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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87. 3월 18일


1~9 : 궁 안 

0 : 궁 밖


1~2 : 동궁

3~4 : 남궁

5~6 : 북궁 

7~8 : 섭정궁

9~0 : 단패궁



"히나타. 알아봤어."


츠키시마는 낡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히나타에게 말했다.


"아오바죠사이 쪽의 이야기라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는데 덕분에 키타가와까지 와서 공부를 하게 됐네."

"섭정이 말한 건 전부 사실이야?"

"거의 다."

"거의 다라는 건 무슨 뜻인데?"


히나타는 이렇게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츠키시마는 책에서 눈을 뗐다.


"우리를 목숨으로 협박하는 위치에 선 것처럼 말했지만,"

"....."

"그건 허세야."

"허세?"

"...확답을 주지 않고 떠나버리면 섭정도 어쩔 수 없어."


오직 이성으로 이뤄져있는 것 같은 남자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어디까지나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는 입장이지. 섭정의 말에 대한 결정권은 지금 네 손에 있지만."


무시해버리면 끝이거든.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니까. 츠키시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히나타는 섭정의 얼굴을 떠올렸고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섭정은 진짜 죽을 생각이었어.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키타가와와 사이가 나빠질 거야."

"...고작해야 평국의,"

"그 나라를 바라서 여기까지 온 건 우리야. 츠키시마."

 

츠키시마는 입을 다물었다. 히나타 또한 잠시 생각하며 조용해졌다. 작은 황자는 섭정을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 츠키시마."

"응."

"결국 섭정은 토비오를 위해 죽고 싶다는 거지?"

"..그렇지."

"토비오는 섭정의 아이를 임신했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일 수도 있는 자가 쉽게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

"....그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봐."

"그게 사랑이라면 무서운걸."


몸을 불살라버리는 사랑의 방식을 처음 접한 소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츠키시마는 자신에게 묻는 히나타에게 답을 줄 수 없었다. 어렴풋하게 섭정에게 느끼고 있던 견제들이, 실은 카게야마에 대한 질투라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그는 아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사랑해왔을 것이다. 한 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본 사이라고 하니, 그 깊이는 츠키시마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엮인 일이었다. 다른 나라가 반대하지 않는 이상 따르는 쪽이 오히려 간편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츠키시마."


히나타가 다시 한 번 츠키시마를 불렀다.


"이 일, 토비오는 모르겠지?"

"..아마도."

"나는 그 섭정처럼 토비오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야."


히나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츠키시마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래도 토비오의 일인데 토비오가 모른다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해."

"잠깐만. 히나타."

"알려줘야하지 않을까."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츠키시마 또한 알아차렸다. 카게야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외면하리라고 생각했던, 카게야마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알려주면 당연히 싫다고 할거야."

"응."

"그녀가 알아차린 게 우리때문인 걸 안다면 키타가와와는 당연히 틀어져."


차라리 섭정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면서도 츠키시마는 간혹 괴롭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조언 밖에는 할 수 없는 자신이 그는 조금 싫어졌다.  


"..토비오를 카라스노로 데려가긴 힘들 것 같아."


한참 뒤, 히나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카게야마에 대해 히나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츠키시마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하고 츠키시마는 물었다. 히나타는 한숨을 쉬었다.


"섭정은 지금 자기 자신과 나라를 함께 걸고 도박을 하고 있잖아."

"...."

"나는 그렇게 못해."


카게야마를 좋아하지만, 버거운 감정과 마주치는 것은 힘들었다. 히나타는 이곳이 자신의 무대가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다. 츠키시마는 그런 히나타를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첫사랑이 끝나가는 건 어쨌거나 슬픈 일이었다.


"..시간은 좀 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그럼.."

"단패궁에 알리는 것만 빼고."


츠키시마의 말에 히나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북궁은 호감도 70을 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레점을 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는 미온적인 입장을 유지합니다. 



카게야마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상궁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자신의 앞에 놓인 상을 쳐다보았다. 호박과 쌀가루를 섞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떡은 정말로 먹음직스러워보였다. 며칠 전부터 그는 이 떡이 먹고 싶었다. 


"..맛있겠다."

"전부 다 드셔도 됩니다."

"그래?"


막 만들어 뜨거운 떡을 들고 호호 불다가, 입을 벌려서 덥석덥석 베어먹는다. 목이 막힐 것 같아 상궁이 과일차를 가져왔다. 차가운 차를 기다렸다는 듯 마시고 카게야마는 다시 떡을 먹었다. 맛이 좋으십니까. 상궁이 묻자 카게야마의 고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맛있구나."

"천천히 드셔요."

"응.."


냠냠 먹던 카게야마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호박 먹는다고 해서 정말로 못생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


상궁을 쳐다보던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처럼 배부른 식사였다. 


*


호박떡을 다 먹은 카게야마는 괜히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배가 부를 때까지 먹어 조금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카게야마는 회임한 여인들의 몸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배가 잔뜩 불러 있었다. 밥을 많이 먹으면 더 빨리 튀어나올까? 모르는 것이 많은 그는 그저 떡을 더 많이 먹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마마."


차를 훌훌 들이키는 카게야마를 보며 상궁이 물었다.


"더 드시고 싶으신 것은 없으십니까."

"음...."

"무엇이라도 좋으니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어째서?"

"아기님께서 그것이 드시고 싶다고 마마님께 신호를 보내는 것이랍니다."


카게야마는 깜짝 놀라 상궁을 쳐다보았다.


"내가 다 먹었는데 괜찮을까?"

"마마께서 잘 드셨으니 아기님께도 잘 드셨을 거예요."


상궁은 쿡쿡 웃으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1~3 : 산책

4~6 : 바느질

7~9 : 선물 (남궁, 북궁)

0 :



카게야마는 어깨를 주무르는 상궁의 손길에 금방 꾸벅꾸벅 졸았다. 잠이 많아진 딸같은 주인에게 상궁은 침상으로 올라가길 권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자면서도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었다. 상궁은 대신 자리에 편히 기대어 잠든 카게야마를 살펴본 후, 제 할일을 하러 나갔다.


"....."


꿈도 꾸지 않는 달콤한 낮잠이었다. 기분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졸고 있던 카게야마는 



홀 : 어디서 소리가 

짝 :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잠결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으나, 곧 조용했다.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다지 시간은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두리번두리번거리던 카게야마는 문을 열고 나왔다. 궁녀들이 재빨리 카게야마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걷고 싶어서 나왔다는 말에 궁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카게야마는 손을 내저었다.


"따라오지 말거라."

"마마. 하지만.."

"어디 다른 궁을 가는 것도 아니고, 요 앞이나 걸을 것이다."


궁녀들은 완강한 카게야마의 말에도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하기야 자신 때문에 상궁에게 나중에 혼난다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러면 몇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어린 궁녀 한 명이 카게야마의 뒤를 졸졸 붙었다가, 카게야마가 쳐다보면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카게야마는



홀 : 소리가 궁금하다 

짝 : 심심하다



소리가 들린 쪽은 어디였지. 눈을 감고 떠올려보려고 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제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야채를 잘라 지지고 볶는 소리, 맛있는 지 간을 보라 권유하는 목소리. 온갖 색의 옷감이 바스락거리며 펼쳐졌다. 아마 카게야마의 새 옷을 짓는 중일 것이다. 몰래 만난 궁녀와 시위가 재잘재잘 떠든다. 사랑을 고백하는 소리에 궁녀가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 대화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조용한 발자국들. 조용한 숨소리들. 언제나와 같은..


조용한.


틱,

틱,

돌이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화르륵, 공기가 울렁거린다. 불이 붙는 소리였다. 카게야마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궁 쪽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서 있던 주인 뒤에서 딴 짓을 하던 궁녀도 그를 따라 움찔했다.


"마마?"

"지, 금...?"


당황한 카게야마를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1 : 쿠니미 아키라 

2 : 우시지마 와카토시

3 : 오이카와 토오루

4 : 이와이즈미 하지메

5 : 히나타 쇼요

6 : 츠키시마 케이

7 : 쿠로오 테츠로

8 : 코즈메 켄마 

9, 0 : 리레주 지정



"..카게야마."

"코즈, 메님."


카게야마는 눈을 부릅떴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코즈메가 카게야마를 다시 불렀다.


"카게야마. 무슨 일이야?"

"누군가.."

"응?"

"불..."


제 귀로 들은 것이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코즈메는 황망해보이는 카게야마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불이라니?"

"부싯돌 같은.. 누가..소리를 들었어요."

"카게야마."


코즈메는 얼른 눈 앞의 단패궁을 한 번 보았다.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카게야마의 뒤에 서 있는 궁녀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섭정궁에 가서, 섭정에게 단패궁에 화재가 났다고 말씀드려주겠어?"

"..! 화재라니.."


어린 궁녀는 주인과 코즈메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도 그녀는 뛰어갔다. 코즈메를 보며 카게야마 또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시위들을 불렀다. 


"궁 뒤편으로 가면 수상한 자가 있을 것이다.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시위들이 뛰어갔다. 온 몸의 땀구멍이 열린 것처럼 축축했다. 카게야마가 가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코즈메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


섭정이 서둘러 달려왔을 때는 이미 카게야마의 앞에 시위 한 명이 포박된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코즈메와 함께 있다가, 쿠니미를 발견하고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곁에 서있던 상궁은 눈물을 흘린 얼굴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카게야마를 부축했다.


"어찌 된 일이냐."


머리 위로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쿠니미의 목소리는 음산하여 마치 겨울밤같았다. 얼른 누군가가 대답했다. 


"이 자가 단패궁 마마의 처소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너는 누구지?"


쿠니미는 상궁과 코즈메 사이에서 카게야마가 안전한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 붙잡힌 시위에게 물었다. 시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부싯돌을 쥐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

"언제부터, 여기에."


전달부터 궁에서 일했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빠르게 대답했다. 진정이 된 카게야마는 떨고 있는 시위의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홀 : 막는다 

짝 : 막지 못한다



쿠니미는 재빨리 시위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혀를 끊으려던 시위는 발버둥을 쳤으나 곧 다시 제압당했다. 입에 천조각이 쑤셔넣어졌다. 처참한 광경에 다들 눈을 돌렸으나 카게야마는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어디서,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순간 시위의 눈이 마주쳤다. 핏발이 선 눈은 카게야마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얌전해진 줄로 알고 사람들의 구속이 느슨해지자, 시위는 다시 한 번 몸부림을 쳤다. 입에 물린 천조각을 뱉고 고함을 지르며 카게야마 쪽으로 엎어졌다. 사람들이 다시 달려왔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상궁이 카게야마를 가리기 전에 코즈메가 먼저 카게야마의 앞에 섰다. 


"아아악!!!!!!"


붙잡힌 시위는 울분이 섞인 비명을 질렀다.


"내 동생, 내 동생이 죽었단 말이다!"


카게야마는 눈을 크게 뜨고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악귀처럼 보였다.


"동생..불쌍한 내 동생이 이 궁에서 죽었다는데!!!"

"....."

"저것은 전쟁터로 나를 끌고가더니 겨우 살아오자마자 내 동생을 죽였다. 나는 너를 절대로, 절대로..!"


오사와의 첩자였던 궁녀가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악다구니를 쓰는 남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 머리속까지 울렸다.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살펴보고는 시위들에게 눈짓했다. 다시 천을 물리려고 하자 남자는 입을 다물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맞아도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단패궁께서는 들어가시는 쪽이 좋겠습니다."

"뭐?"

"어서."


쿠니미는 상궁을 보고 말했다. 상궁이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홀 : 싫어 

짝 : 카게야마, 들어가자



"싫어."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카게야마, 하고 카게야마를 부르려던 코즈메도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겠다."

"..!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네 동생을 죽인 적이 없다."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졌다가 얼굴만을 위로 치켜들었다. 머리가 터져 얼굴이 피범벅이 된 남자는, 흰 이만 드러내며 카게야마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쿠니미가 그의 앞을 막아서려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한 발자국 다가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어디서 무엇을 들었는지는 모르나, 네 동생은 내가 죽이지 않았어."

"거짓말!!!"

"내 욕심을 따라 원치않는 전쟁에 따라나선 화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네 동생의 일은 알지 못해."


폐하,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쿠니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호칭에 잠시 술렁거렸다.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카게야마는 남자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카게야마의 말을 듣고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거짓말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여인의 몸으로 사내라 속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나? 너는 계속 거짓말을..!"


쿠니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지켜보던 시위들이 다시 한 번 방망이를 올렸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남자의 입은 쉬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악!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


저 놈의 입을 막아라. 쿠니미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렇다고 사실이라면, 헉, 네 말대로 사실이라면, 그러면 나는 또 누구를..!"


누구를 원망해야...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카게야마가 외쳤다.


"그만 두거라!"


방망이가 멈췄다. 기절한 남자는 옥으로 끌려갔다.


*


카게야마는 꼼짝하지 못하고 자리에 서서, 그 남자가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쿠니미가 얼른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왔다. 서둘러 카게야마의 상태를 살피고 상궁에게 명했다.


"..단패궁께서 많이 놀라셨을 것이니 어서 모시고 들어가라."

"마마. 어서.."


눈앞에서 험한 장면을 본 상궁은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카게야마에게 매달리듯 잡았다.


"마마. 들어가셔요."

"그 궁녀의 오라비는 전쟁 통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돌아보았다. 섭정은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몰랐습니다."

"....정말로?"

"단패궁을 속여 무엇하겠습니까."


오사와 대신의 첩자였다는 건 알았잖아. 카게야마는 튀어나오려던 말을 꾹 참았다. 쿠니미는 자신이 궁녀를 죽이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믿어야하는 걸까. 쿠니미를. 서있던 코즈메가 조용히 말했다. 


"일단 카게야마는 쉬는 게 좋겠어."

"...예."


카게야마는 비로소 창백해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홀 : 반드시

짝 : ....



나를 속인 건 아니지? 하지만, 어디까지 알고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듣는 귀가 많았다. 그는 질문 대신 침묵으로 쿠니미에게서 등을 돌렸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의 등을 쳐다보았다.


"..내가 데려다 줄 게. 어서 가보는 게 좋겠어."


코즈메는 쿠니미에게 말했다. 그러자 쿠니미는 코즈메에게로 눈을 돌렸다. 코즈메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맹목적인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애써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얼굴이었다.


"단패궁의 호위를 재정비하고.. 심문도 해야하니, 어서 가보는 게 맞습니다."


그것은 이유를 들먹여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말처럼 들렸다. 



쿠니미 아키라

○: 83 

◇: 64

카게야마 토비오 

□: 70 (-1)



쿠니미는 돌아갔다. 코즈메는 카게야마와 함께 단패궁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제대로 불이 붙기 직전이어서 궁에 피해는 없었다. 코즈메는 놀라서 몸을 벌벌 떠는 상궁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괜찮아?"

"...코즈메님."


카게야마는 자리에 앉았다가 코즈메의 부름에 얼굴을 들었다. 멍한 눈동자였다. 이럴 때 말 잘하는 쿠로가 있으면 좋을 텐데. 코즈메는 괜히 안타까워졌다. 카게야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히 코즈메님께 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궁녀나, 전쟁 이야기가 나오던데. 아는 자였어?"

"아니오."


힘없이 부정하다가 다시 아니, 압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제 밑의 병사였다고 들었습니다."

"...."

"궁녀가 있었어요.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고 해서 저도.."


우물에 빠져죽었다는 그 궁녀는 갑자기 궁을 나가려고 했다고 들었다. ...오라비가 기적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가려고 했던 걸지도 모른다. 코즈메는 혼란스러워하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냐고 물었는데, 대답해주지 않았어."

"....."

"안 괜찮아 보여."

"코즈메님..."


카게야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속이 토할 것처럼 괴로웠다.



홀 : 그 남자 

짝 : 저는



"그 남자같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저는, 정말로 많은 원한을 샀어요."


당시에는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카게야마에게로 화살처럼 되돌아왔다. 적어도 그 화살을 피하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중얼거렸다. 


"...강해지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것만이.."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코즈메를 쳐다보았다. 코즈메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가, 느리게 입술이 열렸다.


"네가 말했잖아."

"....."

"궁녀를 죽인 적은 없다고 했어."

"....예."

"정말로 자연사한 게 아니라면, 누가 죽였는지 찾아내는 게 우선이야."


괴로워하는 카게야마에게 이 말이 도움이 될 지는 몰랐다. 그러나 코즈메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많은 원한을 샀다고 해서 네가 하지 않은 일까지 뒤집어쓸 필요는 없어."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코즈메의 손은 카게야마를 놓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카게야마에겐 위안이 됐다. 



코즈메 켄마

○: 56 (+3)

◇: 33

카게야마 토비오 

□: 57 (+3)



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필요한 전쟁도 있었으나, 굳이 하지 말아야할 전쟁들도 있었다. 제 아집을 꺾지 못한 왕은 쓸데없이 많은 사람을 죽게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목숨들은, 임신을 하고 나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이들에겐 보상을 해주었어요."

"....."

"저는 키타가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됐었고, 그래서.. 죽는다 해도 당연한 건 줄 알았습니다."

"...응."

"하지만 분명히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보상을 받았다고 해서 기쁘게 죽었진 않았겠죠."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어. 카게야마는 스스로 코즈메의 손을 꽉 쥐었다.


"저는.. 그런 걸 전부 기억해서, 전부.."

"...."

"...이 아이한테는 강해지는 법이 아닌, 남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게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자신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즈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분명히 잘 할 수 있을 거야."


굳었던 카게야마의 얼굴은 코즈메의 대답을 듣고서 서서히 풀렸다. 네, 저 꼭 코즈메님처럼 다정한 아이를 낳고 싶어요. 카게야마는 코즈메를 보며 조금 웃었다.


*


차를 마신 코즈메는 카게야마가 진정한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상궁은 한참 울적한 모습으로 카게야마의 곁을 지켰다. 보다못한 카게야마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마마. 앞으로 그런 위험한 일엔 다신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끼어들다니. 내 일이었는데."

"심장이 다 내려앉았습니다."


눈가를 훔치며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마마께 험한 일이 생기셨다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걱정했구나."

"당연합니다!"


상궁은 갑자기 또 서러워졌는지 큰 소리를 냈다가 입을 다물었다. 혼이 나는 아이처럼 카게야마는 깜짝 놀라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회임하신 분께서, 좋은 것만 보셔야하는데.. 좋은 것만 듣고 보셔도 모자랄 판에."

"...그.."

"제가 참으로 놀라서.. 놀라서.."


상궁이 가슴을 두드렸다. 카게야마는 멋쩍게 일어나서는 상궁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이고, 아이고. 카게야마가 달래주자 상궁은 눈물이 고인 눈가를 가렸다.


"많이 놀랐구나. 진정하거라."

"...제가 정말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상궁은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눈가를 훔치며 상궁은 카게야마를 도로 앉게 했다. 카게야마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런 카게야마를 보던 상궁은 한숨을 쉬고서 물었다.


"...호박떡 좀 더 드릴까요?"


상궁의 말에 카게야마는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18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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