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Q/카게른/폐왕의 밤

84. 3월 15일



아버지. 저는,


도망가지 않았어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끝까지 숨기지는 못했으나, 저는.


매일밤 여자가 되어 사내들에게 안겼고, 이제는 그것이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방법 밖엔 없었어요.  


‏부족한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께 한 번도 자랑이 된 적은 없지만 


저는 이 아이를 낳아서.. 


제 이름이 지워진 그 자리에 아이의 이름을 반드시...

그렇지만.. 그래도. 



왜.




"폐하, 폐.."


카게야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가 주르륵 흘렀다. 카게야마를 깨우러 온 상궁이 놀라 그를 깨웠다.


"마마. 마마."

"ㅅ..하지 마.."

"마마..!"


카게야마는 울음소리를 냈다.


"왜.. 왜 아키라를.."


*


꿈 속의 아버지는 항상 카게야마를 질책하고 있었다. 제대로 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카게야마는 선왕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여자로 태어난 운명을 걱정했거나 미워했거나, 결국 둘 다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카게야마의 잘못이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상궁은 카게야마의 눈가를 닦았다. 눈물을 한참 그치지 못한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다."

"...."


무슨 나쁜 꿈을 꾸었냐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궁은 눈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자리에 도로 누웠다. 누워만 있었을 뿐인데 몸은 산을 오르내린 사람처럼 땀으로 젖어 있었다. 상궁을 올려다보자, 그녀는 수심이 깊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마. 의원을 부를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오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마의 옥체가 염려됩니다."

"배는 아프지 않아. 괜찮다."


배를 문지르는 손이 창백했다. 상궁은 무어라고 다시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카게야마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시 나가볼까."


*


아침을 가볍게 먹은 카게야마는 궁녀들을 이끌고 단패궁을 나왔다. 어디를 가시겠냐는 궁녀들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이 갔다. 그래서 도착한 곳을 보면 서궁이었다.


"단패궁 마마. 오이카와님께 알리겠습니다."


문을 지키던 시위가 카게야마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카게야마?"


언제나 카게야마에겐 안심이 되는 목소리였다. 황급히 돌아보면 검을 든 이와이즈미가 서 있었다. 안색이 어두웠던 카게야마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이와이즈미님!"

"카게야마. 어쩐 일이야."


들어올래? 라고 물으려던 이와이즈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위태롭던 몸이 그 안으로 넘어지듯 안긴다. 카게야마를 꽉 끌어안은 채 이와이즈미는 등을 쓸어주었다.


"무슨 일 있어?"

"..이와이즈미님."


궁녀들이 이와이즈미의 손짓에 따라 조용히 물러났다. 시위도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간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다. 연못 위에 붉은 칠을 한 다리가 있어 아래로 연못의 잉어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데려갔다. 잉어는 보이지 않았다. 물이 더러운지 자꾸만 죽어나가, 결국 죽은 잉어들을 모조리 건져낸 지가 몇 달 전이라고 들었다. 아직도 새로 잉어를 넣지 않았나.. 빈 연못을 보며 이와이즈미는 조금 울적해졌다. 


"예쁜 금어들이 오늘은 안 보이네."

"..겨울은 지났는데 이상하네요."


사정을 모르는 카게야마는 연못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대꾸했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카게야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안 좋은 일 있어?"

"..아녜요."

"그래?"


이와이즈미는 눈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서 단패궁이 보였다. 작게 어깨를 들썩이는 카게야마의 숨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나한테도 말 못하는 거야?"

"...."

"하지메라고 불러달라고 했는데, 불러주지도 않고."


살짝 투정을 부리는 말투였다. 이와이즈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이와이즈미가 카게야마에겐 귀엽게 느껴졌다. 



홀 : 하지메님 

짝 : 실은



"하ㅈ.."


카게야마는 슬쩍 입술을 떼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역시 부끄러웠다. 망설이는 까만 머리통을 쓸어주고 싶은 걸 꾹 참고서, 하지메는 뒷목을 긁적였다.


"힘들면 억지로 안 해도 돼."

"예.."

"..토비오."


카게야마는 제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이와이즈미를 올려다보았다.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이와이즈미 또한 귀끝이 빨갰다. 어제도 불러보았던 이름이었다. 못할 게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메님."

"..응. 토비오."

"그냥, 좀 안 좋은 꿈을 꾸었는데."


카게야마는 꿈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아버지의 눈초리를 생각하고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와이즈미의 눈은 그런 카게야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메님이 뵙고 싶었어요."

"...."

"...이상하죠?"


꿈을 꾸고 나서 이와이즈미가 보고 싶었다니, 제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웃으며 고개를 드는 카게야마를 안아주는 손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따뜻한 품에 안긴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가슴 위에 손을 두었다가, 밀어내는 대신 자신도 손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힘들면 나를 찾아오라고 했잖아."


팔찌를 채워주며 했던 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끌어안고서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의 몸에서 나는 풋풋한 냄새가 좋았다. 꽃향기같기도 하고, 이슬냄새 같기도 했다. 기분 좋은 체향에 머리가 맑아졌다. 이와이즈미에게 안긴 채 카게야마가 쿡쿡 웃었다.


"힘든 건 아니었어요."

"얼굴이 안 좋았어."

"꿈에..선왕 폐하께서 저를 혼내셨어요."


이와이즈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카게야마는 말했다. 


"들키면 안 된다고 하셨거든요."

"....."

"아마 제가 죽어서 저승으로 가게 된다면, 그때도 혼내시겠죠."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를 가졌는데 죽는다는 소리 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토비오."


언제나 안심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바로 옆에서 들렸다.


"누가 먼저 죽을지는 몰라도 만약 내가 저승에 가면 말해둘게."


품 속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와이즈미도 눈을 아래로 내렸다. 파란 눈은 눈물이 고인 것처럼 일렁였으나 울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발개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눌러주며 이와이즈미는 중얼거렸다.


"당신 딸은 아주 예쁘게 잘 컸으니, 이제 그런 말은 그만 두라고 말이야."



이와이즈미 하지메

○: 76 (+3)

◇: 36

카게야마 토비오 

□: 70



카게야마의 이와이즈미에 대한 호감도가 70을 넘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를 찾아갔고,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를 반기며 호감도 +3이 올랐습니다.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란 생각으로 쭉 견뎌왔다. 그러나 잘 자라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카게야마는 눈물을 참기 위해 코를 훌쩍거렸다. 카게야마를 안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그 소리를 듣고 살짝 웃었다. 


"왜 울어."

"안 울어요."

"얼굴 볼까?"

"안 운다니까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더이상 쫓지 않고 다시 연못을 쳐다보았다.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잉어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와이즈미는 괜히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네 궁녀들이 걱정하겠다. 이제 돌아가자."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다리를 건너오자 궁녀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돌려주지 않고서,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직접 단패궁까지 데려다주었다. 도착했을 땐 카게야마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이와이즈미님. 살펴가세요."


카게야마는 다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발이 성큼 가까워졌다. 문을 연 궁녀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었다. 카게야마의 허리를 안은 이와이즈미가 속삭였다.


"들어가. 토비오."

"..하지메님도."


작게 이름을 부르고나서야 손이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하지메를 배웅한 후 궁 안으로 돌아왔다. 


*


궁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기 전, 카게야마는 바느질감을 손에 들었다. 조그만 주머니 위의 자수는 아직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상궁을 따라 열심히 자수를 놓았다.


"마마. 천천히 하시니까 모양이 잘 나오세요."

"..손이 아프다."

"주물러드릴테니 잠시 쉬었다가 하시겠습니까."


그만 하고 싶다는 말을 돌려하였으나 상궁은 봐주는 법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1~9 : 선물

0 :



손님이 왔다는 말이 들렸다. 누구냐고 묻자, 뜻밖의 이름이 들려왔다.


"...오사와가."


카게야마는 몇달 전 눈물을 보이며 이 궁을 나갔던 오사와 사야코를 떠올렸다. 궁금하여도 혹시나 그 아비가 나쁜 짓을 할까봐 묻지 못했다. 제 딸에게 유독 박정했던 남자였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다면 또 어떤 해코지를 했을 지 모른다. 사야코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거렸다.


"....마마?"


카게야마의 팔을 주물러주던 상궁이 카게야마를 불렀다. 아아, 그래. 카게야마는 오사와 사야코를 들어오게 했다. 


"폐하."


상궁마저도 내보낸 궁 안은 오직 카게야마와 오사와 사야코만이 있었다. 수척한 얼굴이 마음이 쓰여 카게야마는 그녀를 가까이 오게 했다. 오사와는 천천히 다가왔다가, 주머니들을 보았다. 서투른 자수를 본 오사와가 빙긋 웃었다.


"폐하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까."

"...워낙 재주가 없는 손이다. 눈 버리니 보지 말거라."

"회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때 경하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약혼녀였던 여인의 축하는 새삼스럽게도 부끄러웠다.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얼굴이 좋지 않다."

"폐하."


오사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곱고 따뜻한 손이었다.


"저는 폐하를 뵙고 이 길로 키타가와를 떠날까 합니다."

"....네가?"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사와는 천천히 소매를 올렸다. 가녀린 팔에 난 멍자국들을 본 카게야마의 눈이 커졌다.


"...네 아비가 그런 것이냐. 내가 말해서.."

"폐하. 저는 가끔, 겨울을 떠올립니다."


오사와는 다시 소매를 내렸다. 꿈을 꾸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저와 함께.. 이 나라를 떠나시는 거예요."

"....."

"하지만 폐하는 저처럼 나약한 분이 아니셨죠."


가끔, 아니 종종 생각했다. 한 번도 자신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던 카게야마가, 몹시 약해진 채로 자신에게 의지하는 꿈이었다. 오사와 사야코는 눈가를 비볐다.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오늘 이 궁을 찾은 건 다른 일이 아닙니다."

"오사와."

"이 상처로 제가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걸, 폐하께서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오사와의 입은 준비해온 사람처럼 끊이지 않았다.


"폐하. 제 말엔 어떤 거짓도, 속임도 없어요."

"...."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폐하를 죽이려 합니다."


카게야마는 바들바들 떠는 오사와를 쳐다보았다. 


귀족 측에 호의적으로 보였던 쿠니미 아키라가 섭정으로 올라와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사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왕사를 맡은 킨다이치의 권한이 올라갔다. 점차 그의 권한은 커졌고 그것을 섭정은 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이해관계로 갈라져 싸울 때 섭정이 먼저 움직였다. 아오바죠사이를 뒤에 업고서 섭정은 난폭하게 귀족들의 손발을 잘라냈다. 오사와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다고 방심하였던 오사와는 섭정과 대장군이 서로를 반대하는 것 같으면서 결국은 보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알아차렸을 때는 늦었다. 대신의 딸은 신중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선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폐하를.. 죽이려 몇 번 시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몇 번..?"

"딸에게도 독약을 건넸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이용하지 않았겠습니까."


오사와 사야코는 집을 떠나기전 오사와의 방을 뒤졌다. 별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으나 3월 31일, 외출, 이라고 적힌 서편이 나왔다. 의심할까봐 그것을 가져오지도 못했다. 오사와는 카게야마가 혹시나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었다.


"어떻게든 아버지께서는 폐하를 해치려할 것이니, 이번 달 말에는 밖으로 나가지 마셔요."

"...."

"폐하.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간절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었다. 웃는 얼굴도 쓸쓸해보여 카게야마는 한참 오사와를 쳐다보았다.


전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여한이 없었다. 오사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게야마가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하지만 잡지 못했다.


"다른 나라로 간다고?"


카게야마의 물음에 오사와는 잔잔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어느 나라에 가느냐. 알려다오."

"도착하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오사와."

"폐하. 청이 있습니다."


오사와의 몸이 카게야마 쪽으로 가까워졌다. 


"제가 폐하와 부부가 되었다면, 저는 카게야마 사야코가 되었겠지요."

"....."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저를."


오사와가 말하기 전에 카게야마의 입이 열렸다.


"사야코."

"...."

"...사야코. 꼭 서신을 보내줘야한다."


오사와 사야코는 자신과 같은 여자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빛나는 보석을 보면 모두가 가지고 싶어한다. 아마 자신에게는 카게야마가 그런 보물이었을 것이다.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그 반짝거리는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여 위안이 된다. 가질 수가 없었던 걸 알았다. 그래도 이름이 불린 순간 미련이 남아 오사와는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폐하."


같이 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오사와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부디 내내.. 평안하십시오."


*


오사와 사야코가 떠났다. 생각보다 긴 방문이었기에, 상궁이 급하게 점심식사를 준비했다. 네코가 상궁을 따라왔다. 겨우 하루를 보지 못했는데도 반가워하며 꼬리를 흔든다. 조금 울적해져있던 카게야마는 네코를 무릎 위에 올린 채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너도 같이 먹을까?"


말린 과일을 입에 대주니 강아지는 시큼한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훽 돌렸다. 억지로 입에 넣어보려던 카게야마는 네코가 낑낑 울자 얼른 내려놓았다. 앞발 안쪽에 손을 넣고 들어올렸다. 네코는 기분이 상한 듯 카게야마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 놈 보거라. 나한테 삐졌나보군."


카게야마는 웃는 얼굴로 네코를 안아들고서 달래주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면, 섭정이 의원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궁녀의 말이 들렸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쓰는 카게야마에게 쿠니미가 설명하였다.


"단패궁께서 회임을 하셨으니 이제 표식이 떠오를 겁니다."

"표식..?"

"의원이 그것을 도울 것이니 염려마십시오."


쿠니미의 말이 끝나자 의원이 다가왔다. 한참 맥을 짚어보고는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묻는다.


"단패궁 마마. 잠시 피를 내야할 것입니다."

"피까지 내야하는 것이냐."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을 빼면 배 위에 표식이 떠오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의원 또한 기록으로만 알고있던 사실이었기에 본 적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날카로운 바늘이 검지 끝을 찔렀다. 따끔하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곁에 서 있던 상궁이 서둘러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이제 안으로 모시고 가서 확인해보십시오."


의원이 직접 상궁에게 청하는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상궁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밋밋한 배를 걷어 올렸으나 아무런 표식은 없었다. 핏방울이 흘러내린 손 끝은 하얬다. 카게야마는 옷을 걷은 채로 배를 보았다. 표식이 떠오른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몰랐기에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상궁 또한 초조하게 카게야마의 배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마마. 배가 아닐 수도 있나봅니다."

"...전부 다 벗을 테니 네가 한 번 보거라."


옷이 손쉽게 떨어졌다. 알몸이 된 카게야마는 거울앞에 섰다.  몸의 구석구석을 쳐다보았으나 표식같아 보이는 건 없었다. 상궁 또한 근심하는 눈으로 카게야마를 살폈다. 허벅지 안 쪽까지 전부 보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옷을 입었다. 


"표식이 없다는 건.."


생각없이 말하던 카게야마의 입술이 멈췄다. 


"..표식이 없어."

"마마."

"...그럼 이 안에."


카게야마는 지난 달 잠자리를 가졌던 두 명을 떠올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여미지 못한 옷을 헤치고서 카게야마는 배를 쓰다듬었다. 표식이 없는 깨끗한 배가 카게야마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들썩였다.


"이 안에.."


되뇌는 목소리에는 당황과, 약간의 기쁨이 섞여 있었다. 상궁이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쿠니미 아키라는 초조하게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엇다. 어느날 밤, 회임을 가장 먼저 알았던 쿠니미는 잠든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어두운 욕망을 삭혀야 했다. 손대고 싶지 않았다. 가장 소중했기에 자신의 손에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옳은 생각이었다. 한 번 품에 안고나니 참을 수 없이 그를 갈망하게 되었다. 자신은 분명히, 안지 못하겠다고 말했었다. 


..네 잘못이야.


쿠니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약간 아픈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은 카게야마로 병이 들어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어둡고 끈끈한 집착이 쿠니미의 발밑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누구의 아이라도 상관없이, 이대로라면 아마도 나는.. 그 아이를. 네 첫 아이를.


활을 쏘지 못하던 카게야마는 오직 자신 때문이었다. 그 때문이라면 정말로 나머지 다리를 내던져도 좋았다. 쿠니미는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가 들어간 곳을 쳐다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아직 카게야마는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나?"


쿠니미의 질문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즉각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


습한 눈동자로 기다리기를 또 한참이었다. 마침내 상궁이 나왔다. 쿠니미가 묻기 전 상궁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표식이."


혹시라도 알아듣지 못할까 천천히, 하나하나 곱씹는 단어들. 상궁은 의원을 쳐다보았다가 쿠니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식이,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는 단 하나뿐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키타가와의 아이를 품었다. 그렇게 결국 키타가와는 카게야마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끝없는 희열이, 열락이, 지옥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올라 쿠니미를 밀어올렸다. 


쿠니미 아키라는 마치 처음 웃어보는 사람처럼 서투르게 웃었다.



쿠니미 아키라

○: 73 (+10)

◇: 64

카게야마 토비오 

□: 67



옷을 입고 나온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의원에게 몸을 보였다. 의원은 맥을 짚어본 후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지난달 중순에 회임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가.."


카게야마는 동시에 두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쿠니미와 킨다이치였다. 의원 또한 카게야마의 궁에 들었던 명단을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마도 시기를 봐서는 섭정 전ㅎ.."

"상관 없지."


듣고 있던 쿠니미가 불쑥 끼어들었다.


"장군이나 나나 표식이 없으니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어."

"섭정 전하의 말씀은.."

"우선은.. 킨다이치의 아이라고 알리는 게 좋겠군."


카게야마는 배를 더듬었다. 이 안에 킨다이치의 아이가..? 하지만 쿠니미의 아이일 수도 있었다. 킨다이치의 아이라고 알리자는 쿠니미에게 카게야마가 말했다.


"하지만 그.. 네, 아니, 섭정 전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느 쪽이라도 단패궁께서 키타가와의 후계를 낳으심은 틀림이 없으시니, 저는 상관 없습니다."

"....."


의원은 아이의 성별까지는 구분해내지 못했다.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했다. 쿠니미는 의원을 돌려보냈다. 상궁 또한 방을 나갔다. 둘이 되고 나서야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카게야마."


기뻐보이는 얼굴이 지나쳤다. 카게야마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그렇게 좋아할 줄은..몰랐는데."

"너의 첫아이잖아."


방금 전까지는 그 아이를 태어나지도 못하게 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식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뻐, 쿠니미는 순수하게 웃었다. 킨다이치의 아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상해..."


카게야마는 실감이 나지 않아 배 위를 쓸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것 같은 배는, 정말로 깨끗했다. 



3월 5일. 길조가 나타나 섭정궁에서 북을 울리다

3월 15일. 단패궁의 카게야마, □□□ □□□에 의해 회임하시다

3월 15일. 단패궁의 카게야마, 회임하시다



쿠니미는 저녁에 킨다이치를 데려오겠다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섭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허락만으로 쿠니미는 또 다시 즐거워했다. 점차 작아지는 쿠니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안에 쿠니미나..킨다이치의. 카게야마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제법 오래전에 꾼 꿈이었다. 보라색 꽃창포가 가득 피어 물가에 가득했다. 

"..태몽이라는 건, 임신하기 전에 꾸는 것이냐?"

카게야마의 물음에 상궁은 반색했다.

"마마. 혹시 좋은 꿈을 꾸신 겁니까."
"좋은 꿈..?"

기억이 맞다면 쿠니미와 밤을 보낸 다음 날이었다. 조그맣고 연약해 말라 비틀어진 잎사귀. 쿠니미의 다리같기도 했다. 그 잎사귀가 안타까워 카게야마는 직접 손으로 물을 퍼올려 끼얹었다. 순간 화사하게 피는 꽃잎들. 물기를 머금고서 반짝이는 향기. 카게야마는 기대하는 얼굴의 상궁을 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좋은 꿈이란 게 뭔지 모르겠구나."

상서러워서 바로 알아보실 겁니다. 상궁이 급히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배를 쓰다듬었다. 보라색 꽃. 쿠니미의 선물.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일어난 우연이,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

아마 이 아이는 쿠니미의 아이일 것이다.

*

킨다이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쿠니미를 쳐다보았다. 소식을 전하는 쿠니미의 얼굴은 화사하여 마치 꽃이라도 피어난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킨다이치는 산만하게 좌우로 걷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틀림없이?"
"틀림없이."
"...."
"네 아이일 거야."

쿠니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구의 아이라도 상관없었다. 아마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킨다이치의 아이여야만 했다. 복잡한 얼굴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킨다이치는 쿠니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의원은 네 아이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셋의 아이로 하자."
"쿠니미."
"정말 기쁜 일이지. 카게야마가 키타가와의 아이를."

정말로. 쿠니미는 어린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상적으로 이뤄졌다. 더 이상, 그의 여한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오사와만 잡으면 돼. 그리고 마지막으로.."
"쿠니미."
"정말.. 정말 잘 됐어. 킨다이치."

쿠니미는 순간 얼굴을 찡그렸다. 오래 서있던 탓에 다리가 아팠다.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그는 킨다이치를 올려다보았다. 킨다이치는 여전히 복잡한 얼굴이었다. 


홀 : 너는..
짝 : ...그래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을 괴롭혀야 만족할까. 

그것은 아마, 쿠니미 아키라를 싫어하는 것은 쿠니미 아키라 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킨다이치는 쿠니미가 어린 쿠니미로 보일 때가 있었다. 셋 중 가장 똑똑하였으나 마음은 여렸다. 홀로 병풍 뒤에서 화살을 맞았던 쿠니미와 지금의 쿠니미는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았다. 킨다이치는 그런 쿠니미나 카게야마를 자신이 지켜야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래."

킨다이치는 쿠니미의 기쁨에 동조해주었다. 

"하지만 키타가와의 아이라고 하는 걸로 충분할 거야."
"왜."
"네 입으로 셋의 아이라고 말했잖아. 더 이상은 양보 못해."

쿠니미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킨다이치는 검을 차고 창 밖으로 단패궁을 바라보았다. 기분탓인지 떠들썩한 분위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카게야마가.."

아이를 가졌다. 쿠니미나, 혹은 자신의. 쿠니미는 누구의 아이라도 좋다고 했다. 킨다이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건 아마도 쿠니미의 감상과는 조금 다른 범주였다. 

"...카게야마의 아이라니."

카게야마는 아이를 지켜달라고 직접 부탁했다. 자신이 지켜야할 카게야마의 아이. 그 말을 입 속에서 되뇌자 감히 가슴이 뭉클했다. 킨다이치는 한참 단패궁을 바라보았다.


킨다이치 유타로 
○: 56 (+3)
◇: 40
카게야마 토비오 
□: 42


단패궁에서 사람이 왔다. 조촐하게 식사를 준비하였으니 같이 들자는 단패궁의 청이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쿠니미는 겉옷을 걸쳤다가 킨다이치에게 말했다.

"장군."
"...무슨 일이십니까."
"오사와 대신께서 계속 몸이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섭정은 싸늘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단패궁을 해치려한 의원과의 관계를 물었으나 답이 없군요. 병사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잠깐. 쿠니미. 갑자기..?"
"카게야마는 우리 아이를 가졌어. 해치려고 마음먹으면 이제 거칠 것이 없겠지."
"...반발이 심할 텐데. 지금도,"
"어차피 사병은 몰수했고 뒤로 빼돌린 병력이야 겨우 몸을 지킬 정도일 거야."

킨다이치는 그러나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쿠니미의 설득이 계속 되었다.

"킨다이치. 카게야마가 아이를 임신했어. 지켜줘야 돼."
"...성국들이 아직 키타가와에 있어. 그렇게 쉽게,"
"우리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밝혀지면 곧 떠나겠지. 그 전에 모두."

모두, 치워버리자. 쿠니미는 손 끝으로 시야를 가리는 화병을 넘어트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화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킨다이치는 굳은 얼굴로 그 화병을 쳐다보았다. 3월 15일 밤. 단패궁의 회임 사실이 밝혀진 경사스러운 그 날은, 동시에 오사와의 난이라고 불리는 병란의 시작일이기도 하였다. 


단패궁으로 먼저 들어온 건 쿠니미였다.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물음에 쿠니미는 무척 다정한 얼굴을 했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그래?"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니미는 낮에 본 기분 좋은 모양 그대로였다. 입가가 흐물흐물해보였다. 그런 쿠니미를 보자 카게야마는 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기억났다.


1~9 : 말해볼까 
0 : (침묵)


"쿠니미. 태몽을 알아?"

뜬금없는 말이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목소리에 쿠니미는 순간 호흡을 잊었다.

"전에 내가, 창포꽃 꿈을 꿨다고 했잖아."

그랬다. 쿠니미는 그 꿈을 질투해 카게야마에게 창포꽃을 안겨주었다. 

"너랑 같은 밤을 보낸 후였으니까.."
"...."

카게야마는 머뭇거렸다. 생각할 때는 몰랐는데 제 입으로 말하자니 갑자기 부끄러웠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말을 하다 말고 카게야마는 배를 쓰다듬었다. 쿠니미는 더듬더듬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카게야마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걸 한 번쯤은 상상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에게 이런, 완벽한 행복이 오랫동안 계속 되다니. 카게야마는 눈을 돌리고서 느리게 말했다. 

"..네 아이가 아닐까."
"...."
"그런 생각이 들었어."

소중한 친구. 카게야마가 지켜줘야할, 그리고 카게야마를 지켜줬던. 많은 일이 있었으나 그것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쿠니미와 자신의 아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말을 끝내고 카게야마는 다시 쿠니미를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미동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쿠니미 아키라 
○: 83 
◇: 64
카게야마 토비오 
□: 67 (+3)


놀란 카게야마가 다가오려고 하자 쿠니미는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갈래갈래 흩어졌다. 쿠니미..? 카게야마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의아한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쿠니미는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핏줄이 터진 것처럼 눈이 빨갰다. 눈 비비면 안 돼.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이 잡힌 쿠니미가 멈칫했다.

"카게야마."

잠긴 목을 겨우 열어 쿠니미가 말했다.

"나는 이제 정말로, 여한이 없어."
"쿠니미?"
"왜냐하면 나는.. 처음 너를 만났을 때부터."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책만 읽고 귀염성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집안에서도 겉돌았다. 왕을 따라 들어온 궁은 넓어, 어린 쿠니미 아키라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참을 헤매던 쿠니미의 눈에 저보다 조금 작은 아이가 들어왔다. 까만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기름을 먹인 것처럼 햇빛 아래에 반짝였고 살짝 그을린 얼굴은 뺨만 동그랗게 붉다. 가까이 가보니 자신을 반기며 박수를 쳤다. 파란 눈이 예뻤다. 그런 아이였다. 너도 유타로처럼 나랑 놀거야? 재잘거리는 말을 들으며 쿠니미는 유타로가 누군지 몰라도 부럽다고 생각했다. 

쿠니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행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감동은 마음 깊은 곳에 남았다. 그는 이제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 손을 잡고 싶었으니까."

그 어린 시절의 파란 눈을 고스란히 간직한 카게야마가, 쿠니미를 보고 웃었다. 

*

킨다이치가 돌아오자 늦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킨다이치는 쿠니미의 눈물자국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카게야마의 안부를 물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했다.

"..다행이야."

킨다이치는 안심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곧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네 아이는 내가 지켜. 걱정말고 좋은 생각만 해."
"활만 있으면 나도 내 몸은 지킬 수 있어."

카게야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쿠니미의 앞에서 카게야마가 먼저 활의 이야기를 꺼냈다. 킨다이치는 조금 놀랐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너는 세상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사람이잖아."
"카게야마 네가 활을 잡으면 킨다이치가 할 일이 없어져."

듣고만 있던 쿠니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킨다이치나 나는, 카게야마 너를 지키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나랑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기도 하고."

카게야마는 손에 든 수저를 살짝 들었다가 내렸다.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밤이 깊었으나 단패궁의 불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15일 밤 끝




3월 15일. 대장군 킨다이치 유타로, 섭정의 명을 받아 오사와 타카히로를 찾다

3월 15일. 오사와 타카히로 도주하다



'HQ/카게른 > 폐왕의 밤' 카테고리의 다른 글

86. 3월 17일  (0) 2016.05.23
85. 3월 16일  (2) 2016.05.19
IF. 다른 첫날밤  (2) 2016.05.13
83. 3월 14일  (2) 2016.05.07
82. 3월 13일  (2) 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