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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94. 3월 25일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어린 카라스는 카게야마가 부스럭거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코는 어디에 갔지. 또 궁녀들 틈에 끼어서 자는 걸까. 배가 통통한 강아지가 잔뜩 먹고 엎어져 자는 걸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침상에서 일어난 카게야마는 옷이 끌리는 대로 놔두고서 창가로 다가갔다. 온 세상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후면 하늘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해가 금방 떠오를 테고, 구석구석 햇살을 받아 피어난 꽃과 나무가 향기로울 것이다. 카게야마는 창 밖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금방 사라질 차가운 새벽 공기가 비단처럼 카게야마의 몸을 감쌌다.


마음이 요동하는 건 새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카게야마는 차갑지 않은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


카게야마는 생각한다. 


그토록 강해지고 싶었던 이유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해져서 아무도 다치고 싶게 하지 않았다. 가장 강해진다면 누구도 자신에게, 킨다이치에게, 쿠니미에게. 쿠니미에게.. 카게야마는 불현듯, 한기를 느끼고 양손으로 몸을 감쌌다. 쿠니미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쿠니미를. 쿠니미. 쿠니미. 쿠니미. 


쿠니미 아키라.


하나의 이름만이 계속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날, 킨다이치는 계속 소리를 내어 울었고 카게야마는 멍하니 제 발밑의 핏물을 보았다. 엉망이 되어 병풍 뒤에 구겨져있던 쿠니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카게야마를 보았을 때. 그 때 무어라 했더라?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그 날의 일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이 텄다. 상궁이 주인을 깨우기 위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상궁이 문 밖에서 카게야마를 불렀다. 


*


쿠니미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선물을 아직까지도 고르지 못했다. 킨다이치가 오면 선물을 주어야지..그런데 킨다이치는 언제 오는 걸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킨다이치가 오늘 쿠니미의 생일인 걸 잊었을 리 없었다. 이번 달 말에나 온다고 했지.


"오늘은 아무런 연회도 없다고?"


카게야마의 물음에 상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께서는 조용히 넘기시길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대신 섭정궁에서 몇가지 음식을 보내셨어요. 마마께도 올리겠습니다."


궁녀들이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왔다. 모두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음식들 뿐이었다. 접시를 살핀 카게야마는 그것을 알고 빙긋 웃었다.


"생일인데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마마?"

"아무것도 아니다."


까닭을 모르는 상궁은 카게야마의 혼잣말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을 먹는 카게야마는 겉으론 태평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본다면 그 손이 떨리고 있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카게야마에 대해서 예민한 상궁 조차도 카게야마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소와 같은 카게야마는 점잖게 앉아 의원을 기다렸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상궁에게 물었다.


"섭정..께서는 오늘도 오시는 건가?"

"예."

"....."

"마마. 불편하시다면 걸음하지 말라고 섭정궁에 청을 드릴까요?"


상궁은 그제야 카게야마의 초조함을 알아차렸다.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홀 : 아니

짝 : 그래



카게야마는 또 생각했다. 이 아이가 만약 여아라면, 자신은 결코 진정할 수 없을 것이다. 쿠니미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쿠니미는 꼭 자신을 어떤 신을 부르는 목소리로 부르곤 했다. 자신도 모르게 약해진 모습이 쿠니미를 슬프게 할까봐 두려웠다. 카게야마는 짧게 끄덕였다.


"그래."


상궁은 근심하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가 곧 궁녀를 불렀다.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는 어서 섭정궁에 가보란 말이었다. 카게야마의 눈이 창가 근처로 갔다. 마침 궁녀가 문 밖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어제 본 섭정궁의 시위들과 함께 의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


쿠니미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려주었던 의원은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댔다. 일어나라고 하자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서 앞으로 다가온다. 극진한 공손함은 키타가와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르는 아이를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의원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단패궁 마마. 감히 제가 귀하신 몸을 살필 수 있도록.."

"그런 말 할 필요 없다. 어서."


의원은 카게야마의 재촉에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맥을 짚고서 눈을 감은 의원을, 카게야마는 내려다보았다. 자신도 따라서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간신히 카게야마는 버텼다. 


의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1~3 : 남아

4~6 : 여아

7~9 : 남아

0 :



"마마."


의원은 흠칫 놀라 손을 뗐다.


"단패궁 마마."

"...왜 그러느냐."

"경하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의원은 고개를 숙였다. 땅에 닿을 듯 이마를 찧는다.


"경사 중의 경사이니, 감히 떨려 제가,"


상궁이 풀썩 의원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카게야마는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긴장한 얼굴의 궁녀들 또한 상궁의 뒤에서 마마, 마마, 작게 감읍하고 있었다. 의원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이마를 멍하니 보는 카게야마에게 의원은 입을 열었다. 


"남녀 쌍아이옵니다."

"남녀 쌍아..?"


쌍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들어도 카게야마는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당연히 뱃속에 한 명의 아이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카게야마는, 계속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가 상궁을 쳐다보았다. 의원과 같이 무릎을 꿇었던 상궁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다가 카게야마의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와 감히도 손을 잡아준다. 몹시 뜨거운 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상궁을 쳐다보았다.


"마마."


눈은 우는데도 신기하게 기쁜 표정이었다. 카게야마는 멀뚱히 다른 손으로 상궁의 눈가를 닦아보았다. 손에 물기가 맺혔다...눈물이, 왜.


"마마. 마마 태 안에 남아와 여아가 함께 있으십니다."

"함께..?"

"그럼요, 장하십니다. 얼마나 장하신지.."


상궁이 소리를 죽이고 흐느꼈다. 카게야마는 눈물로 젖은 손을 배 위에 가져갔다. 두 명이나..? 그제야 몸에서 쭉 힘이 풀렸다. 배에서 손을 떨어트리자 상궁이 마마, 하고 얼른 감싸준다. 코 안쪽이 갑자기 뜨거워지더니 머릿속에서 후두둑 후두둑, 무언가가 떨어져나갔다. 입술을 삐죽삐죽하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 나가라고 해. 카게야마의 중얼거림에 서둘러 궁녀들이 나갔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감격하던 의원도 따라 나갔다. 카게야마는 상궁을 쳐다보았다.  


"다 나갔어?"


상궁이 카게야마에게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카게야마는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그만 소리를 내어 울었다. 



3월 25일. 단패궁의 카게야마, 남녀 쌍태로 길조가 나타나다



카게야마는 강해지고 싶었다. 강해지기로 했다.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던 친구들마저도 종래엔 잊어버린 채 목적을 잃은 활을 쏘았다. 전장에서 카게야마는 언제나 자신이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완벽히 강해질 수 있을 지를 몰라, 약한 카게야마는 도무지 안심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카게야마는 서서히 자신의 마음이 단단해짐을 느꼈다. 남아라면 잘 키워 키타가와의 왕이 되게 하고, 여아라면.. 여아라면, 몰래 쿠니미에게 부탁해 아이를 빼돌릴 것이라 마음먹었다. 자신은 끝까지 키타가와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 안의 아이는 달랐다. 억지로 남장을 하고서 거짓말을 해야했던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해줄 것이다.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그런 삶. 카게야마는 감격하기도 하고, 안심하기도 하여, 복잡한 마음이 텅 비어버릴 때까지 울었다. 그는 양 손을 배에 얹고서 더듬었다. 아직도 티가 잘 나지 않은 납작한 배 안에는 두 몫의 생명이 있었다.


너희들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어. 내가 도울거야. 카게야마는 새빨개진 코 끝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


카게야마가 원하지 않았기에 쿠니미는 단패궁에 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무시하고서라도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쿠니미는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된 것처럼 카게야마를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은 깊어지고 애틋함은 더해간다. 신기하게도 뱃속의 어둠은 카게야마를 볼 때마다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내가 가면 날 싫어하겠지.. 미움받는 게 두렵지 않았던 게 거짓말처럼, 쿠니미는 섭정궁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의원을 따라 갔던 시위들이 돌아왔다. 흥분한 얼굴이었다. 쿠니미는 침착하게 물었다. 


"마마께서는?"


운명은 쿠니미에게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쿠니미 또한 그것을 싫어하였다. 쿠니미의 가장 소중한 건 언제나 쿠니미 스스로가 움켜쥐어야 했다. 한 번도 쉽게 도운 적이 없기에 쿠니미는 자신이 택할 건 오직 카게야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위가 입을 열었다.


"단패궁 마마께서는."


그러니 쿠니미는 하늘에서 어떤 운명을 점지했다고 해도, 정해진 길을 걸어가 카게야마를 묶어둘 요량이었다. 하지만 시위는 쿠니미에게 달갑게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

"단패궁 마마께서 남녀 쌍아를 잉태하셨습니다."


쿠니미는 그 말을 듣고 놀라 그만 비틀거렸다. 시위 한 명이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는 몹시 당황하여 시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저 쿠니미가 기뻐하는 줄로만 아는 시위가 단패궁을 찾으시겠냐고 물었다.


신도, 

운명도,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든 선택지들이 실은 카게야마만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고 있다.

 

섭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혹감이 사라진 이후엔 순수한 환호가 가슴 속에서 빛처럼 퍼졌다. 쿠니미는 곧장 카게야마에게 달려갔다. 다리가 절뚝여도 상관하지 않았다.



쿠니미 아키라

○: 92 (+∞)

◇: 66

카게야마 토비오 

□: 75



카게야마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부은 눈을 뜨고 올려다보면 거기엔 쿠니미가 있었다. 쿠니미, 카게야마는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몰라 입을 달싹였다. 쿠니미는 앉아있는 카게야마에게 걸어오다가 인상을 썼다. 카게야마가 일어섰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쿠니미. 다리 아파?"

"카게야마."


헐떡이는 목소리,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옷자락엔 풀잎이 묻어 있었다. 아픈 다리를 문지르나 싶어니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다가와,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카게야마 토비오 

□: 75 (+3)



"카게야마."

"응."

"카게야마.."


신을 부르는 것 같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가련하게도 떨려오는 목소리.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안은 채 그 등을 꽉 쥐었다. 


"나는,"

"응.."

"너를 좋아해."



카게야마 토비오 

□: 78 (+3)



"알고 있어? 카게야마?"


쿠니미는 빨개진 눈을 한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응.."

"그리고 또 알아야 할 게 있어. 반드시 알아야 돼. 카게야마."


애가 타는 목소리가 변함이 없이 호소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응..."

"나만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카게야마 토비오 

□: 81 (+3)



"그게 내가 자랑할만한 유일한 거야. 카게야마."


쿠니미는 그의 신을 끌어안았다. 벅차올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쥐었다. 울어서 부은 눈으로 그는 쿠니미를 보며 웃었다.


"쌍둥이래. 신기하지."

"..흔한 일은 아니야. 너는 정말 대단해."

"나는 아이들을 낳으면 하고 싶어하는 걸 하게 해줄거야."


뿌듯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쿠니미는 행복하게 만들었다.


"쿠니미 너도 그럴거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너는?"


호응만 하는 쿠니미를 보고서 짐짓 카게야마가 미간을 찡그린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다가, 얼굴을 덮은 카게야마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내 뜻을 왜 물어. 네가 바라는 게 내 뜻인데."

"....뭐야.."

"나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마를 맞댄 쿠니미가 속삭였다. 


"나는 너만 볼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마음을 간질이는 속삭임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굴 빨개졌어, 쿠니미는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해졌잖아. 노을 때문이야."


뺨의 붉은 그림자는 온통 노을 때문이라며 핑계를 댔다. 카게야마는 붙은 이마를 떼어냈다. 아쉬운 얼굴로 쿠니미가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한 번 힐끔 거렸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한 번 쿠니미를 바라본다. 입술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카게야마가 말했다.


".....오늘 생일이었잖아."

"...아..."

"...선물 없는데.."

"괜찮아."

"....저녁..이라도 먹고 가?"


서투르게 권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쿠니미가 응, 하고 뒤늦게 대답했다.



25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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