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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70. 3월 1일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으레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달거리가 없었다. 배의 통증 또한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상궁은 한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얼굴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는 이렇게 일정한 적이 없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늦었지."

"이 궁에 들어오셔서는 쭉 같은 날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상궁은 의원을 불러야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분명 회임을 하신 겁니다. 요새 잘 주무시고, 발도 부으셨지요.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해주어도 카게야마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배를 만져보았다. 임신을 한 여자들은 배가 튀어나온다고 들었다. 만약 회임이 맞다면 자신도 그렇게..? 왠지 무서워져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부르지 마라."

"예?"

"괜히 소란피우고 싶지 않다. 좀 더 기다리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상궁의 말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썼다.


"시끄럽구나."

"..마마. 만약 회임이 맞다면 이것은 경사입니다. 어서.."

"...."



홀 : 그러면 

짝 : 싫어



카게야마는 상궁의 재촉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불러보거라."

"예!"


상궁은 궁녀를 시키지도 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이. 키타가와의 왕이 될 아이. 카게야마는 밋밋한 배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정말로 내가 아이를 임신한 걸까? 그럼 아이는 어디로 나오는 거지? 여러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칠 때 쯤 상궁은 당황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마마. 의원이 궁에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어째서?"

"...오사와 대신이 몸져 누워 섭정께서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음.."


다들 모레 온다고 하니 그때 부르겠습니다. 상궁은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마마께서 회임을 하시면 할 일이 많습니다. 선왕들의 위패에 인사도 올리고, 아기님을 위해 공부도 하셔야지요."


흥복을 밀며 직접 아기옷도 만드셔야합니다. 상궁은 카게야마의 아침 시중을 들며 강조하듯 말했다. 뭐 하나 제대로 만들어본 적이 없던 카게야마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임신하면 뭐 하나 좋은 일이 없구나."

"마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상궁은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아기님이 들으십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그래도, 안 됩니다."


마지못해 카게야마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이 껄끄러웠다. 상궁은 카게야마가 아침을 먹는 걸 지켜본 후 물었다.


"지금 다른 궁들께선 달거리 중이라고 아실 텐데, 문안 인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유일하게 마음대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월 1일 카게야마의 꾀병은 어느 정도인가요

주사위로 정합니다 : 100


30 이하 : 일단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60 이하 : ..아침인사는 빼고 싶어

90 이하 : 마마. 혹시 모르니 그저 궁에 계셔요

99 이하 : 밖에 몰래 나가볼까



주사위 100에 대한 선택지를 다시 정합니다 


홀 : 밖에 나가본다 (다른 이와 우연히 만난다) 

짝 : 안에 있고싶다 (궁 안의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다)



배가 부풀어오르면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았다. 궁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고 상궁이 어깨를 움찔했다.


"오늘 배가 몹시 아프다고 하고.."

"예.."

"잠시 밖을 나가보고 싶구나."

"....마마."


안 될 말씀입니다! 상궁이 말했다. 그러나 이미 카게야마의 마음은 정해져있었다.


"네가 하루 종일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으냐."

"....마마. 이렇게 빕니다. 제발 얌전히 계셔주십시오. 귀한 몸이 상하시면 어떡합니까."

"섭정궁에 몰래 말해서 호위를 달라고 해보거라."

"마마.."


섭정궁이, 카게야마가 마음만 먹으면 이 궁을 금방 나갈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당당하게 요구하자 상궁도 결국 한숨을 쉬었다.


"...마마 덕에 제 주름살 좀 보십시오."

"아직 반들반들 계란같으니 걱정할 것 없다."


카게야마는 자리에 기대어 깔깔 웃었다. 


*


섭정궁에선 서신과 함께 호위가 왔다. 


[가마와 호위 셋을 보내드립니다. 부디 몸을 소홀히 하지마시는 것 하나만을 간절히 바랍니다]


카게야마는 들떠 단패궁 앞에 선 가마를 훑어보았다. 그러고보면 가마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리지 않은 가마는, 얼핏 보기엔 수수해보였지만 견고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말을 타고 가면 되지 않나? 카게야마의 중얼거림에 상궁은 그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마마..회임하셨을 지도 모르는 몸을 밖으로 보내는 것도 제가 심장이 철렁한데, 말이라니요."

"회임일 리 없다."

"그렇게 단언하셔도.."


상궁은 근심어린 얼굴로 카게야마를 보았다가 다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마마를 말리지 못한 제 죄가 큽니다. 분명 크게 한 번 경을 칠 것입니다."

"회초리를 맞는다면 대신 맞아주마."

"마마!"


카게야마는 상궁의 걱정을 뒤로 한 채 가마에 올라탔다. 처음에 둥실 떠오를 땐 흔들려 균형을 잡을 수 없었지만, 점차 적응하니 괜찮았다. 늦은 아침, 조그만 가마 하나가 키타가와의 궁을 빠져나왔다. 


*


수도에 내려온 카게야마는 미리 준비했던 평복을 입었다. 남장을 하고 왔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3월, 한창 모종을 준비하고 농사를 시작하느라 바쁠 텐데도 마을에는 사람이 붐볐다. 카게야마를 따라 평복을 입은 호위들은 저번에 카게야마가 도망쳤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티가 나게 졸졸 뒤를 쫓아다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테니 너희는 좀 떨어져 걷거라. 도망가지 않는다."


결국 인적 드문 곳으로 와 투덜거리면 호위들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안 그러면 또 사라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카게야마의 실력을 알고 있는 호위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제법 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소란 피우고 싶진 않으니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진 나오지 말거라."


예, 하는 대답이 늦었다. 카게야마가 인상을 찌푸리면 호위들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시야에서 호위를 떼어놓은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마을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다가 맛있어보이는 과자가 있어 사먹어보기도 했다. 달짝지근한 물엿이 입천장에 달라붙었지만 카게야마는 열심히 과자를 먹었다. 



홀 : 홍등가 

짝 : 마을 외곽



저기로 가시면, 안 되는데, 뒤에서 그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그 수근거림을 무시한 채 붉은 등이 잔뜩 깔린 거리로 들어섰다. 아직 낮이었다. 그런데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을 지나쳐 둘러보면 붉은 등을 걸어놓은 집의 창으로 예쁘장한 여자가 보였다. 카게야마를 보고는 생긋 웃는다. 예쁜 여자였다. 희게 칠한 피부와 어깨를 드러낸 옷을 보고, 카게야마는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옅은 푸른 색의 옷은 꽃자수가 조금 박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었다. 


"저런 옷은 생활하기 불편할 텐데."


카게야마는 중얼거리고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나 홍등을 걸어놓은 가게였다. 미리 앉아있던 남자들이 수군거리며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홀 : 같이  

짝 : 밥



"같이 앉을까?"


가게에 앉은 김에 점심은 무엇을 먹을 지 고민하던 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들의 이름을 살펴보던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었다. 술에 취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필ㅇ...괜찮습니다."


필요없다, 라고 명령하려던 카게야마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호위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다시 무엇을 시킬 지 고민하는 카게야마를 두고 남자들이 피식 웃었다.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카게야마를 둘러싸듯 앉았다. 풍기는 술냄새에 카게야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다니. 섭섭하게."

"어차피 혼자 이런 곳에 왔다면, 일하고 싶어서 온 거겠지?"

"봄에는 유녀들이 많이 나오니까.."


곁에 앉은 남자 한 명이 카게야마의 짧은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어리둥절한 수작들이었다. 카게야마가 멍한 얼굴을 한 것도 모른 채 남자들이 킬킬거렸다.


"머리카락도 팔아버렸구나. 불쌍해라."

"예..?"

"잘만 하면 돈을 줄게."

"...?"



홀 : ..? 돈? 

짝 : 괜찮다니까 



"...? 돈?"


카게야마의 중얼거림에 남자들은 크게 웃었다.


"그래. 어차피 궁에는 돈도 안 받고 몸을 파는 창기가 있는데, 돈 받고 파는 게 무슨 대수야."


잘해줄 테니까 어서 우리와 가자, 라는 뒤이은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돈도 안 받고 몸을 파는 창기라니, 그게 누굴 말하는 거지?"

"그야 위왕을 말하는 게 아니면 누구겠어."

"....."

"그 비싼 아랫도리에는 금테를 둘렀는지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놓고도..."


카게야마는 남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인상이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흔한 생각일 것이었다. 카게야마가 말이 없자 허락으로 알았는지 남자 한 명이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퍼뜩 놀란 카게야마는 손을 잡아 뺐다. 호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 손 놓거라!"

"놓거라? 이 년 말하는 것 좀 봐."


비웃음이 계속 되었다. 카게야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기로 쓸만한 것은 가져오지 않았다.



1~2 : 시라토리자와

3~4 : 아오바죠사이

5~6 : 네코마

7~9 : 카라스노 

0 :



"잠시만."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머리카락, 눈물점이 인상적인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유약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상당한 위압감이었다. 남자는 다가와 공손히 인사하고 말했다.


"그 분이 불편해하시지 않습니까."

"넌 뭐야! 갑자기 끼어들어서는..!"

"그렇지요?"


남자는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웃고 있지만 서늘한 표정이 마치 얼음같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남자는 카게야마를 놓지 않는 이들을 간단하게 뿌리쳤다. 어, 어? 급소라도 눌린 것처럼 남자들이 뒤로 물러섰다.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드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무슨..!"


남자는 다시 달려들려는 패거리들을 피해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어?"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면, 카게야마는 이미 그 홍등가에서 나와 있었다. 순간 하늘을 날았던 것 같은 부유감. 놀라서 쳐다보면 남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카게야마에게 남자는 부드럽게 물었다. 


"히나타 전하께선 잘 지내고 계신가요?"


카라스노. 카게야마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3월 1일, 주사위 100을 잡고, 궁 밖을 나가게 되어 다른 나라에서 온 한 명과 카게야마가 마주쳤습니다. 공략 대상은 아닙니다.



카라스노의 스가와라 코시입니다. 스가와라는 연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카게야마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자 다른 뜻으로 알았는지, 스가와라는 서둘러 자신의 인장을 꺼냈다. 카라스노의 문양이었다. 능력을 썼으니 아마 왕족, 일 것이다. 


"카라스노.."

"예. 카라스노입니다. 단패궁 마마."

"어떻게, 나를?"


카게야마가 묻자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 때부터 호위를 잔뜩 거느리고 오셨고, 입은 옷은 어색해보이시더군요."

"...."

"귀한 분이시구나 싶어 신경이 쓰였는데.."


스가와라가 말없이 웃었다. 카게야마는 방금 전 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돈도 받지 않고 몸을 파는 창기라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물었으니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몰랐을 리 없었다. 키타가와에 남은 왕족은 오직 한 명이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스가와라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런 말은 신경 쓰실 것이 못 됩니다."

"....."

"단패궁 마마."

".. 성국의 분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카게야마는 사과했다. 스가와라는 아닙니다, 하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보니..카게야마는 물었다.



홀 : 말을 편하게 

짝 : 왜 이 곳에



카라스노의 왕족이라면 자신에게 존대를 쓸 필요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단패궁 마마라고 자신을 부르는 스가와라를 조금 신기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저는 키타가와의 단패궁이 맞으나, 스가와라님께서 말을 높일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아니요."


스가와라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카라스노의 왕자 자리를 내어놓고 떠도는 사람입니다. 한 나라의 왕족에게 말을 높이는 건 당연합니다."

"왕자 자리를..?"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카게야마는 카라스노에서 왔다는, 재색 머리의 남자를 구석 구석 살폈다. 자신보다 훨씬 하얀 피부였다. 카라스노의 남자들은 추운 곳에서 살아서 이렇게 하얗게 질려있는 걸까? 히나타도 츠키시마도, 스가와라까지 모두 하얀 얼굴이었다.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스가와라는 생긋 웃었다. 


"우선 호위분들이 걱정하실 테니 다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귀에 급한 걸음걸이가 들리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가, 그렇습니까, 하고 끄덕였다. 



홀 : 황자 자리라는 건 

짝 : 여긴 어떻게



호위들은 곧 카게야마를 찾아내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스가와라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호위들에게 카게야마는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카라스노의 왕족(출신)이라고 말하면 호위들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물러갔다. 조용히 방을 잡아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안다며 스가와라는 앞장 서서 걸었다. 마치 키타가와를 카게야마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키타가와에는 언제 오셨나요?"

"말을 낮추십시오. 마마."


자리에 앉은 스가와라는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서늘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남자가 하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결국 어색하게 말을 놓았다.


"언제 오셔..왔지?"

"며칠 되었습니다. 츠키시마 ㅈ..츠키시마님이 부탁한 것이 있어서요."


살짝 멈칫한 스가와라의 말 속엔 역시 궁금한 게 있었다. 카게야마는 차를 마시며 물었다.


"카라스노의 황자 자리라는 건 내어놓을 수 있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스가와라, 는 후계자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어?"

"..아시는군요. 물론 저 역시 욕심이 났으나."


스가와라는 찻잔을 자리에 놓았다. 


"히나타 전하가 능력을 발현한 순간,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 왕이라는 걸."


죽고 싶진 않았거든요. 스가와라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어디까지 물어야 좋을 지 몰랐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들려주는 카라스노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했다. 혹독한 겨울의 나라. 살기 위해 악착같은 이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위에 올라서는 황제 또한 가장 강해야했다. 


"그러니 저희는 황제를 존경합니다. 우선 황제가 되면, 카라스노의 가장 깊은 궁에서 나라를 다스리게 되지요."


스가와라는 말하다 말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입가에 묻으셨군요."

"아,"


벌린 입을 닦아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다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마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실은 궁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쉽게 뵐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카게야마는 고민했다



홀 : 히나타

짝 : 츠키시마



이상하게도 먼저 떠오른 건 늘 웃는 얼굴의 히나타가 아니라, 어제 자신에게 화를 냈던 츠키시마였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츠키시마님은.."

"예."

"츠키시마님은, 매번 내게 화를 내시는 것 같군."

"..츠키시마님께서 조금 무뚝뚝하신 면이 있으시지요."


스가와라는 그를 옹호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탓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츠키시마님께선 늘 내게 불만이 많으시지."

"츠키시마님께서 무척 마마를 서운하게 하셨나봅니다."



홀 : ....

짝 : 그런 게



눈앞의 남자는 처음 보는데도 말을 하기 쉬웠다. 츠키시마와는 딴 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듯 털어놓았다.


"그런 게 아니라..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마마께서 츠키시마님께 실례를 했단 뜻으로 들립니다."

"그런 것도 아니고..!"


황급히 고개를 젓는 카게야마를 보며 스가와라는 쿡쿡 웃었다.


"츠키시마님이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좀 차갑긴 하지만, 본성이 나쁘진 않습니다."

"....."

"히나타님의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는데 츠키시마님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시다니.."


스가와라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카게야마를 보며 떴다. 


"이거 참, 재밌군요."

"무엇이..?"

"츠키시마님이 바라던 일과는 반대로 되신 것 같습니다."


카게야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스가와라를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찻잔으로 입을 가리며 슬며시 웃었다. 잠시 만났는데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덕에 츠키시마는 무척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스가와라는 품 안의 물건을 떠올렸다.



홀 : 내일도

짝 : 이것을



카라스노에 잠시 들렸다고 서신을 보내면, 츠키시마에게 답이 돌아왔다. 어떤 약초를 구해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조금 장난을 치고 싶었다. 홍등가의 거리에서 은밀히 구한 물건을 카게야마에게 내밀자 카게야마는 그 꾸러미를 보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츠키시마님께 부탁하신 약초입니다."

"약초? 어디 아픈가보지?"

"송구스러우나 이것을 츠키시마님께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신분으로는 궁에 들어가 얼굴을 뵙기 힘듭니다. 스가와라의 부탁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품에 넣자 스가와라는 부드럽게 물었다.


"제가 무엇을 부탁하시는 줄도 모르고 넣으시는 군요."

"내게 당당히 부탁할 정도면 내게 해가 되는 물건도, 츠키시마님께 해가 되는 물건도 아니겠지."


스가와라는 그 답에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여인의 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의원이 있는 곳이 어디일 것 같습니까."

"....여인의 몸? 여자가 많은 곳이겠지."

"어느 나라라도, 가장 여인들이 많은 곳은 마마가 방금 가셨던 홍등가입니다."

"홍등가.."


여인들이 몸을 파는 곳을 말합니다. 스가와라의 설명에 카게야마는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랑곳않고 스가와라는 말을 이었다. 


"츠키시마님께선 그 홍등가에서 제게 좋은 약재를 구해달라고 하시더군요."

"...?"

"여인의 몸을 잘 아는 의원에게 아마도, 보신할 좋은 약을 구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잠시 후 카게야마는 물었다.


"츠키시마님은 여인들이 먹는 약이 잘 받으시나보지?"


스가와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카게야마는 다시 가마에 올랐다. 마마, 잘 부탁드립니다. 스가와라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한 번은 청하여 궁에 들어갈 테니 그 때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럼."


가마의 발이 내려졌다. 카게야마는 흔들거리는 가마 속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1~3 : 북궁

4~6 : 단패궁 

7~9 : 후원

0 :



카게야마가 조는 모습을 보고 피곤하다고 판단한 호위들은, 서둘러 카게야마를 궁으로 모셔왔다. 눈을 뜨니 침상 위였다. 카게야마는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저녁이었다. 창 밖으로 어둡게 깔리기 시작하는 밤을 보며 카게야마는 자신이 보고 온 홍등가를 떠올렸다. 지금 그곳은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카게야마가 쥐었던 단패의 색처럼.


"돈도 안 받고 몸을 파는 창기.."


혼자 중얼거린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상궁이, 마마?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다고 카라스노의 친절한 남자는 말해주었다. 하지만 잊기 힘들 것 같았다.



1~3 : 밤산책을 했다

4~6 : 침상에 누웠다 

7~9 : 손님이 왔다

0 :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는 오늘 처음으로 네코를 안으며 기뻐했다. 


"그래, 너를 두고 내가 혼자 나갔구나."


왕왕, 기분 탓인지 왠지 강아지가 짖는 소리는 서럽게 들리기도 했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지만 너를 데려갈 순 없지 않느냐. 잃어버리면 어떡해.. 카게야마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곧 무릎 위에 발라당 누워 배를 보였다. 헥헥거리는 강아지를 귀여워하던 카게야마는 크게 하품을 했다.


"...밖에 다녀와서 그런지 피곤하군."

"마마. 어서 침소에 드십시오."


상궁이 재촉했다. 카게야마가 없는 동안 새단장을 했는 지 침상은 말끔했다. 카게야마는 문득 생각나 침상 옆에 둔 그림을 만졌다. 다행히 이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네코를 안은 채로 침상에 오른 카게야마는 한참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깨어 네코를 만져주길 반복했다.


"마마...편히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상궁은 혀를 차며 카게야마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주무셔야하니 이 짐승은 놓으십시오."

"같이 잘 것이다."

"아휴. 마마.."


카게야마의 고집에 상궁은 결국 네코와 카게야마를 두고 방을 나갔다.


"너랑 나랑 같이 자야하는데, 참 속도 모르는 구나."


가슴 위에 올려두고 말을 걸면 강아지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뺨을 할짝였다.



3월 1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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