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궁 안
0 : 궁 밖
쿠니미 아키라의 제안에 대해 각 궁은 같은 궁의 사람과 의견을 나눕니다. 의견은 카게야마에 대한 호감도와 성격에 따라 갈릴 수 있습니다. 하루에 궁 하나씩이며, 섭정궁이 걸린 경우 쿠니미와 다른 상대의 대화 턴입니다.
1~2 : 동궁
3~4 : 서궁
5~6 : 남궁
7~8 : 북궁
9~0 : 섭정궁
아오바죠사이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서 그 이야기는 전해져내려왔다. 아오바죠사이의 먼 왕족이었을 것이다. 황제의 친척이라고도 했고, 후계자가 되지 못한 막내황자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 사내는 평국에 놀러갔다가 그만 어떤 여인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일생에는 딱 한번만 오는 사랑이 있었다. 사내는 바로 지금이 그 순간임을 알았다.
"같이 갑시다."
사내의 구애에 여인도 손을 내밀었다. 여인의 집안도 꽤 지체높은 곳이라, 둘의 도망은 금방 알려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반대할 수록 둘의 사랑은 깊어졌으니 여인은 도망치면서도 아이를 임신하였다. 허락받지 못한 핏줄이었다. 사내는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족이었으므로 성국의 귀한 분들을 모시기에는 쉬웠을 것이다. 사내는 여인을 숨겨두고 장장 일주일을 빌었다. 밥도 먹지 않고, 물 한모금 입에 대지도 않고서 산채로 말라갔다. 그래도 왕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평국의 여자.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인데 너는 어째서 어리석은 말을 하느냐."
"그 어리석은 말이 지금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남자는 왕들에게 빌고, 하늘에 빌고, 나중에는 땅에 이마를 찧으며 지신에게도 빌었다. 보름이 지나자 남자는 수척해졌다. 이쯤하여 그만둘 것이라 생각한 왕들이 그를 달래었다.
"지금이라도 헤어지면 없었던 일로 해주마."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허무하게 웃었다.
"이번 생에는 허락되지 않을 것 같으니, 부디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내생에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거짓말처럼 사내의 피를 먹은 땅이 쩍 갈라졌다. 맑았던 하늘에서는 천둥과 함께 비가 내렸다. 놀란 왕들이 살펴보니 사내는 혀를 끊고 죽어있었다. 그제야 왕들은 사내의 결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소망은 왕들보다 먼저 하늘과 땅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재미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 때 이후로 성국과 평국의 혼인은 가능해졌지."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오이카와. 꼭 죽어야 돼?"
"하늘과 땅을 감동시키려면 목숨이 필요하다잖아."
정갈하게 몸을 씻은 후 성국의 앞에 나와 원하는 것을 적어 올린다. 바로 목숨을 끊으면 그 피를 인주삼아 도장을 찍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오랜 이야기라 모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안다고 하더라도 감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성국의 왕족들을 모으기에도 힘들었을 뿐더러 자신이 죽은 후에나 바뀌는 세상이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분하더라도 남 좋은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뒷 이야기에 따르면 그 여자는 사내의 아이를 낳고 다른 왕족과 결혼했다네."
"나는 평생 수절하였다고 들었는데."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찻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수절보다는 다시 행복을 찾는 쪽이 낫겠지."
"...."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이와쨩? 오이카와의 물음에 이와이즈미는 입을 달싹였다.
홀 : 안 돼
짝 : ....
섭정의 결정은 분명 카게야마를 거치지 않고 나온 제안이었을 터였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섭정의 오만이 싫었다.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쿠니미 아키라는 아직 카게야마의 친구였다. 임신을 한 카게야마가 이 소식을 알면 놀랄 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
그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목숨과, 또 카게야마의 삶이 걸린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만이 죽어나가는 일이었다면 이와이즈미는 망설임없이 찬성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마음에 걸렸다.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
"섭정쨩은 허락해주지 않으면 아마도- 카라스노겠지. 그쪽에서 제일 달려들었으니까. 카라스노의 아이로 만들어버릴 심산인가봐."
"뭐?"
"카라스노의 불안정한 왕자에게 넓은 평국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안경군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걸. 표식을 꾸며서라도 카라스노의 아이로 만들 거야. 오이카와는 피곤한 눈가를 꾹꾹 손가락으로 눌렀다. 이와이즈미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건 가짜라고 밝혀내면 될 일이잖아."
"카라스노와 아오바죠사이의 다툼으로 번지게 되면 더 일이 커져. 여기서 끝내야 돼."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천천히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1~9 : 일단은
0 : 흠
"카라스노 쪽이 토비오쨩을 가져가게 둘 순 없지."
"....."
"키타가와는 아오바죠사이의 것이야."
"그거 말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눈을 마주쳤다.
"카게야마 말이야."
"...이와쨩?"
"섭정이 죽으면 카게야마가 슬퍼할 거야. 더구나 자신을 위해서라니."
혼란스러운 목소리는 카게야마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그런 친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렇게 깊게 정을 쏟고 있었을까. 오이카와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섭정쨩의 말대로 따라주는 것도, 오이카와씨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라."
오이카와는 뒤늦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시간이 좀 있으니 이와쨩도 잘 생각해봐."
"..그 전에 마음대로 죽거나 하진 않겠지?"
"모두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한 채 죽으면 그거야말로 개죽음이지."
그 섭정쨩도 잘 알거야. 오이카와는 투덜거렸다.
"제법 똑똑하더라고.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오이카와씨가 아오바죠사이로 데려갈 마음이 생길 정도로."
"데려간다면 네 목숨부터 노릴걸."
"그러니까 말이야."
차를 전부 마신 오이카와는 장난치듯 잔을 손 안에서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이대로 당해준다면 오이카와씨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오이카와는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이와이즈미는 한 마디 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와 자신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카게야마는 며칠 간 아침에 아무도 단패궁이 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상궁에게 말하자 상궁은 말하기 곤란한 얼굴이었다.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
이제 누구의 아이인지 밝혀졌다. 굳이 카게야마를 보러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바쁘신가?"
카게야마는 중얼거렸다. 상궁이 얼른 카게야마에게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입이 심심하실 텐데 쉬실 동안 이것을 드시고 계셔요."
"그래."
홀 : 섭정은
짝 : 장군은
"섭정ㅇ, 섭정 전하.."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호칭이 여전히 어색했다. 카게야마가 어설프게 쿠니미를 찾자 상궁이 황급히 말했다.
"섭정 전하께서는 궁에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예.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전해드릴까요?"
"..아니다. 바쁠 텐데."
상궁이 가져와준 단 것을 입에 넣으며 카게야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상궁은 생각했다.
홀 : 궁 안의 소문
짝 : 카게야마의 몸 상태
...소문으로는, 섭정이 성국을 화나게 하였다고 들었다. 궁녀들에게 입단속을 시켰으나 그 소문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어제부로 섭정궁에 모였던 왕족들은 한참 동안 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다, 혹시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냐, 그런 말들이 떠돌았다. 대장군이 출정을 한 이유도 그것이 아니냐는 말에 상궁은 오사와의 일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소문들엔 점점 살이 붙고 있었다.
"....."
회임을 한 주인에게 굳이 소문을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궁은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어느 새 창가로 가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네코가 나비를 쫓으며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저걸 보렴. 한 번도 잡지 못했으면서 저렇게 쫓는 구나."
카게야마가 웃으며 하는 말에 상궁 역시 서둘러 웃는 얼굴을 했다.
"그렇네요. 마마."
아무도 없는 궁은 쓸쓸했다. 카게야마는 상궁마저도 나간 궁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받았던 선물들이 있었다. 결국은 다정했던 사람들이었다. 보답할 수 있다면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다들 언제쯤 돌아가시는 걸까.
1~3 : 산책
4~6 : 바느질
7~9 : 선물
0 :
카게야마는 밀어둔 주머니들을 꺼내왔다. 상궁이 궁녀들과 함께 만들어둔 주머니는 예뻤지만 그 위에 올라간 자수는 보잘 것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아도 정말 그랬다. 으음.. 카게야마는 도무지 늘지 않는 자수를 살펴보았다.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선 제대로 위치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엉뚱한 곳에 바늘을 꽂으니 용이라고 우겨보아도 길가의 돌맹이처럼 보였다. 바위라고 말하고서 이걸 이와이즈미님께 드리면 될까?
"....."
돌맹이 모양의 용을 쳐다보던 카게야마는 문득 수를 세보았다.
"하나, 둘.."
아홉. 총 열개가 있었던 주머니는 역시 하나가 비었다. 첫 자수를 놓았던 주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궁 안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발이 달렸나."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서 곧 바늘을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카게야마의 자수 실력은
1~3 : 암전
4~6 : 그럭저럭 향상
7~9 : 갑자기 발전
0 : !!!!!!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껏 자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바늘은 너무 가늘었고, 실은 길었고, 주머니의 천은 보들보들하여 망가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상궁이 하는 모양을 훔쳐보면 아무렇지 않게 천 속으로 바늘을 찔러넣는 것이었다. 너무 조심스럽게 만졌나. 카게야마는 손 안의 바늘을 쳐다보았다.
"이건 화살이야."
그리고 다시 주머니를 들었다. 이건 과녁이고. 카게야마는 아주 먼 곳이라도 화살을 쏘아 맞출 수 있었다. 고작해야 손 안의 거리였다. 화살을 쏜다는 생각으로 카게야마는 수를 놓아야할 자리를 콕콕 쑤셨다. 도안을 보고 주머니를 비교하며 한참 자수를 놓고 있자, 상궁이 들어왔다가 깜짝 놀랐다.
"마마. 제가 말씀도 안 드렸는데 먼저 자수를 놓고 계신 겁니까."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카게야마는 자신만만하게 거의 다 완성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속에서는 독수리가 반 쪽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보여줬다가, 상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게야마는 걱정이 되었다.
"..이상한가?"
"마마."
"...나는 나쁘지 않아보이는데.."
"마마! 어쩜 이렇게 잘 하셨어요."
응? 카게야마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상궁이 싱글벙글 웃으며 주머니를 손에 올려두고 보고 있었다.
"마마께서는 바느질에 소질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런가?"
"세상에, 어제까지는 정말로 이상ㅎ..부족하셨는데, 이렇게 금방 익히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상궁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
*
자주색과 은실을 섞어 카게야마는 기어코 주머니 하나를 완성했다. 희고 광택이 나는 비단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 위에서는 독수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완성하고 나니 뿌듯하였다. 카게야마는 주머니를 높게 들어보았다.
"...잘 안 보이는군."
잘한다, 잘한다고 칭찬해주던 상궁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바쁜 때에도 카게야마가 먼저 자수를 놓는 것을 기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게야마는 궁녀 한 명을 데리고 자신도 궁 밖으로 나왔다. 난생 처음 완성한 물건을 궁녀에게도 보여주었으나, 궁녀는 주인이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황송해 고개만 숙이기 바빴다. 예쁘냐고 물으면 정말로 예쁘다는 답이 돌아왔다.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
"..독수리."
카게야마는 아직 지지 않은 태양 아래에서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빛을 받아 주머니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자신이 보기엔 훌륭해보였으나 다른 이가 보면 또 어떨지 몰랐다. 천천히 걸어가던 카게야마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우시지마님."
"카게야마."
우시지마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가장 주머니를 보여주고 싶었던 이였으나 카게야마는 서둘러 주머니를 뒤로 숨겼다.
*
섭정의 제안은, 우시지마가 상상하지 못한 영역의 이야기였다.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우시지마의 상식이었다. 그 상식에게 섭정은 물었다. 어째서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느냐, 그 근거는 오직 전부터 전해오는 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시지마는 섭정의 말을 반기지 않았다.
역사에서 지워진 위왕은 우시지마가 손을 잡아 안아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왕이 존재하게 된다면, 시라토리자와의 황제는 키타가와의 폐왕을 황후로 맞이하려한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지나치게 불온한 이야기였다. 왕이었던 카게야마는 좋았으나, 왕이 된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에겐 좋지 않았다.
"우시지마님."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우시지마는 고개를 들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단 한명의 여자가 우시지마를 부르고 있었다. 우시지마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렸다.
"카게야마."
"뵙게 되니 기뻐요."
"...나를 보아서 기쁜가."
"왠지 우시지마님을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습니다."
따져보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제부터 쭉 혼자였던 카게야마는 우시지마를 보며 반가워했다.
"그렇군."
우시지마가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명수는 숫사슴을 잡아 우시지마에게 주었다. 카게야마에게 두번째로 받은 선물이었다. 우시지마는 그 숫사슴의 가죽을 벗기고 뿔을 잘 보관하도록 명했다. 그는 그것 또한 카게야마에게 줄 생각이었다.
"네가 내 앞에서 활을 쏘던 것이 엊그제다. 이틀을 보지 못했으니 오랜만이지."
"이틀밖엔 되지 않았습니까."
"내게는 마치 이년처럼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부끄러워졌다. 우시지마는 얼굴을 붉힌 카게야마가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손에 든 것은 무엇이지?"
홀 : 놀리지 마세요
짝 : 아무것도
독수리는 시라토리자와의 상징이었다. 키타가와에 와있는 단 한 명의 시라토리자와인을 생각하며 카게야마는 그 주머니를 만들었다. 만든 직후에는 보기 좋았는데 우시지마가 보기엔 이상할 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종전까지의 자신감은 사라진 채로 머뭇거렸다. 우시지마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게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인가보군."
"우시지마님. 그게,"
뒤로 돌린 손이 움찔거렸다. 평소라면 보여달라고 강하게 말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 우시지마 또한 더이상은 캐물을 수 없었다. 그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누구나 그런 일이 있는 법이지."
"우시지마님."
이만 돌아가려는 우시지마의 발걸음을 카게야마가 자꾸만 멈춰 세웠다. 그 목소리가 원하는 대로 황제는 걸음을 멈췄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놀리지 마세요."
"...무엇을."
카게야마는 대답 대신 뒤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꼭 쥐고 있던 주머니는 조금 구겨져 있었다. 시라토리자와의 색으로 치장한 주머니를 보기 위해 우시지마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아름답게 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보였다. 은실로 머리를 박아넣은 흰머리의 수리는 우시지마가 익히 알고 있는 나라의 표식이었다.
카게야마에게는 차라리 키타가와의 안에 남아있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잃었던 칭호를 조금이라도 되찾는 것을 누가 바라지 않을까. 순간 흔들렸던 건 그 때문이었다. 처음 보았던 카게야마는 여자임을 들켰음에도 당당했고 우시지마의 그 올곧은 화살로 호랑이를 쏘아 맞췄다. 황제는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우시지마는 손수 만든 것이 분명한 주머니를 본 순간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모든 불순물을 녹여버리는 것 같은 따스함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손 위에 올려져있는 주머니를 집었다. 카게야마는 긴장한 얼굴로 종알종알 말을 덧붙였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실력이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구나."
"최근에 연습해서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보기에 나쁘시지 않다면."
우시지마의 평이 궁금한 카게야마가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째서, 나에게."
"처음에는 단패궁에 들어가 처지를 원망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천천히 웃었다.
"우시지마님도, 다른 분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셨어요."
"...."
"받은 것은 많은데 드릴 것은 없으니 부족한 솜씨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우시지마는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빈 손을 쳐다보았다. 찔린 바늘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우시지마가 느리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
"예."
"훌륭한 솜씨군. 너는 계속 나를 놀라게 하는 구나."
"놀리시는 것 아니지요?"
카게야마는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우시지마의 머릿속에 단 한가지의 생각만이 떠올랐다. 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황제는 처음으로 자신이 그 행복에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눈앞의 여자는 행복해야만 했다.
머리를 복잡하게 하던 고민은 물로 씻어낸 것처럼 사라졌다.
*
자신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우시지마는 한 번도 다른 이의 선택에 제 몸을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가 온다면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결정을 따를 것이다. 그는 그런 마음을 단단하게 품었다.
"카게야마."
"예."
"손을 다오."
무슨 말뜻인지 알아차린 카게야마는 이번엔 빈 손을 뒤로 돌렸다.
"괜찮습니다. 고작해야 바늘로 조금 찔렸을 뿐이어요."
"어서."
"..정말 괜찮습니다."
"네 상처를 보고 어떻게 그냥 돌아가겠느냐. 나를 괴롭히려 하는군"
그런 건 아닙니다..카게야마는 결국 다시 손을 내밀었다. 우시지마는 그 손을 꽉 잡았다. 자세히 보니 벌레에 물린 것 같은 작고 빨간 흔적들이 촘촘히 남아 있었다. 그걸 보자 더욱 주머니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네가 고생했구나."
"서툴러서 그럽니다."
"활 솜씨보단 확실히 서툴겠지."
우시지마의 농담에 카게야마는 쑥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시지마는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하기야 네 활솜씨를 비교하자면 세상에 능숙한 일이 몇이나 되겠느냐."
손가락 끝에, 우시지마의 입술이 닿았다. 손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는 우시지마를 보며 카게야마는 얼굴을 붉혔다. 온기가 손가락 끝에서부터 퍼져 몸 구석구석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몇 차례의 입맞춤이 끝났다. 깨끗해진 손을 활짝 펼친 카게야마가 우시지마를 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우시지마님."
우시지마 와카토시
○: 80 (+3)
◇: 41
카게야마 토비오
□: 72
카게야마의 우시지마에 대한 호감도가 70을 넘었습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를 찾아갔고, 우시지마는 카게야마를 치료하며 호감도 +3이 올랐습니다.
우시지마가 친히 단패궁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하였다. 카게야마는 궁녀를 뒤로 두고서 우시지마와 함께 길을 걸었다. 길에 조그만 돌부리라도 있을까 염려하는 우시지마의 모습에, 카게야마는 그만 방긋 웃어보였다.
"우시지마님. 저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제가..아!"
앞을 보지 못하고 그만 발을 헛딛을 뻔한 카게야마를 우시지마가 얼른 붙잡았다. 우시지마의 품에서 카게야마는 겨우 몸을 가누었다. 그대로 품 속에 두며 우시지마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잡아주지 않으면 큰일날 뻔했구나."
"감사합, 니다.."
역시나 놀란 카게야마 또한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길인데도 혼자서 난리를 친 것 같아 그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얼른 일어나려하면, 우시지마는 힘을 주어 안았다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대로 쭉 있으면 좋겠지만 네가 다치면 안되겠지."
"다치면 고쳐주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가볍게 묻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우시지마는 잠시 바라보았다.
"..언제라도 치료해줄 수 있다. 하지만 다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구나."
"우시지마님은 참 자상하십니다."
"네게만 그런 것이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단패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온기를 느꼈다.
*
궁으로 돌아온 카게야마는 끼니를 대충 때우고는 다시 자수에 열중했다. 목이 뻐근하여 고개를 들면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그제야 몸에 피로가 느껴졌다.
"마마. 어깨를 주물러 드릴까요?"
"그럴까."
"갑자기 자수 실력이 느셨으니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습니다."
상궁은 카게야마의 어깨를 주무르며 웃었다.
"원래 잘 하셨는데 저를 속이신 것은 아니신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니까요."
"실이 아깝다. 뭐하러 그런 일을 하겠느냐."
"...하긴, 마마께서는 그러실 겁니다."
몇달 간 카게야마를 모셔온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속이는 일은 하지 잘 하지 못하고, 그만큼 누군가에게 속는 일도 많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주인은 그런 거짓 따윈 상관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상궁은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리다가 물었다.
"요즘 입덧이 덜하신 것 같은데 내일 아침엔 한 번 생선을 올려볼까요?"
"....음.."
"따로 드시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카게야마는 머뭇거리다가 호박떡, 하고 중얼거렸다.
"떡이 먹고 싶구나."
"..그러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호박을 먹으면 못생긴 아이가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깜짝 놀란 상궁이 어디서 들었냐고 묻자, 카게야마는 궁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상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내일 얼른 만들게 하겠습니다."
"..응."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지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17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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