한 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마마."
"...괜찮..느냐."
"그럼요."
"....."
태어나게 해준 사람은 부모였다. 그러나 사야코는 한 번도 아버지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이용가치의 여부에 따라 나눠졌고, 그의 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런 오사와의 앞에서 사야코를 위해 싸워주었다.
네 죄와 사야코는 상관없어. 나는 사야코를 자유롭게 해줄거야.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세이코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이기적이고, 불효를 저지르고, 천륜을 버린 이라고 욕을 먹어도 좋았다. 다만 세이코는 그런 카게야마의 곁에서 오래오래 있기를 원했다.
"세이코?"
걱정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카게야마에게 세이코는 눈물이 매달린 눈가를 닦아내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마."
"...."
"정말로 괜찮아요."
아버지를 버렸으니 자신은 지옥에 갈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이코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카게야마의 곁에 있기로 했다.
"..그래, 돌아가자."
카게야마는 더이상 어떤 말을 해주어야할 지 몰라 눈을 돌렸다. 자신이 조금 더 말재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곤란해하는 카게야마를 위한 것처럼 밖에서 킨다이치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마.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린 환궁이었다.
평탄한 길이니 쉬지 않고 간다면 오늘 안에는 도착하겠지. 카게야마는 말없이 무릎에 올려둔 꽃창포를 내려다보았다. 새벽에 꺾은 꽃은 물을 먹여 시들지 않고 아직도 싱싱했다.
쿠니미가 좋아할까?
그동안 선물은 계속 받아오기만 했다. 손주머니를 만들어서 다른 분들에게 주었을 때도 느꼈지만, 선물을 준다는 건 굉장히 떨리는 일이었다. 더구나 쿠니미가 이 꽃을 받고 좋아할지를 생각하면 카게야마의 얼굴은 화가 난 듯 붉어지는 것이었다. 울그락불그락하는 카게야마에게 세이코가 얼른 마마, 더우세요? 하고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젖은 꽃잎으로 무릎이 조금 축축해져도 카게야마는 꽃을 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주고 싶은 마음은 옷이 더러워지더라도 바닥에 꽃을 놓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았다. 그렇구나.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은 이런 거였어.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예쁜 것만 주고 싶었다.
나만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그게 내가 자랑할 만한 유일한 거야. 카게야마. 어느날 절박했던 쿠니미의 고백이 떠올랐다. 나는 쿠니미의 자랑. 그렇다면 나의 자랑은..
간밤 뒤척였던 탓에 카게야마의 고개가 꾸벅꾸벅 내려갔다. 세이코는 눈치를 보다가 얼른 카게야마의 머리 옆에 솜베개를 대주었다. 벽에 기댄 카게야마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조용히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북궁>
츠키시마가 돌아왔다. 히나타는 쳐다보지 않았다. 이미 짐을 정리한 궁은 조용했다. 돌아보지 않는 히나타에게 츠키시마가 말했다.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말해뒀어."
"....."
"히나타."
부름에 답은 없었다. 츠키시마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바둑을 두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정적을 깬 것은 이번엔 히나타였다.
"나도 같이 해."
"뭘."
"그거."
히나타가 가리킨 것은 바둑판이었다. 츠키시마는 피식 웃었다.
"또 바둑판을 엉망으로 만들게? 너랑은 안 해."
"할래."
"......자."
흑돌을 건네자 히나타는 유심히 바둑판을 들여다보았다. 저번에도 이러다가 손으로 마구 바둑판을 휘저었지. 츠키시마는 묵묵히 히나타가 돌을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돌을 움켜쥔 히나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중얼거렸다.
"...겠어."
"....뭐?"
"..모르겠다고."
바둑판을 노려보는 얼굴은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바둑같은 거 정말 모르겠어."
"히나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다 알기도 전에 끝나서 그런가."
"....."
"츠키시마. 나는,"
나는 정말로 잘 해보고 싶었어. 알지? 히나타는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츠키시마는 대답 대신 히나타 손에 쥔 돌을 빼앗아 자리에 두었다.
<남궁>
"오늘 올거래. 다 무사하고."
코즈메의 말에 주어는 없었다. 흑표범으로 변해 자리에 누워있던 쿠로오는 그르릉 울었다. 마마님 무사하다면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코즈메는 쿠로오의 곁에 앉았다. 손에 늘 들고 있던 책도 덮고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몸통에 몸을 기댄다. 결을 따라 쓰다듬으면 비단같은 검은 털을 끌어안고서 코즈메가 말했다.
"쿠로."
"으음."
"기운 좀 내."
"이 완벽한 꼬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코즈메의 눈 앞에서 살랑살랑 고양이처럼 꼬리가 흔들렸다. 그러나 코즈메는 웃지 않았다. 쿠로오를 심란하게 하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꿉친구는, 한숨을 쉬며 다리 쪽을 찰싹 때렸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따라가지 그랬어."
"사람이 많으면 구출엔 오히려 방해지."
"쿠로는 방해하지 않아. 세명이나 네명이나 그게 그건데."
"켄마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들어본다."
나서라고 부추길 줄도 알아? 쿠로오의 어깨가 웃느라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금방 웃음은 가라앉았다. 켄마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뜨끈한 짐승의 온기가 분명히 느껴지는데도 왠지 추운 기분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잖아."
"....."
"그것처럼 가볍게 돌아가. 쿠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어. 켄마."
네코마의 둘은 동시에 또 미소를 지었다. 쿠로오가 말했다.
"마마님. 빨리 왔으면 좋겠네."
"응."
"오면 네코마로 훔쳐가버리자."
"그 농담 재미없다니까."
그래도 코즈메는 잠시 카게야마가 네코마에 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생각만으로도 조금 즐거워졌다. 이루기 힘든 일이라는걸 알아도, 한기마저 조금 가시는 것이었다.
"재미없으면 마마님한테는 다른 농담을 하자."
아마도 농담 말고 진담을 말할 시간은 없을 테니까. 쿠로오는 끝까지 유쾌한 사람으로 카게야마에게 남고 싶었다. 지금와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욕심이었다.
*
...병풍 뒤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기다리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 때 자신은 죽어도 좋았다. 카게야마를 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다리라도, 그 어떤 것이라도 내어줄 수 있었다. 그 마음은 그대로 자라나 이번엔 카게야마를 다시 왕 위로 올려놓겠다고 결심했다. 병풍 뒤에서 거칠었던 호흡. 카게야마의 소중한 것이 되어주라고 외치던 왕의 속삭임. 떠올리면 쿠니미는 다리의 고통보다도 그날이 더욱 생생히 떠올랐다.
카게야마가 자신을 신경쓰는 게 좋았다. 그저 좋기만 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 날 이후로 계속 그 어두운 병풍 속에 갇혀있었다. 카게야마를 위해 자신을 죽이길 바라며, 카게야마가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모순적인 욕망이 온 몸 구석구석을 파먹었을 때야 쿠니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저 욕망의 끝에서 결국 자신은 카게야마의 사랑만을 바라고 있었다.
죽기를 바란 것은 카게야마를 왕 위에 올려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빼앗은 것을 돌려주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게야마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길 바랐다. 소중히 여겨준다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둘은 같았다. 쿠니미의 모든 행동의 이유엔 카게야마가 자신을 사랑했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자신을 탓하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열렬히 사랑고백을 하고 있었다.
병풍 속에 있을 때는 간단했다. 자신의 몸을 해치고, 카게야마는 그것을 보며 걱정하는 관계. 죄책감으로 카게야마를 붙잡아 놓는 이기심, 결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애원은 쿠니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카게야마의 사랑은 그럴 수 없다. 비로소 제가 원하는 걸 진정으로 깨닫게 된 미숙한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무엇을 위해?"
나는 이제 뭘 해야하지? 쿠니미는 차라리 다시 한 번 다치고 싶었다. 자신을 떠나려던 카게야마를 잡기 위해 그는 병풍 뒤로 갔었다. 그러나 이번엔 자신이 먼저 도망칠지도 모른다. 만약 카게야마가 떠난다면, 카게야마가 떠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가릴 것이 필요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카게야마."
나 지금 어린애가 된 것 같아. 쿠니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방을 돌아다녔다. 함부로 다루면 부서질 것 처럼 쿠니미 아키라는 비틀거렸다. 쿠니미의 기억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나 때문에 죽을 작정이야? 카게야마가 화가 나서는 추궁하던 목소리. 무서워...쿠니미는 정말로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카게야마가 없을 때는 어떻게든 그를 구해오기 위해 다잡았던 마음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얄팍하게 버텨온 것들이 깨져나간다. 나 미워하지 마. 카게야마. 쿠니미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다시 오면, 카게야마는 화를 내고, 떠나고, 아니, 카게야마는 나를 찾으러 다시 돌아왔다고 했어. 그러다가 결국 나 때문에 납치를..오사와, 오사와에게. 오사와는 죽여야 돼.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카게야마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몸이 떨렸다. 쿠니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쉴 수 있는 곳이 있었다.
*
해가 궁을 코앞에 두었는데 말들이 지쳐 움직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마차를 세우고 킨다이치들은 말들에게 건초와 물을 먹였다. 카게야마는 기지개를 하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세이코가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고 해도 직접 걷는 것만 못했다. 오래 마차를 타서인지 허리도 아팠다. 배가 튀어나와서인게 분명해. 카게야마는 자신의 배를 슥슥 문질렀다.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킨다이치가 다가왔다.
"피곤하지?"
"괜찮아. 앉아있기만 하는 걸."
"불편하면 말해야 돼. 넌 혼자 몸이 아니니까."
"이 정도도 못 버티면 안 돼."
아이들을 그렇게 약골로 키우진 않을 거야. 카게야마는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킨다이치는 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또한 차분히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카게야마."
"응."
"말하고 싶은 게 있어."
실은 진작 말했어야하는 내용이었다. 미움받는 것이 두려워 숨기고, 지키려다가 여기까지 왔다. 진지한 킨다이치의 얼굴을 카게야마는 바라보았다. 곧은 시선이 마주쳤다. 킨다이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는 말해야했고 킨다이치는 그게 자신의 일임을 알았다.
"지난 12월의 일에 대해 말할 게 있어."
"....."
"변명은 아니지만 변명같이 들릴 지도 몰라."
카게야마는
홀 : 그건
짝 : 한 번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의 말을 막았다.
"한 번만 나한테 기회를 줘봐."
"뭐?"
"내가 맞출거야."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킨다이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신중한 눈동자로 킨다이치를 쳐다보았다. 보통이라면 이해하기 힘들었던 킨다이치와 쿠니미의 행동들이었다.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언제나 자신을 공경하던 두 사람. 제 목숨을 바쳐 다시 카게야마를 왕으로 올리겠다는 쿠니미의 말에는 단호한 결심이 있었다. 킨다이치는 쿠니미의 결심을 알았을까? 아마 거기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걸 알았다면 킨다이치가 쿠니미를 말리지 않았을 리 없다.
"쿠니미가 섭정에 오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사와의 권력을 빼앗는 것이었지."
"....."
"그리고 결국 성공했고."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오사와를 차근차근 조여갔다. 거기까지는 카게야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진작 오사와가 이 일에 관련되어있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하지만 오사와를 치는 것에 자신이 방해되는 위치였던가? 자신이 왕이었다면 틀림없이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도왔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순간 고개를 저었다. 끝없는 전쟁으로 자신은 궁을 계속 비워두었다. 그만 돌아가자는 킨다이치의 말도 듣지 않았다. 눈 앞의 길만을 생각했고 뒤는 돌아보지 못한 왕이, 쿠니미와 킨다이치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 그 둘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비밀을 밝힐 만한 이유로는...
고민하던 카게야마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는 쿠니미에 의해 잡혔지."
"....."
"아오바죠사이는 가장 가깝다고 해도 거리가 있는데, 그렇게 금방 때를 맞춰온 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해."
반란은 오사와와 쿠니미, 킨다이치에 의해 일어났다. 단순한 내란을 오이카와같은 거물이 올 리가 없었다. 아니, 보통이었다면 카게야마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폭군이란 명분은 충분했다.
"난을 일으키기 전 먼저 오이카와님에게 알렸던 건가..?"
"....."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오이카와가 왔기 때문에 카게야마가 여자인 사실이 밝혀져 단패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오이카와가 오지 않았다면 카게야마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오사와에게는 자신이 죽어주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계속 죽이려고 했을 리 없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게야마는 마음 깊숙히 품고 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킨다이치."
"...예."
"먼저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은 오사와였구나. 맞지?"
"....."
킨다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카게야마에겐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신권은 왕이 전쟁을 나간 동안 내부에서 더욱 강력해졌다. 특히 오사와의 무리가 그랬다. 쿠니미가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어, 카게야마를 도망치게 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오사와는 오랫동안 왕이 되길 바라던 남자였다. 도망친다고 해도 끈질기게 추격해 기필코 카게야마를 죽게 할 것이다. [카게야마]가 살아있다면 오사와에게 정당성은 없었다. 당장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쿠니미가 선택한 것은 카게야마의 목숨이었다. 어떤 것도 온전히 보전할 수 없다면 카게야마만은 살려야한다는 결정이었다.
쿠니미는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어 자신 또한 카게야마를 마음 깊이 증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난에 동참하는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오사와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뒤로는 아오바죠사이에 알리고, 카게야마를 보호해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려 일을 단행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더라도 쿠니미와 킨다이치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카게야마를 지켜줄 만한 힘이.
킨다이치는 지금도 쿠니미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면 카게야마를 살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숨값으로 카게야마가 희생해야했던 일들은 너무 많았다. 카게야마를 볼 때마다 죄책감으로 죽고 싶으면서도, 지켜야하기에 살아온 날들. 하지만 자신이 조금 더 카게야마를 제대로 지켰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킨다이치는 카게야마가 자신들을 미워해주기를 바랐었다. 급히 달려온 사람처럼 킨다이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어."
"....."
"차라리 나를 미워해줬으면 했지. 그런데도 너는..."
카게야마는 끝까지 킨다이치와 쿠니미를 미워하지 못했다. 감히 용서를 바라지는 않지만..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표정에 많은 감정들이 스쳐지나간다. 미움, 증오, 분노, 회한, 후회, 슬픔, 당혹. 수많은 것들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킨다이치가 초조하게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그랬군."
그리고 그 얼굴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건 깨끗한 애정이었다.
"너희가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죽어 땅에 묻혔을 테고,"
"....카게야마."
"또 이 아이들도 만나지 못했을 거야."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비로소 여자로서의 삶에 적응을 한 것인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카게야마로서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었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스란히 킨다이치에게도 전해졌다. 킨다이치는 코 안쪽이 시큰거리는 것을 꾹 참고 손을 내밀었다.
"어서 돌아가자. 집에 가야지."
"응."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토비오쨩, 울어? 역시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멈췄던 오이카와가 놀리듯 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마차에 올라타려다가, 다시 내려와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오이카와님."
"응?"
"감사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토비오쨩."
이상하네, 오이카와는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세이코가 마차 문을 열고 마마, 하고 불렀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세이코는 올라탄 카게야마에게 빗을 보여주며 말했다.
"마마. 곧 궁에 돌아가실테니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괜찮다. 꽃놀이를 다녀온 것도 아닌데 머리는 무슨."
그러다가 카게야마는 문득 옆에 놓아둔 창포꽃을 보았다. 쿠니미를 만나기 직전이었다.
".....산발로 들어가면 귀신이라고 쫓아낼지도 모르니까."
세이코는 웃는 얼굴로 카게야마의 옆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인 카게야마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양 손을 뺨에 대었다.
*
단패궁 마마께서 드십니다!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와 자신의 환궁을 알리는 소리가 곳곳에 퍼지는 것을 들었다. 구석구석 퍼진 소리에 궁인들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킨다이치는 궁에 오자마자 죄인들의 일로 바빴다. 그래도 카게야마를 모실 수 있도록 병사들과 세이코를 붙여 단패궁까지 모시게 했다. 기대했던 쿠니미는 보이지 않았다. 맨 발로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대신 그 광경을 단패궁에 돌아가자 볼 수 있었다. 상궁과 궁녀들과 강아지 두 마리가 전부 뛰어나왔다. 특히나 상궁이 얼마나 눈물을 쏟는지 카게야마 또한 같이 울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카게야마가 울먹울먹하자 상궁은 겨우 눈물을 멈췄다. 강아지들이 카게야마의 발밑에서 자신을 봐달라고 꼬리를 쳤다. 그새 훨씬 자란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강아지들을 쓰다듬어주며 상궁에게 물했다. 한 팔엔 여전히 창포꽃을 안은 채였다.
"섭정께선 궁에 계신다고?"
"...예. 계속 알렸는데 궁에서 안 나오신다고..."
"...가봐야겠다."
"예? 조금 쉬시지 않고서요."
카게야마는 아쉬워하는 강아지들을 떼어놓고서 섭정궁으로 뛰듯이 걸었다. 뒤쫓아오던 궁녀들이 마마, 마마, 아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렀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빨리 쿠니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섭정궁을 지키던 시위들도 서둘러 비키게 하고서, 카게야마는 안으로 쿵쿵거리며 들어섰다.
"쿠니미!"
남의 눈을 신경도 쓰지 않고 이름부터 불렀다. 하지만 쿠니미는 보이지 않았다.
"쿠니미!"
카게야마는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이런 느낌을 받았다. 천천히 둘러보던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쓰다가 놓았던 것 같은 글자를 보았다. 아마 처음엔 여름 홍수를 대비해 둑을 쌓아야 한다는 글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밑으로 갈 수록 글자가 흐트러지더니 마지막엔 카게야마, 카게야마影山의 이름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쿠니미."
카게야마는 조용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오래된 병풍이 있었다.
"....."
눈을 감으면 심장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 수록 심장소리가 커졌다. 제발 모른 척 해달라는 걸까, 아니면 제발 알아달라는 걸까. 모르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지금껏 제대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하고싶은대로 하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단단한 병풍에 이마를 살짝 대었다. 작은 떨림이 이마로 전해져왔다.
"쿠니미."
"....."
"거기 있어?"
카게야마, 아주 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거기 있어?"
한참 조용했다가 모르겠어, 라고 쿠니미는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병풍을 쓰다듬었다. 이 손으로 쿠니미를 쏘았었다. 병풍을 걷으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쿠니미가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수백의, 수천의 악몽을 꾸며 카게야마는 버텼다. 그리고 꿈 속의 쿠니미를 구해냈다. 그것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쿠니미를 끌어안고서 카게야마는 펑펑 울었다.
쿠니미, 너와 내가 하나였다면 너도 이렇게 숨지 않았어도 괜찮을 텐데. 카게야마는 왠지 그것이 슬퍼졌다.
"이리 나와."
"....."
"쿠니미."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너 보고 싶었어. 솔직한 말에 병풍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또 한참을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병풍 너머의 쿠니미를 그려보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카게야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카게야마가 천천히 말했다.
"킨다이치한테 다 들었어."
"....!"
"나를 위해서 그럴 수 밖엔 없었던 거지?"
"....."
쿠니미는 어두운 병풍 뒤에서 헐떡였다. 고개를 젓는 움직임이 카게야마에게도 느껴졌다.
"내가 만약 너만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
"나는 한 번도 너를 붙잡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어."
"...."
"그게 순전히 너를 위한 일이었을 것 같아? 나는 킨다이치랑은 달라."
"...."
"도망치게 할 수도 있었고, 어쩌면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을 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결국 너를."
카게야마는 문득 쿠니미와 첫날밤을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저같은 것이 폐하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카게야마를 붙잡은 제 손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놓지 못했다. 카게야마, 쿠니미가 말이 없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 내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너는 나를 미워할까? 겁을 먹은 목소리가 애처로우면서도, 카게야마는 화가 났다.
"빨리 거기서 나와."
"....."
"네가 스스로 들어갔다면 네 손으로 나와. 이 멍청아!"
안 그러면 정말로 미워할거야.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외치며 카게야마는 병풍에서 손을 뗐다. 반동으로 병풍이 흔들거렸다. 카게야마, 다급하게 찾으면서도 쿠니미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쿠니미와 카게야마에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잖아. 이제는 우리 이러지 말자. 카게야마는 문을 두드리듯 병풍에 주먹을 쥐고서 두드렸다.
"쿠니미. 나는 안 도와줄거야."
"하지만 카게야마."
"뭐가 그렇게 무서워?"
"하지만, 카게야마 너는.."
여기서 나가면 날 떠나잖아....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럴게."
"아오바죠사이나, 다른 나라로 가지 않아?"
"안 갈 거야. 내가 왜.."
"나만 두고,서 아오바죠사이로 너는, 갔잖아."
카게야마는 그제야 쿠니미의 말을 알아들었다. 쿠니미는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쿠니미는 다쳐서 앓아눕고 카게야마는 강해지기 위해 아오바죠사이로 일찍 떠났던 그때. 눈을 뜬 쿠니미의 앞에는 카게야마는 없었다. 다리를 줘도 떠난다면 남은 건 이 목숨 밖엔 줄 게 없어. 쿠니미는 울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안 그래."
"....."
"쿠니미. 빨리 나와."
"...카게야마."
병풍 안에 갇힌 쿠니미는 그저 무서웠다.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도 밖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보기 위해서는 병풍 밖으로 나가야했다. 무서워. 카게야마. 나는 너무 무서워. 흐느끼던 쿠니미는 눈물을 닦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으로, 균형을 잃고 흔들렸던 병풍이 앞으로 넘어졌다. 잡으려고 해도 순식간의 일이라, 쿠니미는 벽에 기댄 채 숨을 급히 들이켰다.
"쿠니미."
".....!"
쿠니미는 젖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포꽃을 안은 카게야마가 기적처럼 눈 앞에 있었다. 그리고 카게야마 또한 눈물고인 눈으로 쿠니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일어나. 나는 여기 있어."
홀린 사람처럼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언젠가 카게야마의 꿈속에서처럼,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끌어안고서 큰 소리로 울었다.
*
"이것 봐. 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
한참 울던 쿠니미가 눈물을 그치자 카게야마는 품 속에서 보라색 꽃을 내밀었다. 카게야마의 태몽에 나온 꽃이었고, 또 쿠니미도 카게야마에게 선물해주었던 꽃이었다. 이번에 꽃을 받는 건 쿠니미였다. 다만 쿠니미가 너무 격렬하게 끌어안은 바람에 다 뭉개져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볼품없어진 창포를 보며 카게야마는 투덜거렸다.
"너 때문이야."
원랜 정말 예뻤어. 그렇게 말하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쿠니미는 말했다.
"지금도 예뻐."
"이게?"
"아니. 네가."
쿠니미의 손이 카게야마의 뺨에 닿았다.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가, 곧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입술을 삐죽거려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다시 끌어안았다. 가슴에서 창포꽃 향기가 퍼져 올라왔다. 부드러운 손이 쿠니미의 등을 함께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쿠니미는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보고 싶었어."
간절하게 한 마디를 하면 뭐야. 그 걸 지금에야 말해? 하고 또 한번 불퉁한 대꾸가 돌아왔다. 그래도 손 안에 있는 게 카게야마라고 생각하면 쿠니미는 따뜻한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나른하고 행복한 온기가 병풍 뒤에서 차가워졌던 발부터 머리끝까지 데워진다. 이 온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목에 자신의 얼굴를 묻었다. 기분좋은 따뜻함은 당연하게도 카게야마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 그렇구나. 쿠니미 아키라는 이제야 깨달았다.
"카게야마."
"응."
"나는 뭘 위해 사는 걸까. 널 위해 죽지 못한다면 나는 뭘 해야할까, 라고 생각했었어."
"...."
카게야마의 사랑을 바라던 남자는 감격스럽게 말했다.
"나는 널 위해 살면 돼."
"쿠니미."
"널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꼭 살아야 돼."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왕을 붙잡고 싶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자신의 곁에 잡아두는 것만을 바란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쿠니미 아키라, 나는 얼마나 카게야마의 사랑을 원하고 또 원했던가. 붙잡을 생각만 했지 함께 있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제는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 카게야마와 함께 하는 삶.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은 채 기도하듯 소원을 내뱉었다.
"카게야마. 나는.. 널 따라갈게."
"쿠니미."
"이제는 내가 널 따라갈게."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보면, 카게야마의 파란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췄다. 맑은 눈동자 속에 보이는 저 광경을 영원히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놀란 얼굴을 했다가, 천천히 웃었다. 눈가가 휘어지고 옆에 살짝 주름이 지며 위아래 속눈썹들끼리 만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쿠니미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었다.
"좋아. 천천히 걸을테니 잘 따라와."
카게야마의 허락에 쿠니미는 눈을 꼭 감고 그를 안았다. 답답해, 이제 그만 놔줘, 불평하는 소리는 잠시 무시했다.
"사랑해."
처음으로 쿠니미가 사랑한다고 말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여러번 들었으나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나도. 그 대답이 돌아오는 순간 쿠니미는 진정한 안식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것은 안식이라고밖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상처받은 영혼이 씻겨져내려간다. 울컥하며 고여있던 어두운 감정들이 빛을 받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오직 너만을 사랑하며 너만을 위해 사는 삶.
카게야마.
이제와서 말해도 괜찮을까.
나는 오직 평생 그것만을 바라왔노라고.
쿠니미 아키라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그동안 그가 헤매고 헤맸던 모든 밤이 이제 끝났다.
「생의 구원」
끝
.
.
.
3월 30일. 대장군 킨다이치 유타로, 역적 오사와 타카히로 무리를 토벌
3월 31일. 단패궁 카게야마 꽃놀이 후 환궁
3월 31일. 킨다이치 유타로, 환궁
4월 1일. 히나타 쇼요, 카라스노로 환궁
4월 3일. 오이카와 토오루, 아오바죠사이로 환궁
4월 4일, 쿠로오 테츠로, 네코마로 환궁
4월 7일, 우시지마 와카토시, 시라토리자와로 환궁
.
.
.
10월 20일, 단패궁 카게야마, 남녀 쌍생아 해산
*킨다이치 유타로 장군이 희대의 역적 오사와 타카히로 무리를 토벌하고 돌아온 날, 단패궁의 카게야마 또한 멀리 꽃놀이를 갔다가 돌아왔다고 사서에는 적혀 있었다. 그러나 단패궁이 돌아올 때의 행적이 자세한 것에 비해 나갈 때의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단순한 착오일 거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꽃놀이는 그 당시 치뤄진 의식일 거라고 해석했고, 또 누군가는 같은 날 킨다이치 유타로의 일과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여러가지 의견은 분분했지만 흘러간 시간의 일이기에 정확한 답을 알 수 있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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