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세찬 비는 아니었다. 부슬부슬한 비를 맞으며 킨다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굳게 닫힌 문 쪽으로 병사들이 몸을 옮겼다. 쾅! 쾅! 바닥에 쇠를 박은 나무기둥을 눕혀 문을 때리자 곧 문은 부서졌다. 나무조각들을 치우기도 전에 킨다이치가 훌쩍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조용했다. 또 늦었다.
카게야마는 잘 있을까. 쿠니미는... 킨다이치는 묵묵히 안을 살폈다.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병사들이 거칠게 창고에서 물건들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되어 반쯤 부서진 가마가 정원으로 꺼내졌다. 그것을 보았을 때, 제대로 관리가 되었던 장소같진 않았다.
"....."
킨다이치는 꼼꼼하게 방을 살폈다. 하지만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개의 방을 하나하나 뒤지던 킨다이치는 맨 마지막, 가장 작은 방에 도착했다. 문을 여는 순간 가장 눈에 띈 건
1~9 : 열린 서랍
0 : 핏자국
열려있는 서랍이었다. 마치 누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반쯤 열려있는 서랍으로 킨다이치는 다가갔다. 킨다이치는 오사와를 계속 쫓았고, 오사와는 그때마다 잽싸게도 도망을 갔다. 그러나 장군은 오사와가 자신이 닿을 만한 거리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완전히 서랍을 열었다.
"....?"
킨다이치는 서랍 속에 곱게 놓인 물건을 집어들었다.
"...이건.."
킨다이치의 눈에 보인 것은 삐뚤빼뚤 자수가 놓여진 주머니였다. 광택이 나는 고운 주머니와 어울리지 않게, 그림자 영影 자가 서툰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
오사와 사야코가 마지막으로 카게야마를 만났을 때, 몰래 바느질하던 것을 집어와 지금껏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 따위 킨다이치가 알 리 없었다. 없어졌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만한 물건을 고르면서도 사야코가 주머니만은 가져가고 싶어했다는 것 또한, 킨다이치는 몰랐다. 그러나 킨다이치는 사야코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들여다보던 그는 문득 주머니가 무척 따뜻하다는 걸 깨달았다. 속을 열어보자 쇠구슬이 하나 들어 있다. 킨다이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빨리.."
킨다이치는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빨리 다른 곳으로 가봐. 멀리 가지 못했다."
"예!"
"..가까워. 잡을 수 있다."
식지 않아 온기가 남은 구슬. 아마 화로에 넣었다가 도망칠 때 쯤 주머니에 넣어뒀을 것이다. 뜨거운 걸 어떻게 잡았을까.. 킨다이치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연약한 여자를 떠올렸다.
"..오사와 사야코."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장군님..당신이라면 저보다 더, 안전하게 폐하를 모실 수 있을텐데. 당돌하게 자신에게 묻던 오사와. 한 번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지 카게야마를 위해 이용하려고 했던 여자였다. 아마 그것을 알았을 터다. 그런데도 그런 일로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킨다이치는 구슬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장군은 서둘러 말 위에 올라탔다.
*
비가 내렸다. 사야코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며칠 간격으로 거처를 옮겼기에 행색은 보잘 것 없었다. 오사와 타카히로를 뒤따르는 사병들도 지친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사야코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끔찍한 시선들이 몸에 닿자 사야코는 흠칫 놀라, 그만 아버지의 곁으로 갔다. 타카히로는 그런 그녀의 공포를 다르게 받아들인 듯 했다.
"사야코."
타카히로가 그녀를 불렀다.
"걱정 마라. 다 수가 있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지루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우리에겐 유리한 것이다."
"....."
사야코는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으나 괜한 의심을 살까 두려워 꾹 참았다. 오사와 타카히로는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
"설마 내가 궁 안에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을까."
"....."
"아직 나는, 이 나는, 수가 많아."
이를 갈며 말하는 목소리는 말투와 다르게 몹시 흔들렸다. 약한 모습을 훔쳐보며 사야코는 한숨을 쉬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카게야마는 고민하고 있었다. 25일날의 일기를 적지 못했다. 26일 날에 적어도 되는 걸까? 카게야마가 비단책을 펼쳐놓고 고민하고 있자 상궁이 물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어제의 일을 적지 못했어."
"어제는 바쁘셨으니까요."
상궁은 흐뭇하게 웃었다. 쿠니미와 저녁을 먹은 카게야마는 결국 쿠니미에게 돌아가란 말을 하지 못했다. 쿠니미는 방긋방긋 카게야마를 보며 웃고만 있었다. 웃지 마, 하고 투덜거리면 응. 안 웃을게. 하고 미소를 지웠다. 정말 제 말대로만 하는 쿠니미가 카게야마는 신기했다.
"가라고 하지마."
밤이 늦었을 때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붙잡았다.
"어제 날 두고 네코마를 만나러 갔잖아."
"너를 두고..그런 게 아니야."
"가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쿠니미는 불쌍한 표정을 하고서 다시 말했다.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 눈이 안타까워 카게야마는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
카게야마와 같은 침상을 사용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랬다. 하지만 쿠니미는 아무도 모르면 되지 않냐는 식으로 상궁의 반대를 넘겼다. 섭정이 그렇게 나오니 상궁도 할 말이 없었다. 섭정 전하, 마마께서는 몸을 조심하셔야하니..염려가 된 상궁은 끝까지 쿠니미에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왠지 상궁이 쿠니미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곁에 앉아 뻔뻔히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
"일 보거라."
심히 걱정스럽단 얼굴로 상궁이 나가고,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이제 또 둘만 있네."
"그게 그렇게 좋아?"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는 쿠니미에게 카게야마가 물었다. 쿠니미는 순간 멈칫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 전 쿠니미는 얼른 입을 열었다.
"당연히 좋지."
너랑 단 둘이 있는 거..이걸 계속 바랐어.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딱 달라붙었으나 불편하지 않았다. 쿠니미의 품 속에서 카게야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홀 : 쿠니미
짝 : 혼자
1~3 : 눈
4~6 : 입
7~9 : 손
0 : 입술
간지러웠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 때문이었다. 머리, 많이 길었지. 비몽사몽간에도 카게야마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이거 확 잘라버렸어야했는데.. 이마를 잠깐 찡그린 카게야마는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계속 자고 싶었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머리카락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습기라곤 머금을 줄 모르는 단단한 머리카락은 카게야마의 눈썹 위를 찌르며 귀찮게 했다. 으응..카게야마는 짜증을 냈다. 순간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곁에 누가 있는 지 알아차렸다. 눈을 가늘게 뜨자 웃고 있는 쿠니미가 보였다. 결이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칭얼거렸다.
"뭐야.."
"부드러워."
"너 때문에 잠 깼어.."
"응."
"잘거야..."
"그래. 계속 자."
쿠니미는 순순히 자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시선은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손등으로 이마를 가렸다. 부끄러웠지만 쿠니미에게서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대신 카게야마는 눈을 닫은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쳐다보지 마."
"응."
"쳐다보고 있잖아."
"알겠어."
"진짜.."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타박하자 이마를 가리고 있던 손목이 잡혔다. 그대로 쿠니미는 제게로 끌고 가 손바닥 안에 입술을 대었다. 건조한 숨결이 느껴졌다. 나만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그렇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떠오르는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비오는 숲을 내달린 것 같은 심한 심장 박동을 느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쿠니미 아키라
○: 100
◇: 66
카게야마 토비오
□: 84 (+3)
하루종일이라도 있을 기세였던 쿠니미는, 아침 식사가 오자 마지막으로 카게야마의 뺨에 입을 맞추곤 나갔다. 해야할 일이 많겠지만 조금 아쉬웠다.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나간 곳을 바라보다가 뒤늦게야 일기를 생각했다.
"...어쩌지.."
카게야마는 비단책을 펼쳐두고 골똘히 생각했다. 네코가 공을 물고 왔다가 카게야마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처럼 양옆으로 고개를 흔드는 게 귀여웠다. 카게야마는 조금 웃고는 네코의 입에서 공을 빼앗았다.
"네코. 놀아줄까?"
꼬리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카게야마는 벽 쪽으로 공을 휙 던졌다. 네코가 신이 나 통통 튕기는 공을 따라 뛰어갔다. 바구니 속의 카라스 또한 흥미진진하게 네코와 공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몇 번을 더 그렇게 하자 이번엔 네코가 카게야마에게 물고 온 공을 빼앗기기 싫어했다. 손으로 공을 잡아당기니 그르릉 그르릉 운다. 카게야마는 네코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뭐야. 그럼 너 혼자 놀아."
섭섭해져서 잡은 공을 놔주니 네코는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강아지를 보낸 후 카게야마는 붓을 집었다. 뱃속의 아기들은 아직 글을 모르니 조금 늦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3월의 26일.
옷을 두 벌 지어야 한다. 퍽 번거롭게 되었다.
그것을 알리자 쿠니미가 기뻐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망설이다가 뒤를 이어 썼다.
어제는 쿠니미의 자랑거리를 들었다.
선물을 잘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
섭정궁에 도착한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쌍생아를 회임했음을 다른 궁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카게야마를 막아섰던 오사와 일당은 곧 잡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아이들은 무사히 자라 키타가와의 왕이 된다. 쿠니미가 바라던 일들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였다. 하나 밖엔 없었고, 쿠니미만이 할 수 있는.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던 쿠니미는 막 나가려던 궁녀를 불렀다.
"각 궁께 내일 모시겠다고도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내일, 내일이다. 더 이상 늦어졌다가는 차질이 생길 터였다. 며칠 후면 모두가 가버린다. 쿠니미는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카게야마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품에서 웃던 눈모양과,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들을 생각했다.
"....."
안돼. 쿠니미는 짧게 신음했다. 자꾸만 마음의 빈 틈으로 망설임이 차올랐다.
<동궁>
"폐하. 쌍생아라고 합니다."
시라토리자와의 재상 시라부 켄지로는 섭정궁에서 보낸 서신을 먼저 읽었다. 꼼꼼히 읽은 후 옅은 색의 머리 위로 극진하게 올린다. 우시지마는 시라부가 내민 서신을 힐끔 보곤 고개를 저었다. 읽을 필요는 없었다. 시라부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말했다.
"그리고 또한, 내일 사신들을 환영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도 써있었습니다."
"...그 일 때문이다."
"폐하께선 이미 결정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시라부."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시라토리자와의 재상이 얼굴을 들었다.
"나는 이 나라 섭정의 결정에 반대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좀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 지도 모른다."
"감히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이가 있다는 걸 신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너야말로 내 뜻을 거스르고서 직접 오지 않았느냐."
황제도 재상도 자리를 비운 나라를 두고 태연히 우시지마는 말했다. 시라부는 한숨을 쉬었다.
"영영 안 오실 것 같아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
"알고 있다."
"....저는 폐하께서 왜 키타가와의 왕녀에게 집착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건방진 말에도 우시지마는 그것을 허락한다는 듯 침묵했다. 고분고분하던 목소리가 순간 울컥하여 진심을 토해낸다.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손에 넣으시면 됩니다. 폐하."
"그럴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녀가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시지마는 그만 말하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젠장할. 고운 얼굴을 한 시라부는 속으로 얼굴 한 번 못 본 여자의 욕을 했다.
<서궁>
"지루하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단죽을 뻐끔뻐끔 피던 남자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며 장난삼아 이와이즈미 쪽으로 연기를 훅, 뱉는다. 매운 연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이와이즈미는 주먹을 올렸다. 그러자 잠깐, 잠깐만. 하고 몸을 뒤로 뺀다. 느슨해보이는 태도와 달리 옷매무새는 단단히 여며 목 안쪽의 속살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와 같이 오이카와의 호위를 맡고 있는 마츠카와 잇세이였다. 계속 짙어져가는 연기에 결국 오이카와가 먼저 투덜거렸다.
"맛층. 그거 그만 둬. 공기가 탁하잖아."
"뭐 어때."
"네가 내뱉은 숨으로 이 방이 더러워지는 게 싫다고."
"정말 둘 다 너무하는구만."
마츠카와는 단죽을 내렸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반대할거지?"
"이와쨩은 토비오쨩이 그렇게 걱정 돼?"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온 신경을 쏟는 친구에게 오이카와는 비꼬듯 물었다. 그러면 이와이즈미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반대하는 게 옳아. 오이카와."
"오이카와씨도 섭정쨩의 말을 따르는 게 싫긴 해."
쌍생아였다. 남아와 여아가 같은 배 안에 있으니 길조였다. 하지만 아오바죠사이로서는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섭정의 수작질이 마음에 걸려."
"무슨 수작질?"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아오바죠사이와 연을 끊고 다른 나라로 붙겠다더라."
"와..."
마츠카와는 기가 막힌 소리를 듣고서도 순수히 감탄했다.
"그래서 지금 고민하는 거냐?"
"음. 그런 것도 있고.."
오이카와는 미간을 찌푸렸다.
"토비오쨩이 바보같아서 귀여운 탓도 있고."
"...."
"좀 골려 주고 싶기도 하네."
쿠니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들을 모두 장난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저께라도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오이카와는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문득 험상궂은 이와이즈미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와쨩. 못생긴 얼굴 펴. 더 못생겨 보이잖아."
"반대해. 알겠어?"
"....."
오이카와는 생각에 잠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남궁>
네코마의 왕이 되는 이들은 대대로 변태變態의 능력을 가지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능력을 개화하는 이에게 왕좌를 주었다. 누가 왕이 될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때로는 후계자가 정해질 때마다 피바람이 불고는 했다. 각자 자신이 미는 이들이 왕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능은 축복이었으나 발현되기 전까지는 저주였다. 쿠로오 테츠로 또한 몇 번이나, 자신의 가신이 될 뻔한 이들에 의해 죽을 뻔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모두의 앞에서 흑표범으로 변했을 때 사람들은 뒤에서 중얼거렸다.
흑표범의 기질을 타고난 저 남자는 아마 자신에게 반기를 든 모든 이들을 없애버릴 것이 분명하다.
허나 쿠로오는 후계자가 된 이후에도 몇가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느긋하게 대했다. 자신이 발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은색 사자로 변한 배다른 동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제대로 앉아있어."
"켄마씨는 아직 주무시잖아요."
"아니, 사람으로 돌아오란 말이었는데."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사자는 드러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쿠로오는 은색 갈기를 벅벅 긁어주었다. 이 궁에 사자가 돌아다닌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쿠로씨."
눈을 잠시 돌린 사이에 제 모습으로 돌아온 하이바는, 길고 흰 손가락으로 다식을 집어먹으며 물었다.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세요?"
"일단 마마님은 축하해주고 가야겠지."
"저도 만나보고 싶어요."
이 나라의 왕녀는 남장을 하고 몇 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던데.. 하이바는 눈을 반짝였다. 애초에 먼 이국에서 온 여자의 배에서 나와 생김이 이질적인 리에프는 어미의 성을 물려받고 귀족의 대우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러므로 그는 대부분의 왕족들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쿠로오는 하이바를 물끄러미 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아마 마마님이 널 보면 좋아할걸."
"정말요?"
"응. 그런데 대신 사자로 있어야 돼."
"좋아요!"
하이바는 신이 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거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또다시 사자로 변하려는 하이바에게 쿠로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나한테 보여주려는 거야. 됐어."
"쿠로씨는 이 따뜻한 날씨에 차갑습니다."
"...그렇네."
쿠로오는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나라에 온 건 12월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3월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땐 정말 추운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이렇게 날씨가 풀렸다.
"...아쉽군."
"예?"
"아무것도 아니야."
"빨리 마마님? 보고 싶어요."
"내일이면 보게 되겠지."
쿠로오는 들뜬 하이바를 두고 보았다. 머릿속으론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혔으나, 결국은 카게야마를 떠올리게 된다. 마마님..내가 어떻게 해줄까? 쌍둥이를 가졌으니 섭정이 주장하는 여왕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러나 쿠로오는 그가 그만두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북궁>
"..! 카게야마가..!"
히나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서신을 읽었다. 이미 히나타에게 주기 전 먼저 읽은 츠키시마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태연한 얼굴을 잘도 하고 있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가 자신을 보는 것을 깨닫고 얼른 입을 열었다.
"내일 연회를 연다니,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같이 가세요."
히나타 또한 스가와라 쪽을 쳐다보았다.
"섭정도 형님을 모시고 싶다고 했는 걸요."
"더 이상 왕족도 사신도 아닌데 제가 끼어들 수는.."
스가와라는 두어번 더 거절했다가 결국 끈질긴 권유에 참석하겠노라고 말했다. 히나타는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서신을 읽었다. 카게야마의 배 안에 두 명이나 있다니...힘들지 않을까? 그는 입덧으로 고생하던 카게야마를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스가와라가 까닭을 물었다. 카게야마가 힘들 것이 걱정되어 그렇다고 하면 스가와라는 선선히 웃었다.
"히나타님께선 정말 그 분만을 생각하시는 군요."
"바보같네. 히나타. 쌍생아는 최선이야. 고작 그런 일로.."
"고작이라고 하지마! 카게야마가 힘들어 한단 말이야!"
츠키시마는 히나타의 타박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씩씩거리던 히나타가 역시 카게야마에게 섭정의 계획을 알려줘야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쯤, 스가와라는 츠키시마를 불렀다. 츠키시마는 히나타를 힐끔 보곤 스가와라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는 비가 왔으나 그쳐 오히려 햇살이 따가웠다. 눈앞의 정원수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히나타님께서는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찬성하거나 반대하겠죠."
츠키시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츠키시마를 보았다가, 다시 앞으로 눈을 돌렸다. 둘은 한참 말없이 정원을 구경했다. 침묵을 깬 건 이번엔 츠키시마의 쪽이었다.
"...아오바죠사이와 섭정은 무슨 말이 되어있었을 겁니다."
츠키시마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하는 걸 확인한 츠키시마는 계속 생각했던 말들을 이어갔다.
"협박할만한 위치가 아닌데도 그 자리를 도운 건 아오바죠사이였습니다."
"키타가와와 아오바죠사이는 긴밀히 묶여 있으니, 아마 키타가와의 소유권을 가지고 말을 꺼냈겠지요."
"예를 들면,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다른 나라와 손을 잡겠다거나.."
그러므로 츠키시마는 기다렸다. 그 손이 카라스노에게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섭정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애초에 협상을 할 마음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섭정이 바라는 것은 다음 대의 여왕보다는, 껍데기뿐이더라도 카게야마의 복권 쪽일 것이다. 츠키시마의 말이 끝나자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혼자 여러가지 생각을 하셨습니다."
"..저 바보가 계속 저 모양이니까요."
"그러면 묻겠습니다. 츠키시마님."
스가와라는 조금 안쓰럽다는 얼굴로 츠키시마를 쳐다보았다.
"마마께 따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츠키시마는 허를 찔린 눈으로 스가와라를 보았다. 솔직하게 애정을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남자는, 스가와라를 잠시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창백한 얼굴은 나뭇잎이 떨어진 호수처럼 고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글쎄."
츠키시마는 느리게 말했다.
"...기회가 된다면, 축하한다는 말은 하고 싶습니다."
"...."
"그 동안 별로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없기에."
이해관계만을 따지던 남자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
내일 연회가 있을 거란 소식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생일날에 하지.."
"성국의 사신들이 와있으니 그를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음.."
킨다이치가 왔을 때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카게야마는 하품을 했다.
홀 : 산책
짝 : 섭정궁
0 :
비가 온 것도 잠깐이어서 하늘은 씻겨나간 것처럼 맑았다. 이런 날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킨다이치가 언제쯤 올지 궁금했다.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네, 카게야마는 일부러 입밖으로 그렇게 말했다. 실은 그저 쿠니미를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어젯밤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
홀 : 궁녀들과
짝 : 몰래
간다고 미리 말을 해두는 게 좋겠지..? 아침에 바쁘게 나갔는데 불쑥 찾아가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모처럼 궁녀를 불러 섭정궁에 자신이 가겠다는 걸 전하게 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상궁이 조그맣게 웃었다. 카게야마가 돌아보자 얼른 고개를 숙였으나 카게야마의 물음이 더 빨랐다.
"왜?"
"아닙니다."
"내가 이상하게 말했나?"
"그것이 아니라.."
상궁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시 웃었다.
"마마께서 발걸음을 하시니 섭정 전하께서 당연히 기뻐하실 겁니다."
"....?.. 그렇겠지?"
"예. 그렇고 말구요."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도, 만나지 못한다는 선택지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없다. 섭정궁에 가겠노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카게야마는 나갈 채비를 했다. 상궁은 회임을 한 주인을 잘 모시도록 궁녀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카게야마의 방문이 쿠니미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카게야마에게 보여선 안 되는 물건들을 전부 치웁니다>
카게야마는 궁녀 두 명과 함께 단패궁을 나왔다. 그러며 카게야마는 궁에 쌓여있는 주머니들을 생각했다. 거의 다 만들었으니 하나씩 드리면 될 것이다. 가기 전엔 드려야할 텐데.. 길을 가던 카게야마의 귀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홀 : (인사)
짝 : ?
0 : 잘못 들었나보다
1. 우시지마 와카토시
2. 오이카와 토오루
3. 이와이즈미 하지메
4. 히나타 쇼요
5. 츠키시마 케이
6. 쿠로오 테츠로
7. 코즈메 켄마
8,9,0. 리레주 지정
ㄴ쿠로오
카게야마는 쿠로오와 마주쳤습니다
"쿠로오님."
카게야마는 오랜만에 만난 남자에게 서둘러 인사했다. 쿠로오 역시 살짝 놀란 눈으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마마님. 나와도 괜찮아?""
"예?"
"저번에 봤을 땐 입덧으로 고생하더니.."
쿠로오가 다가오자 궁녀들이 뒤로 물러섰다.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어깨를 잡으려다가, 곧 손을 떨어트렸다. 아이고 이것 참. 그는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축하가 먼저지. 마마님. 축하해."
"감사합니다."
이건 정말 진심이야. 쿠로오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덧붙였다. 즐거웠던 겨울은 지나가고 이제는 떠나야할 봄이 왔다. 겨울의 추위를 떠올리며 그는 이상하게도 그리움을 느꼈다.
"저도 정말 감사해요."
카게야마는 쿠로오를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님께서 주신 꽃들 덕에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준 꽃들이 전부 마마님 궁에 활짝 폈지?"
"예. 오늘도 보고 왔는 걸요."
단패궁 정원 안쪽에 하얗게 핀 화단에서는 좋은 향기가 바람을 타고 솔솔 흘러왔다.
홀 : 마마님은
짝 : 같이
"마마님은.."
쿠로오는 섭정의 계획따위는 모르고 있는 눈치의 카게야마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알려줘야할까. 섭정의 머리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건 눈앞에 서있는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카게야마에 대한 기만이었다.
"마마님은, 요즘 어때?"
"..? 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으음.."
카게야마는 무언가 망설이는 쿠로오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홀 : 혹시
짝 : ...?
그저께 오이카와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뭔가 자신에게 말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저 장난이라고 여겼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눈의 쿠로오에게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혹시 쿠로오님."
"응."
"제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해? 마마님?"
쿠로오는 빙글 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먼저 물었는데..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도 보면 압니다. 쿠로오님."
"정말?"
"예. 아무리 봐도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걸요."
"인사를 하고 같이 말을 나눈 지 몇달이 되어서야, 마마님이 이 쿠로오의 마음을 알아주네."
투명하고 푸른 눈동자가 태양 아래에서 온전히 쿠로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더는 피하기 힘들었다.
홀 : 사랑
짝 : 섭정
마마님. 내가 정말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차마 다 말해줄 순 없었다. 그래도 쿠로오는 그 순간 섭정보다는 카게야마를 먼저 생각했다. 미리 아는 것과 후에 알게되는 걸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 전자를 고를 것이다. 카게야마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쿠로오는 믿었다.
"섭정은."
쿠로오의 입에서 나온 건 뜬금없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마마님을 꽤나 아끼지?"
"...섭정....같이 이야기를 나눠보셨나요?"
쿠로오는 어리둥절해하는 카게야마를 보았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눈에 알겠더라고."
"..그런가요?"
"응. 마마님. 바로 알아볼 수 있었어."
그리고.. 쿠로오는 천천히 말했다. 가벼웠던 웃음은 더 이상 없었다.
"만약 마마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
"아마 그는 바로 마마님을 위해 움직일 것 같더라."
"....쿠로오님?"
쿠로오가 하는 이야기들을 카게야마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대화를 언젠가 했었다는 생각을 했다. 심각한 얼굴이던 쿠로오는 긴장한 카게야마의 어깨 위에 손을 툭 얹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카게야마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쿠로오를 쳐다봤다.
"...지금 쿠ㄴ, 섭정의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마마님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일걸. 그 남자는 어떤 걸 희생해서라도.."
쿠로오는 의아한 얼굴의 카게야마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어떤 희생이라도 마마님을 위해선 감수할 남자야. 내 눈엔 그렇게 보였어."
"......"
"...이 정도는 마마님도 알아두는 게 좋겠지."
내가 방금한 말 기억해줘야 돼. 쿠로오가 그렇게 말한 순간, 카게야마는 단박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스가와라는 쿠니미를 두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갑자기 만난 쿠로오 또한 쿠니미의 이야기를 하는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카게야마의 키워드가 맹목과 희생으로 늘었습니다. 쿠니미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합니다.
쿠로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까지 말해줬으니 아마 잘하면 뭔가를 알아차릴 지도 모른다. 섭정의 계획을 알아차린 카게야마가 그를 말려주길 바라는 것이 쿠로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섭정 때문에 며칠을 그저 허비해버린 것이 아까웠다. 그러나, 이미 단패궁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카게야마 또한 자신에겐 별다른 감정은 없을 게 분명했다. 쿠로오는 어느새 은근히 간절한 마음이 되어있는 자신을 깨닫곤 헛웃음을 지었다.
"마마님."
"예. 쿠로오님."
"나는 한 번도 추위를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마마님."
두서없는 말은 카게야마에게로 닿아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 좋았어."
"그러신가요?"
"응. 마마님 덕분이겠지."
그 말에 카게야마는 놀란 듯 눈을 떴다가 다시 쿠로오를 보며 웃었다.
"겨울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쿠로오님."
"아니,"
쿠로오는 입을 뗐으나 곧 다물었다. 어차피 헤어질 사람이다. 부담스러운 건 질색이었다.
"..그래. 좋아졌어. 다행이지."
곧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좋아할 수 있었으니 정말로 다행이었다. 쿠로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쿠로오 테츠로
○: 68 (+3)
◇: 43
카게야마 토비오
□: 68 (+3)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먼저 보냈다. 뒤돌아보진 않았으나 카게야마는 쿠로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보고 계신걸까. 카게야마는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쿠로오는 겨울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겨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겨울은 잊지 못할 것이다. 쿠로오에 대한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섭정궁이었다.
카게야마는 문 앞까지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쿠니미를 보았다. 쿠니미는 기쁜 얼굴을 하고서 카게야마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홀 : 킨다이치는
짝 : 쿠로오의
원래대로라면 그 손을 잡고서 킨다이치의 소식을 물으려 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말들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손을 잡는 대신 카게야마는 궁에 들어와 단 둘이 되자마자 물었다.
"쿠니미."
"응."
"오늘 이상한 말을 들었어."
"무슨.."
쿠니미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카게야마를 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이상한데도 카게야마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까"
홀 : 쿠니미
짝 : 희생
쿠니미는 카게야마가 입을 여는 순간 물었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봤어?"
"응?"
"두 명이잖아. 좋은 이름을 지어줘야지."
"..아.."
카게야마는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쿠니미는 흰 손을 뻗어 카게야마에게 책을 펼쳐 보여주었다. 성명학에 관한 책이었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 글자들이 빽빽하게 있었다.
"시간나면 한 번 읽어봐. 네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하면 좋겠어."
"내가 이름을 지을 수 있어? 나는..."
역사에서 지워진 왕이 그 다음 대의 왕이 될 아이의 이름을 지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카게야마가 의아하게 묻자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1~3 : 이름을 볼까
4~6 : ...??
7~9 : 그보다
0 : 왜 말을 돌려
이름을..볼까?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한자들은 많았지만 어느 걸 따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가 망설이는 사이 쿠니미는 말했다.
"토비오라는 이름, 원한다면 아이에게 물려줘도 되고."
"....그러면 여자아이에겐 아키라라고 할까?"
아키라는 여아에게도 남아에게도 모두 쓰이는 이름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카게야마의 말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이름은 별로야."
"....?"
"더 좋은 이름 많잖아. 한 번 봐."
쿠니미의 반응이 카게야마는
홀 : ...그럴까?
짝 : 이상해
0 : 너
그럴까.. 카게야마는 별 생각없이 책장을 뒤적거렸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지만, 굳이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넘겨도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카게야마는 곧 책을 다시 돌려주었다.
"잘 모르겠어."
"좋은 이름이 없어?"
"아니, 왠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다가도, 카게야마가 입을 열려고 하자 눈을 돌렸다.
"그럼 태명부터 지을까?"
"태명?"
아기님들이라고만 불리던 아이들에게 태명을 지어주잔 말은 처음 들었다. 네가 아기한테 말 걸 때 이름을 불러주면 좋을 거야. 쿠니미의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홀 : 그렇구나
짝 : 위화감을
0 : 너는?
...카게야마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쿠니미는 아까부터 카게야마의 이야기를 할 뿐 쿠니미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카게야마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의, 그런.
"왜?"
쿠니미는 입을 다문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몰라 카게야마는 망설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도 같이 생각할 수 있잖아."
"...."
"왜 너는.. 그러니까, 너는 왜,"
"...."
"없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말하면서도 말이 잘 전달됐는지 의심스러웠다. 쿠니미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돌려받은 책을 뒤적였다.
홀 : 그런 게 아니라
짝 : ....
쿠니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 역시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쿠로오의 말들이 다시 생각났다. 희생.. 무엇을 위한 희생?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자신을 희생할 남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도무지 쿠니미가 희생해야만할 일들을 생각할 수 없었다.
"쿠니미."
"...응."
"나한테 숨기는 일 있어?"
쿠니미는 숨을 흡, 들이켰다. 쿠니미 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카게야마에게 웃어보였다.
"...내가 너한테 숨기는 게 어디있어."
"...그렇지?"
"그래."
"....."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게 불확실해 카게야마는 제대로 쿠니미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결국 카게야마는 끙, 하는 소리를 내고는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나한테 거짓말하면 너 미워할 거야."
"....."
"...진짜 아무것도 없어?"
카게야마의 마지막 물음에 쿠니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미워하지 마."
카게야마는 그 대답 속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쿠니미가 왠지 바빠보여 카게야마는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다. 돌아가기 전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물었다.
"킨다이치의 소식은 없어?"
"응."
"언제 온대?"
대답 대신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뺨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카게야마가 피하지 않자 쿠니미는 생긋 웃었다.
"밤에 갈게."
"어디를.."
"오늘도 같이 자."
".....?"
싫어? 쿠니미가 묻자 카게야마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싫은 건 아니야."
"기다려줘."
"응."
"....예쁘다."
손가락들이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만졌다가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어 섭정궁을 나왔다.
쿠니미 아키라
○: 100
◇: 66 (+1)
카게야마 토비오
□: 87 (+1)
카게야마가 돌아왔을 때 못보던 시위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오늘부터 단패궁 소속이 되었다며 말한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럼 그 전에 있던 이들은?"
"마마. 그들 또한 함께 궁에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이 궁에만 몇 명의 시위들이 있는 거지?"
궁으로 둘러쌓여있는 단패궁에 지나치게 시위가 많았다. 그러고보니 그들 중 몇몇은 섭정궁을 드나들 때 본 것 같기도 했다.
"섭정,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냐."
"그러합니다."
회임을 하였으니 주변에 경계를 할거란 생각은 했으나 지나쳤다. 가뜩이나 킨다이치가 병사들을 끌고 나가 궁도 텅 비었을 텐데.. 카게야마는 잠시 궁을 둘러보았다가 들어왔다.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카게야마를 반겼다.
카라스는 이제 바구니를 빠져나와 꼼질꼼질 돌아다녔다. 네코는 그게 신기한지 카라스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카라스가 멈춰서면 제풀에 놀라 캉! 하고 짖었다. 조그만 강아지를 밟기라도 할까봐 카게야마는 얼른 네코를 품에 안았다. 제법 자란 네코는 그래도 카게야마의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마치 카라스에게 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홀 : 단패궁
짝 : 산책
0 :
카라스가 카게야마의 무릎 위에 있는 네코를 보며 끼잉끼잉 소리를 냈다. 카게야마를 향해 기어오듯이 다가오는 모습이 귀여워, 한 손으로 잡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네코는 조금 불만족스럽게 그르릉거리다가도 카게야마가 쓰다듬어주면 곧 조용해졌다. 귀여워. 카게야마는 아직도 부풀 생각이 없는 배 쪽으로 강아지들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네코가 카게야마의 배에 머리를 비볐다.
홀 : 손님이 찾아왔다
짝 :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카게야마는 자연스럽게 쿠니미를 생각했다. 스가와라의 조언, 쿠로오의 의미심장하던 말들.. 모두가 쿠니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진지하게 그것들을 떠올리려 할 때 상궁이 그를 불렀다.
"마마.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느 분께서.."
1. 우시지마 와카토시
2. 오이카와 토오루
3. 이와이즈미 하지메
4. 히나타 쇼요
5. 츠키시마 케이
6. 쿠로오 테츠로
7. 코즈메 켄마
8,9,0. 사신+스가와라
오이카와라는 말에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항상 동경해온 남자는 언제나 카게야마에겐 어려웠고,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었다. 카게야마가 어정쩡하게 일어나기도 전 오이카와가 방으로 들어왔다.
"토비오쨩."
"..오이카와님."
"오이카와씨가 온 게 마음에 안 드나보네."
오이카와는 며칠 전과 같이 또 굳어버린 카게야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표정을 숨길 줄도 잘 모르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을 어색한 얼굴로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럼 좀 더 반겨줄래?"
"...어떻게.."
"하, 됐어. 토비오쨩한테 그런 걸 기대하는 오이카와씨가 바보지."
들어오자마자 또다시 저를 놀리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물었다.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홀 : 뭐야
짝 : 흐음..
"뭐야."
오이카와는 털썩 자리에 앉고서, 여전히 서 있는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오이카와씨 얼굴도 보기 싫단 뜻이야?"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이카와님."
"그럼 그런 생각은 하고 있단 거지?"
".....오이카와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내심 짜증이 난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는 피식 웃었다. 그에게 카게야마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 속에 갇힌 재능을 아까워하고 사랑하는 만큼 가지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손에 닿을 듯 했으나 결국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오이카와는 잠시 이와이즈미처럼, 한 번쯤 카게야마에게 솔직해졌다면 어땠을 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와선 소용없는 일이었다.
"토비오쨩."
"예."
"오이카와씨 얼굴 봐."
"...."
카게야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오이카와의 눈이 가늘어졌다.
홀 : 저번에
짝 : 오이카와씨가
"오이카와씨가 싫어?"
"....아닙니다."
"망설였잖아. 방금."
"아니라구요. 정말..!"
카게야마는 갑작스런 오이카와의 질문에 당황했다가도 금방 발끈했다.
"늘 저를 놀리시잖아요."
"으응, 오이카와씨와 대화하는 게 싫단 뜻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오이카와님께서 그런 식으로.."
두서없이 왈칵 화를 내는 카게야마를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어릴 적과 달라진 게 없다. 그럼에도 오이카와는 그 때부터 줄곧 카게야마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목적은 같은데, 그 의미는 변했다. 오이카와는 잠시 가슴이 조이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서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왜..왜 그러십니까."
카게야마가 당황하여 물었다.
"토비오쨩."
"예."
"오이카와씨랑 같이 아오바죠사이로 갈래?"
가볍게 물어본 대답에 카게야마는
1~3 : 아니요
4~6 : 왜 그런 말을
7~9 : ....
0 : 가면
"..왜 그런 말을.."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오이카와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가벼운 질문 속엔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오이카와의 변덕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번 또한 그같은 변덕일 것이었으나, 카게야마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이카와씨는 지금 토비오쨩 때문에 골치가 아프거든."
"....?"
"섭정에게 개인적인 감정도 있다면 있겠고..이와쨩도 걸리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조금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심각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카게야마가 눈 앞에 있었다. 차라리, 카게야마를 없애버린다면 아오바죠사이로서는 괜찮은 결말이었다. 섭정은 원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키타가와는 아오바죠사이 아래로 계속 남을 것이며,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와 아오바죠사이로 돌아가 예전처럼 지내면 된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곤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을 따라했다. 오물거리는 입술로 시선이 갔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토비오쨩 때문이야."
"예?"
"토비오쨩이 전-부 나쁘니까."
"오이카와님!"
"..그래도 오이카와씨는 말이지."
오이카와는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카게야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카게야마 또한 긴장해 눈을 든다. 마주친 오이카와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키타가와에 와서 꽤 괜찮았어."
키타가와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빠른 방법은 카게야마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어쩌면 자신이 카게야마에게 정말로, 남다른 호감을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귀찮네. 토비오쨩 따위한테.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향해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 있는데.
"..오이카와님."
카게야마는 어딘지 모르게 마지막처럼 말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이카와님은 정말로..저는 잘 알 수 없는 분이지만."
"....."
"그래도 키타가와에 오셔서 괜찮으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조심조심 말을 고르는 모양이 우습고 귀여웠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뺨을 잡아당겼다.
"토비오쨩이 오이카와씨의 아기를 가졌다면 좀 더 좋았겠지만."
"ㅇ..그건.."
"됐어. 이미 그건 끝난 일이고."
오이카와의 흰 손이 말랑한 뺨을 쭉 늘어트렸다. 카게야마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조금 고였다. 오이카와는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웃었다.
"오이카와씨랑 헤어질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나보네?"
"오이카와님께서..아파요!"
"그래, 울어도 괜찮아요. 토비오쨩."
놀리는 목소리는 3월의 바람처럼 가벼웠다.
오이카와 토오루
○: 61 (+2)
◇: 43 (+1)
카게야마 토비오
□: 45 (+2)
끝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드물게 카게야마에게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잔뜩 늘어트려진 뺨만 빼놓곤 전부 좋았다. 그러므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다시 뺨을 향해 손을 뻗자 움찔했다. 오이카와는 생긋 웃고서 뺨을 어루만졌다.
"토비오쨩은 계속 활을 다룰 거지?"
"..? 예. 그렇습니다."
"여자라고 해도?"
"전에도 계속 이 손으로 활을 쐈는 걸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손을 펼쳐 보여주었다. 활짝 핀 양손가락이 신기하게도 오이카와에겐 꽃처럼 느껴졌다. 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질기고 단단한 꽃이겠네. 오이카와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해가 길게 져 손바닥 사이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뺨을 만져준 후 단패궁을 나갔다.
*
3월의 26일
쿠로오님께선 쿠니미가 나를 위해 희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이카와님께서는 쿠니미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말하셨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쿠니미가..
카게야마는 일기를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쿠니미의 그림자가 비단책 위를 길게 덮고 있었다. 얼른 카게야마는 책을 품에 안았다. 쿠니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
"왜 말도 없이 왔어."
"아까 말 했잖아."
카게야마는 상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쿠니미가 보고 말했다.
"없어. 모두 밖에 있어."
"왜?"
"어차피 네 시중은 내가 들어줄 건데, 다른 사람들이 필요가 있어?"
"너 그렇게 네 마음대로.."
"우리 둘만 있자."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책을 안고 있던 카게야마는 부드러운 손길에 한숨을 쉬었다. 대충 책을 놓은 후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따라 손을 잡아주었다. 쿠니미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듯 했다.
"빨리.."
"..너 이상해."
"카게야마,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
"좋아서..예뻐서..."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마음을 고백한다. 그만해,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궁녀들이 도와주던 일들을 쿠니미는 모조리 자신이 하려고 들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미리 준비해둔 더운 물로 카게야마의 손을 닦아준다. 장미꽃잎을 띄운 물 속에 손을 담그며 카게야마는 힐끔 쿠니미를 쳐다보았다. 초조하고 다정한 쿠니미의 모습은 무언가 쫓기는 사람같았다. 쿠니ㅁ, 이름을 부르기 전 쿠니미가 먼저 카게야마를 보았다.
"카게야마."
"응.."
"난 정말로 널 좋아해."
"...."
"그러니까, 날 미워하면 안 돼."
맹목..희생..다른 이들이 쿠니미를 가리키던 단어들이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정말로 이 밤의 쿠니미는 카게야마만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간절하게 쳐다보는 눈가가 촉촉해져있었다. 카게야마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
"아니야."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다 말해줘야 돼."
"널 좋아해."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손등 위에 꽃잎이 감긴 물을 끼얹었다. 붉은 꽃잎들이 손에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쿠니미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널 정말로 좋아해."
"....."
"나 자신보다 더."
도무지 말을 해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쿠니미는 보석을 닦듯 카게야마의 손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손끝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쿠니미는 입술로, 눈으로 또다시 고백을 한다.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였다. 장미꽃향이 진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쿠니미가 이끄는 대로 침상에 가 누우면, 쿠니미는 축축한 물기가 느껴지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끌어안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괴로운 걸까? 나는 쿠니미를 괴롭게 하는 사람인거야?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애정이 벅차 그저 그 등을 쥐고서 눈을 감을 뿐이었다.
26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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