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궁 안
0 : 궁 밖
홀 : 남궁
짝 : 단패궁
0 :
코즈메는 근심에 찬 얼굴로 산쇼쿠를 만져주고 있었다. 코즈메의 품에서 고양이는 잠이 들었다. 쿠로오 또한 짐승의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깬다. 궁 안에 날벌레가 들어왔다. 콧등에 앉았다가, 쿠로오가 눈을 뜨니 서둘러 도망간다.
"...이것 참, 벌레나 잡으란 건가."
쿠로오는 몸을 쭉 늘어트리며 기지개를 폈다. 코즈메가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왜?"
"날벌레가 앉았어."
기분이 나빠진 쿠로오는 앞발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흡사 고양이가 세수하는 모습같기도 했다. 코즈메는 그 모습을 보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섭정과 만나고 난 후, 계속 그 모습이었잖아. 안 씻어서 벌레가 꼬였을지도."
"켄마. 몸치장은 제대로 하고 있었어."
억울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코즈메는 피식 웃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네코마의 두 명이 궁에서 나가지 않은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나고 있었다.
*
섭정이 말을 꺼내기 전 코즈메는 어렴풋하게 쿠니미의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고대의 법이었고, 코즈메가 알기론 실행된 적도 거의 없었다. 제가 죽은 후의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성국의 왕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즈메는 섭정이 실제로 말을 꺼내기까지, 제 추측이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쿠니미의 입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왔을 문장들이 쏟아지는 순간 코즈메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간 조심스럽게 관찰해온 섭정의, 쿠니미의 행동, 말 모두는 카게야마만을 향해 있었다.
코즈메의 생각에 그것은 몹시 끔찍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목숨만 내놓으면 되는 거야?"
드러누워있던 쿠로오가 불쑥 물었다. 코즈메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카게야마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증거도."
"유언장 같은 거? 그 정도는 미리 써놨겠군"
"아마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었다. 키타가와에 올 때는 이런 일에 엮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쿠로오는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거지."
"...."
"그를 죽게 두면 마마님이 슬퍼할까?"
쿠로오는 코즈메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코즈메를 제 곁에 둔 건 다름이 아니었다. 남을 파악할 줄 아는 섬세한 총명함은, 무재武才 같이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어도 귀중한 재능이었다. 혼자서 생각해보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쿠로오는 코즈메를 쳐다보았고, 보좌는 황좌의 일을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응."
"일단 이건 내 의견이지만, 나는 목숨을 버려가며 명예를 살려야만 하는 일에 동의를 못하겠어."
"넌 그렇지."
코즈메는 그 말을 한 후 조금 개운해진 표정으로 다시 대답했다.
"그리고, 아마 카게야마는 섭정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서 자리를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원망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으음..."
"나는 그의 측근인 장군과 함께 카게야마를 만난 적이 있어."
어느날의 아침, 코즈메는 카게야마를 보러 갔다가 킨다이치와 만난 적이 있었다.
"이름을 불렀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관계라면 섭정과도 다르지 않겠지."
"...반역자에게 그런 관용을 베푸는 건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까?"
"관용이 아니라 그저.. 우정처럼 보였어."
코즈메의 말을 쿠로오는 귀담아 들었다.
"그러면 섭정이 죽으면 마마님이 슬퍼한단 말이네."
"....."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북궁은 키타가와의 조각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실세인 섭정과의 관계에서 얻어낼 것이 있다면 북궁이 반대할 것 같진 않았다. 동궁은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를 좋아하는 티를 무척 냈으니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서궁은.. 코즈메는 조금 고개를 옆으로 떨어트렸다.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는 제일 손해를 보고 있어."
"....."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제 것인 키타가와를 두고 흥정하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게다가 여왕이 선다면 키타가와는 아오바죠사이과 가까운 섭정없이도 정치적인 자립이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이리저리 고민해보던 쿠로오는 한숨을 쉬었다.
"켄마. 서궁 쪽에서 카게야마를 골치아프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사실 아오바죠사이 쪽에서 제일 편한 건, 카게야마가 죽고 섭정이 계속 키타가와를 다스리는 거야."
그렇게 되면 키타가와는 카게야마의 핏줄 없이 영원히 아오바죠사이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그 '오이카와'가 그런 손쉬운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복잡하네. 쿠로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봐. 켄마."
"응."
"우리가 확 마마님 훔쳐가버릴까?"
"..뭐?"
쿠로오는 혀를 날름 내밀고는 재밌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제 이익 따지면서 머리 굴리고 있을때, 네코마로 데려와버리면 놀라겠지."
"..재미없어. 쿠로."
"에이, 한 번 생각해봐. 마마님 모시고 달아나버리면 재밌을걸."
정말로 즐겁게 웃다가도 황자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코즈메는 그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산쇼쿠를 안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남궁은 호감도 70을 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쿠니미 의견에 대한 동의/반대 레점을 치지 않았습니다.
네코는 불만족스럽게 캉캉 짖었다. 카게야마의 품에 안긴 카라스를 질투해서였다. 조용히 해. 카게야마가 달래보아도 계속 짖었다. 카라스는 겁을 먹고서 카게야마의 품안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왜 이렇게 못되게 굴어?"
카게야마의 물음에 상궁이 네코를 대신 안아올렸다.
"마마께서 그 놈만 예뻐하시니 그러시지요."
"아닌데..아까 같이 놀아줬어."
"마마의 애정이 모두 제게 왔는데 나눠 가지려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똑같이 좋아하는데?"
하는 수 없이 카게야마는 카라스를 바구니 안에 두고 네코를 안았다. 처음엔 삐진 것처럼 빠져나오려다가도 카게야마가 등을 쓰다듬어주자, 신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1~3 : 산책
4~6 : 바느질
7~9 : 선물(남궁)
0 :
바느질이란 건 한번 해보니 재미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이제는 능숙하게 주머니 중 하나를 꺼냈다. 수를 놓을 만한 문양들을 살펴보며 카게야마는
1. 쿠니미 아키라
2. 킨다이치 유타로
3. 오이카와 토오루
4. 이와이즈미 하지메
5. 츠키시마 케이
6. 쿠로오 테츠로
7. 코즈메 켄마
8,9,0 리레주 지정
"하지메님 것을 만들어볼까?"
카게야마는 지난 번 이와이즈미에게 자수를 들켰을 때를 생각했다. 부끄러운 실력이었다. 지금도 썩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는 주머니를 골랐다. 연한 푸른색 주머니에.. 검, 바위? 카게야마는 조금 고민해보았으나 어느 게 더 좋은 지 몰랐다.
"네코. 어느 걸 할까?"
카게야마는 검과 바위의 문양을 골라내어 네코의 앞에 가져다주었다. 바닥에 내려놓고 고르게 하니 네코는 신중하게 근처를 돌아다녔다. 갑자기 달려들 것처럼 몸을 웅크리다가, 네코는 왕, 하고 문양 위를 밟았다. 그러나 한 번에 두개를 밟아 무얼 선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두개 다 하란 말이야?"
카게야마는 양 손에 쥐고 고민했다. 결국 이와이즈미의 주머니는 앞뒤로 문양을 넣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크게 하품을 한 뒤 바늘을 집어들었다. 제법 익숙해져 이제는 속도조차 늘었다. 상궁은 곁에서 힐끔힐끔 지켜보다가 가끔 감탄사를 뱉었다. 마마, 정말 잘 하십니다. 많이 느셨어요.
"그래?"
"이와이즈미님이셔서 바위 문양을 넣으시는 건가요?"
검푸른 실을 주머니에 대보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어하실까?"
"마마께서 일부러 신경써서 만드신 건데 싫어하실 분이 누가 계시겠습니까."
"음..그래도.."
주머니를 받은 분들은 하나같이 다들 기뻐하셨다. 카게야마가 준 물건에 비해 과분한 칭찬들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아하는 얼굴을 보면 카게야마 역시 즐거웠다.
"마마께서 바느질을 즐겨하시니 옷도 금방 만드시겠습니다."
상궁은 한 번 카게야마를 떠보았다. 그러나 집중한 카게야마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바느질은 점심을 먹은 후에도 계속 되었다. 하루종일 주머니만 잡고 있는 주인이 걱정되어 상궁은 근처를 기웃거렸다. 놀아달라고 조르던 네코도 지쳐 잠들었고 카라스는 바구니 속에서 낑낑 울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피곤했으나 겨우 저녁을 먹기 전엔 완성할 수 있었다.
"...괜찮은데?"
카게야마는 세번째로 만든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주머니는
1~3 : 보기에 나쁘지 않다
4~6 : 시중에 파는 것 같은
7~9 : 장인의 솜씨
0 : 길이 남을 예술품
카게야마는 주머니를 훑어보았다. 궁녀들의 솜씨와 비교해도 크게 다른 것 같진 않았다. 잘하는 것 같은데..? 카게야마는 자화자찬을 하며 주머니를 만졌다. 양쪽으로 새겨진 문양이 까슬하게 손가락 끝에 닿았다.
바느질 솜씨가 늘어 카게야마는 이제 주머니를 만들 때 자신만만해집니다
아기의 옷까지는 몰라도 주머니 정도는 뚝닥뚝닥 만들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기쁜 마음으로 상궁에게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다 만들기 전에도 요란하게 칭찬하던 상궁은, 완성품을 확인하고선 박수까지 짝짝 치며 감탄했다.
"마마님은 천재세요. 어쩜 이렇게 금방 배우십니까."
"그렇지? 괜찮지?"
"멋진 주머니를 만드셨지만 시간이 늦으셨습니다. 궁녀 손에 서궁으로 보낼까요?
상궁은 주머니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
홀 : 아니야
짝 : 그럴까
하지메님, 하고 부르며 주머니를 건네고 싶었지만 늦은 밤에 찾아가면 오히려 폐가 될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상궁의 손에 든 주머니를 보았다.
"그럴까?"
"예, 그럼.."
"아니. 아니야."
카게야마는 다시 주머니를 가져왔다. 의아해하는 상궁을 보며 카게야마는 웃었다.
"서궁에 이와이즈미님의 것만 가져가면 좀 그러니까.. 오이카와님 것도 만든 후에 같이 드릴래."
"..! 좋은 생각이십니다."
어제 히나타에게 주머니를 주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북궁에 츠키시마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만약 북궁까지 가서 히나타에게만 주머니를 주었다면 많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상궁은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지 무척 흐뭇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후에 더 어른스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맞아. 바느질이 많이 늘었지?"
카게야마는 신이 나서 손을 보여주었다. 깨끗한 손에는 더이상 바늘자국이 없었다. 상궁은 설명하려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께서 참 많이 느셨어요."
상궁의 칭찬에 카게야마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꽤나 높았다.
*
저녁을 먹은 후 잠시 나가볼까 했으나, 상궁은 날이 어두우니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발을 헛딛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카게야마는 고분고분한 얼굴로 상궁의 말을 따랐다.
"아직 배는 안 튀어나왔어."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할 참이었다. 옷을 훌렁 벗은 카게야마는 배를 내밀어보았다. 한동안 입덧 때문에 죽만 먹어서 그런지 배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정말 다 먹어서 아기가 안 크는 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궁녀들이 깔깔 웃었다. 예, 마마께서 다 드셔서 아기님이 배를 곯으세요. 짓궂은 궁녀의 이야기에 카게야마는 퍽 걱정이 됐다.
"내일부턴 더 많이 먹을래."
"그럼요. 잘 드시고 잘 주무셔야 아기님도 무럭무럭 크신답니다."
목욕통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끼얹으면 나른해져서 잠이 왔다. 물 속에서 꾸벅꾸벅 조는 카게야마를 두고서 궁녀들은 서로 눈짓을 했다. 매번 보아오던 몸이나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머리는 조금 더 길고, 가슴은 봉긋하게 부풀어올라 여인의 태가 났다. 하얀 가슴이 물 위에 반쯤 잠겨 떠있는 걸 보며 궁녀들은 예쁜 가슴이라고 속닥거렸다.
"얼른 마마를 보살펴드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평소보다 조금 긴 목욕에 상궁이 들어왔다. 궁녀들은 서둘러 제 자리로 돌아갔고,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통 속에서 그는 하품을 했다.
"졸려.."
"마마. 옷 입혀드릴게요."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나온 카게야마는 물기를 닦고 자리옷을 입었다. 하루종일 바느질을 하느라 피곤했던 눈은 옷을 입혀줄 때까지도 계속 감겨있었다. 상궁은 카게야마를 침상으로 모셨다. 자리에 눕자 그대로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마마. 편히 쉬세요."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준 상궁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새근새근거리는 카게야마의 숨소리만이 단패궁 안을 채웠다.
21일 밤 끝
'HQ/카게른 > 폐왕의 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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