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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외전1. 조용한 밤 (작별편)



카게야마는 ‘꽃놀이’ 후 궁에 돌아왔다. 고작해야 꽃놀이니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3월은 카게야마의 나들이를 끝으로 지나갔다. 4월은 이제 떠날 때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은 조용히 흘러갔다. 그리고 4월의 첫째 주 카라스노가 단패궁을 찾아왔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을 붙잡고 한참 놓지 못했다.


“토비오.”

“예.”

“있잖아.”


만약 내가 카라스노의 황제가 되면 나한테 와줄래? 그런 말이 히나타의 입 안에서 계속 굴렀다. 아주 나중이라도 좋으니까, 만약에 나한테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그러나 카게야마가 쿠니미를 선택한 건 그가 황제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좋아하게 된 게, 단지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었듯이.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히나타는 망설였다.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놓지 못하자 츠키시마가 나섰다. 히나타, 이제 가야지. 츠키시마 또한 아쉬웠으나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었다. 히나타는 결국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무척 섭섭한 얼굴로 따라 나왔다가 츠키시마를 보았다. 츠키시마는 아까부터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그를 보다가 아, 하고 잊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츠키시마님.”

“…….”

"이것을."


부름에 뒤를 돌아보자 츠키시마는 카게야마가 내민 물건을 볼 수 있었다. 아마 향을 넣어둔 게 분명한 조그만 주머니엔 만월이 떠올라있었다. 그는 물끄러미 주머니를 쳐다보다가, 받았다. 손끝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히나타님께는 드렸는데 츠키시마님께는 못 드렸네요. 제가 자수를 놓았어요. 별 쓸모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드린 게 없어서.”

“…….”


츠키시마는 주머니를 살펴보다가 자신의 옷 안쪽에 집어넣었다. 오늘 처음으로 카게야마와 시선을 맞춘 남자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려는 사람처럼 입가가 살짝 올라갔지만, 마지막 미소를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다. 대신 츠키시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카게야마.”


그리고 츠키시마는 다시 카게야마를 돌아보지 못했다. 카라스노가 떠났다. 카게야마는 키타가와 궁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그들이 떠나는 걸 지켜보았다. 노을 속에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어도 카게야마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이와쨩, 오이카와가 부르지 않았다면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게 벗어나지 않을 기세였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애정이 뚝뚝 넘쳐흐르는 이 얼굴을 이제 또 보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카라스노가 떠났으니 다른 나라들도 눌러 앉아 있기는 힘들었다. 아오바죠사이에서 후계를 보진 못했어도 다행히 키타가와 내부에서 문제가 해결됐다. 아오바죠사이에서는 그것으로 만족했고, 귀한 황자인 오이카와가 더 이상 타국에 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토비오쨩. 이와쨩 좀 말려볼래? 오이카와씨는 오늘 아오바죠사이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떠나기로 한 날 임에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곁에 있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들으란 듯이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불평을 이와이즈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그는 카게야마에게 몇 번이나 확인하기 바빴다.


“카게야마. 내가 그날 밤 이야기 한 거 기억나지?”

“당연하죠. 이와이즈미님.”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꼭 알려야한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 우울해하던 카게야마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카게야마가 아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하나하나 일러주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이었다. 카게야마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은 이와이즈미도 머쓱해 뒷머리를 긁었다.


“몇 달이나 같이 있었는데 떠나려니 아쉽네.”

“저도요.”

“다신 못 볼 사람처럼 자꾸 둘이 그럴래?”


오이카와가 또 짜증을 냈다.


“토비오쨩 놀리고 싶으면 오이카와씨는 곧바로 키타가와로 올 거야.”

“오이카와.”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잘생긴 얼굴을 한껏 구겼다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이와이즈미를 잡은 카게야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눈치 챈 오이카와는 심술궂은 눈으로 카게야마의 머리를 헝클었다.


“오이카와님!”

“토비오쨩 바보. 이 얼굴 좀 봐. 못생겨가지고!” 


볼을 쭉 늘어트리는 오이카와의 손 때문에, 카게야마는 아까부터 터지려던 눈물을 숨길 수 있었다. 카게야마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파요. 아프다니까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울리고 나서야 손을 뗐다. 그는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이상한 얼굴이었다. 할 말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가 곧 굳게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게 눈짓했다. 이와이즈미 역시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안 울어요. 오이카와님 때문에 아프니까….”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와이즈미는 젖은 눈가를 아프지 않게 문질러주며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그래도 울지 마.”


결국 밤늦게 아오바죠사이는 떠났다. 볼이 아프다며 카게야마가 계속 우는 바람에, 아오바죠사이가 떠난 다음 날 카게야마의 눈은 잔뜩 부어 있었다.



*



언젠가 갈 사람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와 한꺼번에 헤어질 거라곤 알지 못했다. 카라스노와 아오바죠사이가 떠나자 카게야마는 심하게 우울해했다. 킨다이치가 곁에서 위로해주어도 그는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쿠니미는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와 마음을 확인했지만, 카게야마가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럴 수밖엔 없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쿠니미는 간신히 손에 잡은 카게야마를,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섭정 쿠니미 아키라는 네코마 역시 떠나겠다는 연락을 받고 내심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이제는 필요 없게 된 이 남자들이 키타가와를 떠나는 건 좋았다. 카게야마는 특히 이 네코마인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슬퍼할 걸 생각하면 역시 기분이 상했다. 말이 없어진 쿠니미를 보며 쿠로오는 피식 웃었다.


“처음엔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더니, 이젠 대놓고 경계를 하네.”

“…불쾌하셨다면.”

“아니, 우리야 뭐… 상관없으니까.”


이젠 정말로 상관없는 사이가 될 것이다. 쿠로오는 카게야마가 무사히 온 첫 날, 정원을 걷다가 우연히 카게야마를 보았다. 쿠니미 또한 함께 있었다.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달라붙은 둘은 쿠로오가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늦게야 궁인이 먼저 인사를 하여 둘도 뒤늦게 알았다. 카게야마의 눈동자엔 반가움이 떠올랐으나 쿠니미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방해했네? 라고 말하면서도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곁에서 그를 얼마나 걱정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마마님 여기 있으면 위험하니까 말이야. 네코마로 데려갈 생각까지 했어”

“쿠로오님도 참.”


카게야마는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쿠니미만이 웃지 않았다. 뒤늦게 쿠로오를 찾아온 코즈메까지 함께 했다. 카게야마는 그날 쿠로오와 코즈메에게 직접 자수를 놓은 주머니들을 주었다. 다른 궁에도 보냈다고 하지만 쿠로오는 자신만을 위해 수놓아준 주머니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의 것엔 날렵한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코즈메에겐 산쇼쿠같은 삼색 고양이었다. 귀여운 주머니였다. 그리고 주머니를 쑥스럽게 내미는 카게야마의 표정은 무엇보다도 귀여웠다. 코앞에서 주머니들을 받을 때 이 섭정의 표정이 어땠더라, 평소엔 어른스럽게만 보이던 남자의 얼굴은 마구 흐트러져있어 조금 웃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날 쿠로오는 보았다. 그는 쿠니미에게 입을 열었다.


“…마마님한테는 따로 인사는 없어도 될 것 같아.”

“…….”

“아쉽지만 말이야.”


울적한 기분의 쿠니미를 알아차린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돌아보곤 손을 잡아주었다. 그와 동시에 쿠니미란 남자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그 신기한 광경을 쿠로오와 코즈메 모두 보았다. 쿠로오는 평소처럼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눈동자는 섭정궁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단패궁이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쿠로오는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마마님의 잠을 깨우면 큰일이지.”


그렇게 말한 네코마는 아침 일찍, 키타가와를 떠났다. 코즈메가 쿠로오를 보며 물었다.


“…쿠로. 정말 얼굴을 보고 가지 않아도 괜찮겠어?”

“아니. 안 괜찮아. 정말 안 괜찮아. 켄마.”

“그러면 왜.”

“내가 네코마로 훔쳐가 버리면 마마님이 곤란해지잖아.”


분명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쿠로오는 참지 못할 것이다. 그럴 게 분명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어떻게든 데리고 가버릴 것이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코즈메 켄마는 쿠로오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엔 카게야마가 만들어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주머니를 만져보던 코즈메가 쿠로오의 등을 두드렸다.


“가서 편지하자. 나중에 놀러 오라고.”

“…좋아. 켄마. 얼른 가서 마마님께 준 궁을 깨끗이 치워놓자고.”


점심이 되고 나서야 카게야마에게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게야마는 훌쩍 떠나는 게 쿠로오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네코가 카게야마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낑낑거리며 무릎 사이로 들어왔다. 억지로 들어온 강아지가 눈물을 핥아주자 카게야마는 결국 네코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



우시지마는 카라스노를 보냈고, 아오바죠사이를 보냈다. 그리고 네코마 또한 떠났음에도 키타가와에 남았다. 그의 재상은 우시지마에게 재촉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미 오래전 우시지마의 할 일은 다 끝났다. 카게야마를 치료해주었고, 우시지마가 원하는 대로 카게야마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만족스러운 이별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는 카게야마를 사랑함에 있어 모자람이 없었다. 그렇게 사랑한 존재를 놔두고 갈 생각을 하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네코마가 떠난 날 카게야마는 동궁을 찾아왔다. 눈물을 흘린 자국이 그대로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손이라도 뻗어 볼까하다가, 우시지마는 그 손을 거두었다. 카게야마는 코를 훌쩍거리며 우시지마에게 언제 환궁하는 지를 물었다. 말없이 옆에 서있던 시라부가 동요하는 것도 충분히 우시지마에게 느껴졌다. 


“내가 빨리 갔으면 좋겠느냐.”


답을 알면서도 웃으며 물어본 이유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젓는 얼굴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시지마의 예상대로 카게야마는 코끝이 빨개진 채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


“가시기 전엔 꼭 알려주세요.”

“나를 따라오지도 않을 거면서 끝까지 귀여운 말만 하는군.”

“…그렇지만!”

"울지 마라. 계속 웃지 않으면 시라토리자와로 데리고 갈 것이다."


시라토리자와가 무슨 감옥이라도 됩니까. 폐하. 시라부가 결국 한마디를 했다. 카게야마가 어째서 제게 와서 이러는 줄 아는 우시지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코마가 떠나서 섭섭한가보군.”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지만 네 밤은 이제 가질 수 없으니 떠나는 게 옳지…. 네코마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말을 이해했다. 사실 우시지마의 말을 듣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아쉬움이 남은 걸 안 우시지마는 제법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계속 그렇게 굴면 시라토리자와로 데려가야겠구나.”


“우시지마님”

“쓸쓸해할 것 없다. 궁이 비면 너도 곧 익숙해질 테니.”


냉정히 말했어도, 카게야마가 자신이 떠난 궁을 쓸쓸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칼을 꽂은 기분이었다. 우시지마는 입을 다물었다.


“…….”


카게야마 또한 우시지마의 말에 조용해졌다. 받은 걸 전부 다 보답할 수 없었다. 떠나는 길 무사하시라고 배웅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네코마는 심지어 아침 일찍 떠나버렸다. 이 서운한 마음은 이기적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왔다. 또한 자신을 위해 조용히 떠났다. 그런 사람들에게 서운해 하는 마음이 이기적임을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종종 슬퍼지곤 했다. 카게야마는 배를 쓰다듬어보았다. 문득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배를 만져보면 기분이 괜찮아졌다.


“…익숙해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카게야마는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도 돌아가시게 된다면, 매일 우시지마님과 다른 분들을 위해 기도할게요.”

“…네 기도를 받으면 오래 살겠군.”


우시지마의 농담에 카게야마가 조금 웃었다. 카게야마가 돌아가고 난 후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시라부가 무슨 뜻으로 쳐다보는 지 알 것 같았다. 


“이제 가야겠지.”


황제는 대답을 바라지 않고 혼잣말을 했다.


“카게야마에게 저런 말을 했으니.”

“…폐하.”

“가지 않으면 미련이 남았다고 말하는 꼴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정말로 미련이 안 남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소매 속에서 반지를 꺼냈다. 카게야마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던 반지는 몇 달 째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들여다보던 반지를 다시 손바닥 안에 쥐었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덜 카게야마를 사랑했다고 한다면 당장 시라토리자와로 카게야마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연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시지마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자신의 사랑보다 카게야마의 사랑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까. 아주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눈물짓는 카게야마를 억지로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시지마는 그렇게 우는 카게야마를 상상하는 것조차 가슴이 아팠다.


“..섭정에게 전해라.”

“폐하.”

“가야겠다. 내일이라도.”

“…….”

“아니. 모레.”


아니다. 조금만 더... 그는 말하다가 눈을 감아버렸다. 황제는 몹시 지친 얼굴이었다.




시라토리자와는 조용히 떠나길 원했다. 다른 이들이야 성국의 태자들이었어도, 우시지마는 황제였다. 섭정은 카게야마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겠다고 했으나 동궁에선 그것을 거절했다. 카게야마가 임신한 몸으로 계속 동궁에 오려고 하는 바람에 우시지마는 직접 카게야마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떠날 날을 미리 알고 있으니 대화는 우울한 분위기로 흐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던 일부터 거슬러 올라가 말하다보면 어느 순간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다시 마음이 통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곧 우시지마가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우시지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키타가와에서 보내는 저녁엔 카게야마와 쿠니미가 함께했다. 그동안 질투가 심했으리라고 생각한 섭정의 얼굴은 의외로 멀쩡했다. 은근히 쿠니미를 신경 쓰던 우시지마는 문득, 쿠니미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의 눈빛을 보았다. 이거 맛있다, 라고 옆자리에 앉은 쿠니미에게 속닥거리는 카게야마의 눈은 자신과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달랐다.


호감과 우정, 친밀함보다 좀 더 높은 애정. 그리고 쿠니미 또한 그 애정에 화답하듯 카게야마를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천천히 깨달았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다.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식사가 끝난 후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에게 잠시 궁 앞을 걷자고 말했다. 쿠니미의 표정이 순간 굳었으나,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말없이 배웅했다.


“밤길이 어두우니 조심해서 걸으십시오.”


그래도 마지막의 한마디를 잊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기에 우시지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빨리 오겠다.”

“폐하. 제가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시라부가 은근슬쩍 우시지마의 편을 들었다.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란 뜻이 분명했다. 우시지마는 대답 대신 슬쩍 웃곤 궁녀를 앞세워 걸었다. 불을 든 궁녀의 뒤로 카게야마와 우시지마의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얽혔다. 카게야마가 천천히 말했다.


“밤이라도 날씨가 따뜻해서 좋아요.”

“내일도 비는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다행이군.”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은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간접적으로 이별을 말하는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조용해졌다.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궁녀의 손에 들린 등불 또한 살짝 흔들렸다. 하늘엔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착각이 들만큼 빼곡한 별들이 머리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걸음을 걸을 때마다 풍기는 싱그러운 풀냄새. 그리고 곁에는 카게야마가 함께 걸으며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우시지마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 같은 설렘을 느꼈다.


“…우시지마님?”


우시지마의 발이 멈추자 카게야마도 자연스럽게 따라 걸음을 멈췄다. 궁녀는 조용히 물러서 둘의 길을 밝혔다. 우시지마는 한참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꺼냈다.


“카게야마. 손을 내밀어 보거라.”


카게야마가 순순히 손을 내밀자 우시지마는 그 손바닥 위에 반지를 올려두었다. 장식이 없는 투박한 은반지였으나, 길이 들어 윤이 나는 보물이라는 걸 카게야마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또한 언젠가 카게야마가 동궁에서 보았던 반지이기도 했다. 우시지마님? 카게야마는 반지를 쳐다보다가 다시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우시지마는 씩 웃었다.


“마음에 드느냐.”

“귀한 물건 같습니다.”

“네게 주려고 가져온 것이다.”


그는 황후에게 주는 반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가기 전 키타가와의 땅에 묻어버릴 생각도 했으나 결국은 주인에게 주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우시지마는 일부러 편히 말했다.


“네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이렇게 귀한 반지를 어떻게 제 마음대로 하겠어요.”

“마음에 들면 끼고, 아니면 네 딸에게 물려줘도 좋겠지.”


우시지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남녀 쌍둥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를 닮을 왕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겠군.”


오늘밤이 지나면 시라토리자와의 황제 우시지마는 떠난다. 그러나 마음은 이곳에 남아 키타가와의, 카게야마의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우시지마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한 카게야마는 소중히 반지를 품속에 넣었다. 조금만 덜 사랑했다면 좋았을까? 우시지마는 달빛에 빛이 나는 카게야마의 까만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덜 사랑하였더라고 해도, 분명 우시지마는 나중에라도 카게야마에게 또다시 푹 빠져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마음도 있구나…. 우시지마는 이런 사랑을 알려준 카게야마가 견딜 수 없이 한 번 더 좋아졌다.


“…정말 따뜻한 밤이로다.”


우시지마는 중얼거렸다. 반지를 내려놓자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동궁에 돌아온 카게야마는 준비된 차를 마시고 쿠니미와 함께 떠났다.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

“왜 그러느냐.”

“…시라토리자와에 가면 다시 반지를 주문해놓겠습니다.”

“…너는 못 속이겠군.”


우시지마는 시라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 같은 물건은 필요 없으니 네가 알아서 하거라.”

“알겠습니다.”

“…오늘 밤이 유독 짧군.”


허전한 소매 속으로 손을 넣으면 늘 가지고 다녔던 반지가 없었다. 없는 것을 알아도 아마 한동안 속 안의 반지를 찾을 것 같았다. 시라부가 우시지마에게 말했다.


“푹 주무십시오. 폐하. 시라토리자와로 돌아가시면 하실 일이 많습니다.”

“벌써 겁을 주는 거냐.”

“몇 달 동안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폐하께서 아셔야합니다.”


시라부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우시지마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무척 따뜻하고, 짧은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시지마는 인사를 한 후 말 위에 올라탔다. 시라토리자와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키타가와를 떠났다. 카게야마는 그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부른 배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또 그 아이들이 자라서 말을 하고 걸을 때까지, 한동안 키타가와 궁은 조용할 것이었다.




소장본에 포함되는 외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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