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Q/카게른/폐왕의 밤

89. 3월 20일


1~9 : 궁 안 

0 : 궁 밖



1~4 : 동궁 

5~8 : 남궁

9~0 : 단패궁



우시지마는 미뤄두었던 시라부의 서신을 읽었다. 


굳이 키타가와로 우시지마가 갈 필요가 없다, 원하신다면 자신이 직접 가서 키타가와에게 여자를 줄 것을 요청하겠다며 끝까지 반대한 재상이었다. 우시지마가 빈 손으로 돌아오리란 염려에서 나온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충직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자신의 신하는 한 여인을 얻기 위해 우시지마가 직접 발을 옮겨야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했으리라. 우시지마는 고요한 눈으로 글을 훑어보았다.


폐하의 아이가 아니란 소식을 들었으니 이제는 돌아오십시오. 라고 제법 강경한 어조로 쓰인 서신은 마지막에는 우시지마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폐하. 제가 부족하여 폐하의 마음의 깊이를 미쳐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혼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드리지 않을 것이니 부디 용안을 뵙게 해주십시오. 몇 달이나 폐하를 뵙지 못하니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참 건방지군."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것이지. 우시지마는 피식 웃었다.


시라부의 서신을 다 읽은 우시지마는 도로 접어 집어넣었다. 재상은 돌아와달라고 말했으나, 우시지마는 아직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카게야마가 만들어준 주머니였다.


막연하게 서투를 거라고 생각한 솜씨였으나 보면 볼 수록 공을 들여 만든 티가 났다. 우시지마가 그렇게 보기를 원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주머니를 볼 때마다 조그만 손을 움직였을 카게야마가 생각난다. 행복이란 참으로 간단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우시지마는 금방 열살 소년이 된 것 마냥 기분이 들뜨는 것이다. 



홀 : 만약 

짝 : ....



그러나 만약,


카게야마가 자신을 떠올렸을 때 괴로워진다면..우시지마는 재상의 제안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는 이미 카게야마가 원하는 방향을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다면 카게야마가 원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우시지마가 알고 있는 여자는 어떻게든 제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왕이었다. 불명예스럽게 빼앗긴 자리를 돌려준다고 한다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섭정의 목숨을 앗아가서라도 제 명예를 되찾고 싶어할 사람인가? 우시지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쿠니미를, 쿠니미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쿠니미가 죽는 문제는 우시지마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카게야마만을 생각했다. 


"...."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자신을 선택하리란 자신감 또한 여전했다. 그러니 그는 쿠니미에게 찬성해 카게야마의 미움을 살 마음은 없었다. 우시지마는 



1~9 : 나중에 

0 : 당장



나중에, 그는 쿠니미에게 이런 자신의 뜻을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목적이 무엇이라도 카게야마를 슬프게 하는 일이라면 동의할 수 없었다. 우시지마는 궁녀에게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조금 더 늦을 것 같다는 말을 재상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동궁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또한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와 만났을 경우 쿠니미의 제안에 대해 알려줄 확률이 오릅니다.



카게야마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은 건 어린 카라스였다. 네코는 밤 늦도록 궁녀들 방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고, 카라스만이 바구니에 담겨 낑낑거리고 있었다.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자 아직 하얀 강아지는 기분 좋게 꼬리를 흔들었다. 짧은 꼬리 끝은 뭉툭했다. 손으로 덥석 잡자 끼잉 끼잉 길게 울었다.


"여기 만지면 싫어?"


다소 거칠게 만져도 강아지는 잠시 앓을 뿐 순하게 카게야마의 손등을 핥았다. 얼른 카라스를 안아든 카게야마는 마침 들어온 상궁을 향해 배를 보여주었다.


"이것 보거라. 나도 이렇게 배가 동그래질까?"

"아이고, 마마.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렇게.."


상궁은 덥석덥석 던지는 카게야마의 말투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1~3 : 산책

4~6 : 바느질 

7~9 : 남궁의 선물

0 :



우시지마님께 만들어드린 주머니는 반응이 좋았다. 카게야마는 강아지의 등을 긁어준 후 주머니들을 꺼냈다. 예쁜 색의 주머니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1. 쿠니미 아키라

2. 킨다이치 유타로

3. 오이카와 토오루

4. 이와이즈미 하지메

5. 히나타 쇼요 

6. 츠키시마 케이

7. 쿠로오 테츠로

8. 코즈메 켄마

9,0. 리레주 지정



히나타에게 카라스를 받았다. 헤어지기 전 자신도 무언가 주고 싶었다.


"...."


카게야마는 설핏 가슴에 떠오른 아쉬움을 억지로 눌렀다. 윤기가 도는 까만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카라스가 옆에서 우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 배고파? 상궁이 가져다준 우유를 입에 대주었으나 강아지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니 걱정된 카게야마는 번쩍 안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어디 아픈가..? 손에 든 걸 놓고 쓰다듬어주자 울음이 그쳤다. 카게야마는 조용해진 강아지를 보다가 핏 웃었다.


"안아달라고 그런 거였어? 어리광쟁이네."


따뜻한 체온이 좋은지 카라스는 카게야마의 무릎 위에서 얌전히 꼬물거렸다. 마치 히나타같았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조르고서, 쇼요님이라고 불러주면 기분 좋게 웃었다. .. 쇼요, 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 활짝 웃던 얼굴이 생각났다. 곧 그런 그와 헤어져야한다고 생각하니 카게야마는 가슴이 조여왔다. 히나타 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두도 역시 떠날 것이다.

  

많은 걸 받았으니, 섭섭함이 남지 않도록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카라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역시 해가 좋겠어. 히나타님은 늘 밝으신 분이시니까."


혹여 안색이 흐려지는 일이 있더라도 금방 웃을 수 있도록. 카게야마는 바늘을 들었다. 금빛의 실을 골라내고 있으면 무릎에서 카라스가 다시 만져달라는 듯 울었다.


*


광택이 흐르는 검은 주머니 가운데 금빛의 태양 문양이 자리를 잡았다. 제법 근사해보여 카게야마는 완성한 주머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식사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들어온 상궁은 카게야마의 주머니를 보고 또 한번 놀랐다. 


"마마께선 하시려고 마음먹으시면 정말 잘 하시는 군요."

"정말?"

"정말입니다. 어쩜 이렇게 솜씨가 느신 건지.."


다음에는 아기님 옷을 만드셔도 되겠어요. 상궁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카게야마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옷을 만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왜 그러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도와준다고?"


이상한 부분에서 귀가 얇아 금방 솔깃해하는 주인이었다. 상궁은 카게야마를 살살 꼬셨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마께서 아기님을 낳으시면, 제일 먼저 입으실 옷을 만드시는 거예요."

"음...."

"이렇게 금방 주머니도 만드시니 금방 하실 겁니다."

"...."


옷과 주머니는 큰 차이가 있었으나 카게야마는 상궁의 말에 이미 반쯤 넘어간 것 같았다. 그럼 한 번 생각해볼까..? 반들반들한 주머니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언젠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입혀준다면 더욱 좋을 지도 몰랐다.


지금껏 많은 나라를 쳐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을 죽여왔으나 그런 자신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킨다이치와 쿠니미조차도 말리지는 못한 채 뒤따를 뿐이었다. 모든 것은 왕의 이름 아래 정당했다. 그러나 그 중 후회할 일들은 분명 있었다. 카게야마는 조금은 익숙해진 바늘을 보았다. 똑같은 날카로움이라도 바늘은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옷을 만들어주면 아기가 기뻐할까?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카게야마는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마마님. 주머니를 북궁으로 보낼까요?"


생각에 잠긴 카게야마는 상궁의 말에 눈을 들었다.



홀 : 아니 

짝 : 응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


하루종일 만들던 주머니를 품에 넣는 카게야마를 보고서 순간 상궁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는 풀린 상궁의 얼굴을 보며 깔깔 웃었다.


"네 얼굴이 갑자기 맹꽁이처럼 변했구나."

"맹꽁이....."

"내가 직접 드릴 것이니 잠시 다녀오마."


놀림받은 상궁은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궁녀 한 명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선선한 저녁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맹꽁이는 너무 심했나?"


카게야마는 주머니를 품에 안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1~9 : 길 위 

0 : 북궁



궁녀가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북궁으로 가던 카게야마는 걸음을 멈췄다. 경쾌한 걸음이 들리다가, 저쪽에서도 카게야마를 발견했는지 잠시 멈칫한다.


"토비오!"


카게야마는 궁녀를 잠시 물러나게 했다. 히나타가 가까이 오자 그는 얼른 인사를 했다.


"어디 가시는 길이신가요?"


..쇼요님. 작게 덧붙인 이름을 듣고서 히나타는 빙긋 웃는 얼굴을 했다.


"그냥 심심해서. 토비오는?"

"쇼요,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요."

"나는 왜?"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궁금해했다. 화색이 도는 히나타에게 갑자기 초라한 물건을 내미는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꺼냈다.


"이것을.."

"....?"

"쇼요..님께 드리려고 만들었어요."


히나타가 말없이 주머니를 집어갔다. 카게야마는 급히 덧붙였다. 카라스도 주셨고, 또 다른 것들도 많이.. 잘 해주셨으니까.. 어쩐지 두번 째인데도 말하기가 힘들었다. 더듬거리면서 말한 후 고개를 들면 히나타는 주머니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토비오가 만든 거야?"

"예.."

"이 예쁜 게 내 꺼라고?"


히나타는 서둘러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 뭔가 잡힌다고 생각했는데, 말린 향이 들어있었다. 코에 가져가 흠뻑 냄새를 맡자 싱그러운 향기가 올라왔다. 카게야마가 얼른 설명했다.


"쇼요님, 성에 해가 들어가니까요. 그래서 해를 넣었고..향 주머니로 쓰셔도 되지만 다른 걸 넣으셔도 돼요."


주머니는 제가 안 만들어서 튼튼할 겁니다. 카게야마는 좋아하는 히나타에게 솔직히 말했다. 그래도 히나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한참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히나타가 물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 토비오가 나만 주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첫번째야?"

"...두번째..입니다."


설마 그런 게 문제가 되는 줄은 몰랐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눈치를 봤다. 히나타는 조금 실망한 얼굴이었다가도 주머니를 보고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그럼 나는 토비오의 주머니를 받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될거야."


정말 고마워!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을 덥석 잡고서 흔들었다. 즐거워보이는 얼굴이라, 카게야마도 무척 기뻤다. 



히나타 쇼요

○: 55 (+1)

◇: 30

카게야마 토비오 

□: 52 (+1)



"데려다줄게."


히나타가 손을 내밀었다. 히나타를 보러 북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보니 츠키시마의 것은 만들지 못했으니, 북궁에서 츠키시마를 만났다면 민망할 뻔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신이 난 히나타가 앞뒤로 손을 흔들었다.


"쇼요님. 키가 더 크신 것 같아요."


바로 옆에 서니 키가 큰 게 확연히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때보다 얼마나 더 자란 거지? 카게야마의 말에 히나타는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성장기인가봐. 무릎이 아파."

"그러면 데려다주지 않으셔도 돼요."

"고작해야 이 앞이니까 괜찮아. 많이 걸으면 더 많이 큰대."

"누가 그러던가요?"

"..음..."


히나타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오늘 날씨 좋다, 하고 말했다. 쇼요님은 저녁을 좋아하시는구나..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 자. 토비오."


단패궁의 앞에서야 히나타는 아쉽게 손을 놔주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다른 손에 주머니를 꽉 쥐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문은 열렸고,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먼저 보내려다가 포기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꿈 꿨으면 좋겠다."


문 밖에서 히나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카게야마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확실히 닿았다. 궁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정말로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20일 밤 끝




'HQ/카게른 > 폐왕의 밤' 카테고리의 다른 글

91. 3월 22일  (4) 2016.06.19
90. 3월 21일  (0) 2016.06.17
88. 3월 19일  (2) 2016.05.29
87. 3월 18일  (0) 2016.05.25
86. 3월 17일  (0) 201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