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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92. 3월 23일



오사와의 아버지는 딱, 가진 욕심만큼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그저 아버지가 좋았다. 왕자 전하의 곁이 될 사람은 너 뿐이란다. 나는 왕의 장인어른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는 사탕을 주었다. 그래서 어린 사야코는 사탕을 먹는 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왕자를 생각했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여 안 계시지만 아버지는 늘 사야코에게 친절하시고, 무엇이든 사야코의 손에 안겨주었다. 오사와 사야코는 단 사탕을 핥으며 그것이 아버지의 정이라고 여겼다. 


사탕이 단 줄은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야코에게 사탕을 주는 사람을 조심하란 말은 해준적이 없었다. 길을 잃은 사야코가 괴한에게 끌려가 삼일만에 발견되었을 때는 누구 하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고 들었다. 사야코는 그 날의 일은 몰랐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기만 하다가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죽음 끝에서 살아돌아온 대신 사야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고, 그 이후로 아버지는 사탕을 주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


몸이 아파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손을 뻗으면 그 손을 매섭게 뿌리친다.


"아들로 태어나지도 못하여 가문을 이을 수도 없고 나이가 들어 오직 얻은 건 네년뿐이라, 내 복은 여기까지인가보다."


사야코는 아버지의 폭언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 사야코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집안에서 사라졌다. 폭언을 이해하게 될 나이가 되었을 땐 그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깨달았다. 입막음을 당해 죽었을까. 아니면 먼 곳으로 보내졌을까. 나를 살려준 사람들인데.. 싸늘한 아버지에게 물어볼 순 없었다. 누구 하나 상대해주는 사람없이 유령처럼 떠돌며 사야코는 혼자 사탕을 빨아먹었다. 사탕을 먹으면 얼굴을 모르는 왕자 전하의 생각이 났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이곳에서 구해주길 바랐다. 


오사와 사야코는 자식이 없는 오사와 타카히로의 유일한 도구였다. 그러니 더욱 누군지도 모르는 무뢰배에게 더럽혀진 여식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을 볼 때마다 눈앞에서 오물을 맞는 기분이었겠지. 


아오바죠사이로 가신 왕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조금 더 컸을 때는, 사야코는 차라리 왕자와 이뤄지지 못할 몸인게 기뻤다. 왕의 장인이 된다면 아버지는 분명 무리한 요구를 할 게 분명했다. 그게 권력이거나, 명예거나,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어도 아버지는 게걸스럽게 가지려 들 것이다. 오사와 사야코는 아버지를 거역하지는 못했기에 차라리 왕자와 만나지 못하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사와 타카히로는 끝까지 사야코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를 못 나아도 좋으니 궁에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니 사야코는 끝까지 버텼으나, 결국 치장을 하고 왕자를 만나러 궁에 들어갔다.


왕자 전하를, 만났다.


사야코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었다. 사냥터에서 막 돌아온 왕자는 털을 댄 가죽조끼를 입고서 손엔 오사와가 지기도 버거운 큰 활을 들고 있었다. 킨다이치, 오늘도 내가 더 많이 잡았지?  곁에 선 남자의 등을 친다. 왕이 될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사야코는 고개를 숙여야한다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왕자를 쳐다봤다. 궁녀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사야코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눈이 마주쳤다. 깨끗한 남청색의 눈동자.. 사야코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변성기가 오지 않아 맑은 목소리로 왕자는 사야코에게 말했다. 천천히 눈을 들자 다시 한 번 그 깨끗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일부러 와줘서 고맙군."


홀린듯 왕자를 보고 있으면 왕자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 아닙니다. 전하."


오사와 사야코는 아래로 눈을 내리 깔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려 도무지 다시 눈을 볼 수 없었다. 왕자의 모습은 상상보다 더욱 근사했고, 아름다웠으며,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의 곁에 있고 싶을 정도였다.


사야코는 왕자를 보고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설 용기가 생겼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내린 첫 결정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물리게 한 후 오사와 사야코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야할 자신의 흠에 대해 말했다. 카게야마는 사야코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래도 사야코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것이 참 기뻤다. 정말로 기뻤다.


왕자가 실은 자신과 같은 여인이란 걸 알았을 땐 혼례 이야기가 나올 쯤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 궁을 자주 찾자 신경 쓰는 시늉이라도 하던 오사와는 사야코를 이번에야말로 무시했다. 처음에는 속았다는 생각에 화도 났으나, 의지할 것은 결국 왕자 뿐이었다. 단패궁에 들어간 왕자는 어색한 여인의 옷을 입고 사야코를 맞이했다. 


보면 반드시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였냐고, 그래서 자신을 받아들인거냐고 추궁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야코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모든 감정이 이상하게도 녹아서 씻겨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왕자와 자신 사이엔 어떤 죄책감도 의무도 없었다. 오직 사야코와, 카게야마만이...


"사야코."


...사야코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킨다이치의 아들놈이 제법 추격이 매섭구나. 이곳도 오래 있진 못할테니 짐을 챙기거라."

"...."


오사와는 피곤한 표정을 하고서 사야코를 힐끔 보고는 다시 방을 나갔다. 사야코는 조용해진 방 안에서 홀로, 무릎을 세워 얼굴을 숙였다. 어릴 때는 곧잘 이렇게 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떤 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아 그저 깜깜한 세계가 사야코의 다리 사이에 있었다. 그 세계에서 사야코는 중얼거렸다. 


"죽어야 했는데.."


도망치려던 사야코를 억지로 데려온 아버지는 딱히 딸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써먹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릴 때부터 키워온 도구가 제멋대로 구는 게 싫었을 수도 있다. 죽어야 했다. 이렇게 살바엔 정말로 죽는 게 나아. 끔찍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사야코는 곰곰이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폐하. 말씀하신 서신은 보내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17일부터 22일까지, 궁 밖의 선택지를 한 번도 잡지 못했으므로 오사와 사야코는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궁 안 : 1~9  

궁 밖 : 0


홀 : 단패궁

짝 :



아침을 먹은 카게야마는 상궁에게 혹시 자신의 앞으로 서신이 온 건 없는지 물었다. 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마마께서 기다리는 소식이 있으신가 봅니다."

"...딱히..혹시 출정 나간 장군의 소식을 아는 게 있느냐."

"얼마전 국경의 끝까지 가셨단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와, 또 혼자 도망치겠다고 말하던 한 여인을 떠올렸다. 근심하는 얼굴이 된 주인에게 상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장군께서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홀 : 한 번 

짝 : 직접


한 번 가서 물어볼까? 쿠니미한테나... 카게야마는 아침을 먹으며 내내 킨다이치와 사야코의 생각을 했다. 오사와 타카히로를 잡으러 출정을 하였으니 어쩌면 사야코의 소식도 쿠니미에게 닿았을 지 몰랐다.


오늘따라 조용한 카게야마에게 상궁이 물었다.


"마마. 오전엔 자수를 놓으시겠습니까."

"...아니. 오늘은 밖에 나가봐야겠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고 있던 네코가 벌떡 일어났으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귀를 펄럭이던 강아지는 주인이 손짓하자 풀썩 다시 주저앉았다.


카게야마는 궁녀들과 함께 후원을 걸었다. 서두르지 않고 걷다 보면 나비들이 날아와 화초가 자란 길을 맴돌았다. 그는 꽃 위에 앉은 나비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슬그머니 다가가 꽃잎을 건드리면 놀라서 달아나버린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나비는 어디에 많을까?"

"지나가다 보니, 물가에 꽃이 많이 피어 연못 근처에서 훨훨 날덥니다."


연못? 카게야마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섭정궁을 가는 걸 선택한다.


"나비야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섭정 또한 어디에 가지 않고 카게야마를 저 궁 안에서 기다릴 것이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믿었다.


섭정궁에 도착하면 


홀 : 쿠니미 

짝 : 아무도 없는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궁 안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짝 비틀거리는 쿠니미를 보며 카게야마는 인상을 썼다. 


"제대로 치료를 안 받고 있구나."

"여기엔 어쩐 일로."


카게야마.. 행복한 듯 이름을 부르는 얼굴은 무척 기뻐보였다. 미심쩍은 일도 있고, 또 궁금한 것도 있고.. 카게야마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쿠니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쿠니미의 눈은 계속 따라와 이마 쪽이 근질근질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카게야마가 툭 묻자 쿠니미는 빙긋 웃었다.


"네가 온게 기뻐서."

"...그러지 좀 마. 징그러워."



1~3 : 며칠 전에

4~6 : 혹시

7~9 : 킨다이치는 

0 : 그건 뭐야?



그러고보니 오늘은 쿠니미가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젯밤 묘한 소문을 들었던 카게야마로서는 그걸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궁의 사람들은 카게야마를 모욕하기 위해 쿠니미가 폐하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눈앞의 자신을 두고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였다. 카게야마는 다른 생각을 지웠다.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킨다이치의 소식이 궁금해서 왔어."

"킨다이치?"

"그래. 꼬박 일주일을 아무 소식도 없이.."

"너는 반년이나 궁을 나가있곤 했잖아. 내게 답장도 보내주지 않고."


쿠니미는 뜬금없이 투덜거렸다.


"내가 그랬나?"

"기억 못하는 구나."

"...나는 안 다치니까 괜찮아."

"그럴 리가."


섭정은 한숨을 쉬는 것 처럼 대꾸하곤 조심스럽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이 손에,"

"...."

"그리고 이 속에."


부드러운 손이 팔뚝을 쓸었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나 그 이상 쿠니미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는지, 내가 봤는데도 그래?"

"...죽지 않았으면 됐지."

"내 왕은 정말 내게 무심해."


쿠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킨다이치만 걱정하고."

"넌 킨다이치 걱정 안 돼?"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눈이었다. 


"킨다이치 걱정은 하지."

"..? 그럼 왜 그렇게 말해."

"그러게."


미지근한 대답이었다. 알쏭달쏭한 얼굴로 쿠니미를 보자 쿠니미의 손이 카게야마의 배를 문지른다. 아직 많이 튀어나오지 않은 배를,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쓰다듬던 쿠니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킨다이치는 괜찮아. 얼마 전에 내게 서신도 보내줬어."

"그래?"

"아직 오사와는 찾지 못했지만, 숨어있는 곳을 눈치챈 모양이더라고."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지?"



홀 : 다치면

짝 : 만약



"만약에,"


쿠니미는 물었다.


"만약에 말이야, 카게야마."

"응."

"킨다이치가 다치거나 죽으면 내가 킨다이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왜 그런 이야기를.."


카게야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1~3 : (기분이 안 좋음) 

4~6 : 내가

7~9 : 누구도

0 : 너는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의 죽음을 말하는 쿠니미에게 속이 상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도, 배를 쓰다듬는 손도.. 간절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킨다이치가 죽으면 아무도 대신할 수 없을 거야."

"...."

"킨다이치는 킨다이치니까. 너는 너고."

"...."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그 대답을 들으며 쿠니미는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카게야마의 화난 기색에 쿠니미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 나는.."

"...."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실상 그가 물어보고 싶었던 건 자신의 이야기였다. 카게야마. 내가 죽으면 킨다이치가 너를 버틸 수 있게 해주겠지? 하지만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킨다이치만의 경우일까, 아니면 자신 또한 그렇게 생각해줄까. 물어보지 않고는 카게야마의 입에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쿠니미는 그걸 확인하는 것이 겁이 났다.


"..맞아. 나는 킨다이치를 대신할 수 없을 거야."


기쁘게 맞아준 쿠니미와의 대화는 점점 엇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즐거웠는데, 또 엇나가버린 건 자신의 탓일까 아니면 쿠니미의 탓일까. 킨다이치의 탓인가? 카게야마는 답답한 마음에 차만 들이켰다. 쿠니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했다.


"쿠니미."

"응."

"걱정이 있어?"

"...."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카게야마는 진지한 얼굴로 쿠니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왕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지만 내가 혹시 들어줄 수 있다면.."

"네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카게야마."


황급히 카게야마의 말을 자른 쿠니미는



홀 : 너의 

짝 : 아무것도



"...너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알기는 해?"

"잘못했어."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 서늘한 뺨이 손가락 등에 닿았다. 고분고분 사과하며 쿠니미는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카게야마가 물었다. 쿠니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응. 아무 일도 없어."



쿠니미 아키라

○: 83 (+1)

◇: 64 (+0)

카게야마 토비오 

□: 69 (+0)



킨다이치가 죽으면 아무도 대신할 수 없을 거야. 정말로 쿠니미가 묻고 싶은 건, 아니 듣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죽으면 킨다이치가 곁에 있어도 많이 슬플 거라고, 영원히 기억할 거라고 말해줄 수 있어? 그러나 애정을 확인하기엔 문득 두려워지는 것이다.


분명 그 말을 듣는다면, 나는 이 목숨이 이제와서 아까워지겠지.


다음에 또 온다면,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활이나, 강아지나,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떠난 빈 자리를 쳐다봤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있었다.


*


카게야마는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섭정궁을 나왔다. 그러고보니 쿠니미의 생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뭘 가지고 싶어할까."


왕이었을 땐 그저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을 궁에서 알아서 가져가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 없으니, 카게야마는 단패궁을 돌아오는 내내 쿠니미의 선물에 대해 생각했다. 뭘 주어야 기뻐할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패궁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카게야마는 상궁이 안색을 살피는 걸 알고서도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한참 카게야마의 눈치를 보던 상궁은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마마. 어디 편찮으십니까."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선물이라니..무슨 말씀이세요."


상궁은 눈을 깜박이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 전하의 탄신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섭정께서는 올해 연회는 열지 않기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번거롭고, 또..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카게야마의 재상일 때에는 꼬박꼬박 연회를 열어 카게야마가 오기를 고대했던 쿠니미였다. 카게야마는 상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럴 필요가 없단 거지..이상하네."



1~3 : 단패궁 

4~6 : 바느질

7~9 : 선물(남궁)

0 :



쿠니미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상궁은 아참,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내일 남궁에서 선물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선물..?"

"회임 축하 선물을 늦게 고르셨다덥니다. 오후에 마마께 시간이 되시는지 여쭈라고 하셨습니다."

"...주신다면 고맙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카게야마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일 뿐이었다. 회임 축하 선물? 그러고보니 다들 좋은 선물들을 주셨다. 남궁에서 또 선물을 주시다니.. 이미 많은 걸 받았는데도 또 받을 생각을 하자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대가 됐다.


"얼른 나도 주머니를 다 만들어야되는데."


카게야마는 쌓여있는 주머니를 힐끔 보곤 중얼거렸다.



홀 : 손님이 찾아왔다

짝 :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주머니에 자수를 놓던 카게야마는 크게 하품을 했다. 옆에 쪼그리고서 앉아있던 네코도 카게야마를 따라 하품했다. 카라스는 이미 자고 있었다. 강아지들에게 둘러싸인 카게야마는 느긋한 기분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홀 : 쿠니미의 생일 

짝 : 쿠니미와의 대화



쿠니미의 생일이 곧이었다. 연회는 열지 않는다고 해도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무언가 주고 싶었다. 선물을 받는 기쁨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요 몇달 사이, 그렇게나 많은 선물을 받았다. 모두가 다 기뻤으나 분명 받았을 때 더 좋았던 선물들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그런 선물을 주고 싶었다.


"..뭐가 있을까.."


카게야마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아, 깜짝 놀라 바늘을 떨어트리면 네코가 다가와 관심을 보였다.


"안 돼. 먹는 거 아니야."


간식을 줄였다는데..그래서 바늘을 먹어버릴 셈이야? 카게야마는 네코를 두고 돼지라고 놀렸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주인이 자신이 놀리는 건 알아들은 듯 했다. 네코는 카게야마의 놀림을 듣다가 삐져서 구석으로 가버렸다. 얼른 바늘을 주운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살폈다. 피가 동그랗게 고였다가 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입 안에 손가락을 넣자 비릿한 맛이 확 풍겼다. 


카게야마는 손을 옷에 슥슥 문질렀다. 상궁이 보면 기겁을 할 일이었으나, 그는 피가 멎은 걸 확인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석에 있는 네코를 안아올리면 고개는 돌린 채지만 꼬리는 흔들고 있었다. 넌 정말 알기 쉽구나. 카게야마는 혀를 차며 침상에 올라갔다. 어제 밤 늦게 잠을 잤는지 몸이 나른했다. 네코를 끌어안고 누운 카게야마는 상궁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1~3 : 선물은

4~6 : 킨다이치는 

7~9 : 왜

0 : 예전


하기야 번거로운 일이었다. 매년 같은 날에 사람들을 부르고, 인사를 하고.. 자신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귀족들에게도 말을 걸어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카게야마는 언젠가부터 제 생일에도 궁에 돌아오지 않았다. 작년의 생일 땐 쿠니미와 킨다이치가 간곡하게 부탁하였기에 키타가와로 돌아온 것이었다. 물론, 뒤로 꿍꿍이를 가졌다는 건 그땐 몰랐다. 그래도 자신의 친구들은 아마..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거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애써 무의식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반란을 떠올린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서 킨다이치를 생각했다. 킨다이치는 잘 있을까?

쿠니미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쿠니미의 말을 믿어야 했다. 


떠오르는 의심을 지워낸 카게야마는 



홀 : 좀 더 

짝 : .....



카게야마는 도망가려는 네코를 끌어안은 채 조금 더 생각했다. 정황을 보아 쿠니미와 킨다이치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에게 확실히 모든 걸 말해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다녀와서 전부 말할게.


킨다이치는 출정을 가기 전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한 번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뒤척거리던 카게야마는 벌떡 일어났다. 그 덕에 잠을 자던 카라스가 놀라서 깡, 짖으며 깼다.


*


카게야마는 재밌는 생각을 했다. 쿠니미는 연회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킨다이치가 오사와를 토벌하고 돌아오면 성대하게 연회를 해야할 것이다. 그때 늦은 생일을 축하해도 좋을 것 같았다. 선물도 그 날에 맞춰서 줄까? 쿠니미의 깜짝 놀란 얼굴을 떠올린 카게야마는 킥킥 웃었다.


"킨다이치..빨리 와.."


그는 크게 하품을 했다. 바구니 속에서 카라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짧게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카게야마는


1~9 : 상궁이 깨워서 일어났다

0 :



카게야마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저녁을 드시라는 말에도 고개를 저으며 잠을 자는 주인을, 상궁은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깨시면 꼭 저 부르세요. 마마. 드실 걸 챙겨드릴게요. 잠이 들기전 들린 상궁의 마지막 말은 다정한 속삭임이었다.



1~3 : 쿠니미 아키라 

4~6 : 우시지마 와카토시

7~9 : 이와이즈미 하지메

0 : 킨다이치 유타로



카게야마는 불현듯 눈을 떴다. 어두운 밤. 인기척에 얼른 고개를 돌리면 누군가 자리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림자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다. 카게야마는 그림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밤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갑자기.."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만약 쿠니미가 다시 온다면, 그때 자신은 어떻게 해주려고 했더라.. 오지말라고 말했을 텐데. 정말 말도 안 듣지. 카게야마는 억지로 잠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앉아있던 그림자가 다가왔다. 카게야마의 침상 바로 옆에 서면, 창 밖으로 비치는 달빛을 받으며 선 쿠니미가 보였다. 쿠니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웃었다.


"꽃병이 없네."

"...저리 가."

"나는 너한테 왔는데."


꽃이 폐하의 곁에 있지 못해 슬퍼하겠습니다. 그런 우습지도 않은 말을 쿠니미는 농담이라고 했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쿠니미의 그림자로 온통 가려 어둠이었다. 


"왜 온 거야."


카게야마는 팔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누워있는 얼굴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웠다. 쿠니미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있고 싶어서."

"....? 오늘도 얼굴 봤잖아."

"더 같이.. 있고 싶어."


쿠니미에겐 시간이 없었으나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의아하게 쿠니미를 훔쳐볼 뿐이었다.



홀 : 팔을 

짝 : 고개를



하루종일 쿠니미의 생각을 했다. 쿠니미의 생각만을 했다. 아침에 조금 껄끄럽게 헤어졌다고 해서 밤까지 매몰차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카게야마는 피곤했다. 그는 쿠니미 쪽으로 팔을 벌렸다.


"....."


쿠니미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카게야마가 말했다.


"뭐해.."

"....가라고 안 해?"

"같이 있고 싶다며어.. 나는 졸리니까.."


같이 자자. 카게야마는 팔을 좀 더 들어올렸다. 쿠니미는 다시 그대로 잠이 들 것 같은 얼굴의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팔을 뻗었던 카게야마는 어깨를 숙이고서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 걸까? 지난 밤에 찾아왔을 땐 이런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믿고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란 확신이라도 있어서? 전자라면 속상하겠지만 후자라면.. 쿠니미는 그걸 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카게야마가 누운 침상으로 올라왔다. 쿠니미가 올라오는 바람에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떴다.


"...추워.."

"이불 덮어줄게."


쿠니미는 얼른 자신의 다리에 깔린 이불을 덮어주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싸주니 여름인데도 카게야마는 이불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쿠니미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운 카게야마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카게야마."


불러보아도 대답은 없다. 쿠니미는 색색 잠든 카게야마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아이처럼 뜨거운 카게야마를 끌어안고서,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움찔거린다. 그래도 간지러워? 라고 속삭이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토비오.."


쿠니미는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고는 자신도 눈을 감았다. 봄이 되어 짧은 밤이 아까웠다.



23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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