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안 : 1~9
궁 밖 : 0
홀 : 단패궁
짝 :
킨다이치가 궁을 떠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해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걱정이 됐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물어볼까 했으나 괜히 배만 쓰다듬었다. 그는 며칠 전 자신을 죽이려했던 남자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 분노로부터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쿠니미의 미심쩍은 언행들이 카게야마는 속상했다.
캐묻는다고 해도 아무것도 안 말해주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를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배를 쓸었다. 마음 속에서 여러가지 감정들이 피어올라 뒤섞였다. 단순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카게야마는 짜증이 났다.
"...마마?"
상궁이 카게야마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근심스럽게 여쭈었다.
"..밖이 소란스럽구나."
"아, 예. 사신들이 왔다고 합니다."
"...사신.."
성국들이 떠날 때도 되었다. 그들을 모셔가고, 또 키타가와의 사정을 살피려 함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조금 더 우울해졌다.
아침을 먹은 후 카게야마는 조금 돌아다녀볼 심산이었다. 한동안 궁에만 앉아있으니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산책도 하고, 또.. 크게 하품을 했다가 발치를 쳐다보니 네코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같이 가볼까.."
헥헥거리며 작게 빼문 혀가 귀여웠다. 카게야마가 손으로 툭 건드리자 놀라서 깡! 하고 짖는다. 카게야마도 덩달아 놀라 몸을 숙여 네코에게 제 혀를 내밀었다.
"이거 만졌는데 그렇게 놀라?"
만지는 거 싫어? 강아지에게 대답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카게야마는 끈질기게 물었다. 네코는 왕왕, 하고 또 몇 번 짖다가 폴짝 뛰어오르며 카게야마의 뺨을 핥았다.
1~3 : 산책
4~6 : 섭정궁
7~9 : 손님
0 : 쿠니미
카게야마는 궁녀 둘을 데리고, 또 네코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바구니에 담긴 카라스가 낑낑 앓는 소리를 내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상궁에게 많이 쓰다듬어주어야한다고 바구니를 맡기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단패궁을 나왔다. 4월이 가까웠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1~3 : (걸음을 멈춘다)
4~6 : 아..
7~9 : ....?
0 : ....
카게야마는 아...저도 모르게 멈춰섰다. 눈물점을 잊을 수 없는 남자가 생긋 웃었다.
"단패궁의 마마님. 오랜만입니다."
"...스가와라, 코시."
"이름을 기억해주셨군요. 기쁘네요."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곁에서 자신을 경계하는 강아지를 쳐다봤다.
"마마께서 기르시는 강아지군요. 히나타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언제 왔어?"
"어제 왔는데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이었다. 카게야마는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럼 오면 됐지 않나?"
"음.. 이곳의 섭정께서 저 혼자 마마를 뵙는 것을 내키지 않아하시더군요."
쿠니미의 이름이 나오자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차차, 스가와라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회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숙이자 네코가 왕왕 짖었다. 조용히 해. 네코. 카게야마가 꾸짖고 나서야 네코는 낯선 사람에 대해 짖기를 멈췄다.
*
스가와라는 강아지를 달래는 여자를 웃는 얼굴로 관찰했다. 그 츠키시마에게 따로 약을 부탁하게 만들고, 히나타가 주머니를 보여주며 활기차게 말하던 여자는 정작 다른 남자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카라스노의 작은 야심은 사라졌다. 그래도 섭정과 카게야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츠키시마는 말했다. 다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쓸쓸해보였지만.
"....?"
카게야마는 스가와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얼른 눈을 맞추고서 물었다.
"잠시 같이 걸어도 될까요?"
"좋지."
보물을 숨겨둔 사람처럼 결코 카게야마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던 섭정과 달리, 카게야마는 태연하게 스가와라를 허락했다. 아이를 가졌어도 똑같은 마음은 아니란 건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히나타님께서 주머니를 보여주셨습니다. 무척 좋아하시던데요."
"그냥.. 만들어 본 건데.."
많이 좋아하셨나? 혼잣말같은 어색한 질문이었다. 스가와라는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 서툴러보이는 여자가 귀여워 웃었다.
"예. 무척 좋아하시더군요. 키타가와를 떠나면 많이 섭섭해하실 것 같습니다."
"음.."
"카라스노에도 놀라와 주신다면 좋아하실 겁니다."
"카라스노.."
카라스노에도 가보고 싶어. 카게야마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두번째의 만남이었으나 스가와라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계속 키타가와에서 지냈냐고 물으니 바로 그저께까지도 떠돌다가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 카게야마는 문득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홀 : 혹시 밖에서
짝 : 아직도
"아직도.."
카게야마는 망설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말을 기다렸으나, 끝까지 묻지 못하자 떠오른 것을 말했다.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스가와라도 아직 기억하고 있잖아."
"이런.."
스가와라는 쓰게 웃었다. 밖에 나왔던 키타가와의 왕녀는 악의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충격을 받았다. 회임을 했으니 더욱 생각이 날 것이다. 스가와라가 동정의 기색을 보이자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 내가 아이를 낳으면."
"예."
"아이에게 나쁜 소문이 가는 건 싫어서 그래."
백성들은 자신을 싫어한다. 그러면 내가 낳은 아이가 제대로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까? 카게야마는 튀어나오지 않은 배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따라오던 네코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스가와라를 경계하는 것처럼 귀를 뒤로 젖힌 네코를,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회임을 한 여자는 눈 한 번 깜박하는 순간 왕으로 돌아간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았다.
"마마의 욕은 여전히 많습니다. 그러나 섭정의 인망이 높으니 그 핏줄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없을 테니까요."
"...섭정의 인망이?"
"오랜 전쟁으로 땅은 얻었어도,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하지를 못하여 말이 나온 겁니다."
"....."
"섭정은 그 불만을 알기에 우선적으로 구역을 나누어 정비하고 개간을 도왔습니다."
전쟁은 멈췄다. 끝없는 전쟁통에 죽는 사람은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 황폐화된 땅을 개척하도록 도우며 세금은 줄이고, 농사를 짓게 돕는 것만으로도 민심은 어느 정도 돌아왔다. 쿠니미에게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했구나, 쿠니미가.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쿠니미의 이름을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것을 못들은 척 하고 말을 이었다.
"먹고 살기가 괜찮아지면 백성들은 궁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를 겁니다. 사실 그게 가장 좋지요."
"....."
"왕궁 내의 후계싸움이니, 뭐니.. 실은 다 동떨어진 하늘 위의 이야기니까요."
"동떨어진.."
"어차피 나라의 왕이 바뀌어도, 왕조가 바뀌어도, 가장 오래 살아남는 건 백성입니다."
스가와라의 솔직한 말은 카게야마에겐 이상하게도 위안이 됐다. 자신 또한 키타가와의 지나가는 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언제 떠나는 지를 물었다. 이번 달 말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히나타와 츠키시마도 곧 같이 떠날 것이다. 그렇게 묻자, 스가와라는 글쎄요.. 말끝을 흐렸다.
"저는 사신으로 온 것도 아니고, 카라스노에서 따로 사신을 보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카게야마는 카라스노의 후계싸움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단지 두 분을 뵈러 온 것이고, 또 마마께도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기에."
"갈 길이 바쁠 텐데도.."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본 후, 키타가와에 온 두 명이 카게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여자는 종종 남자들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내심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카라스노와 상관없는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 츠키시마 또한 히나타를 따르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잘 된 일이었다. 잘 된 일이었음에도.
...조금 아쉽군. 하필 두 명의 첫사랑을 두고 가야한다니.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보며 웃었다.
"한동안 뵙지 못했는데, 또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홀 : 쿠니미의
짝 : 섭정의
남몰래 근심하던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이 가뿐해졌다. 카게야마는 아까 스가와라가 언급했던 말을 다시 물었다.
"섭정의 반대가 있었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건.."
또랑또랑하게 되묻자 먼저 말한 쪽이 더 부끄러워졌다. 스가와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츠키시마에게서 그 섭정이 뜻하는 바를 들었다.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문제였다. 츠키시마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 거라고 했다. 알고 있다고 한다면 쉽게 섭정의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들을 정리했다.
홀 : 그는
짝 : 아무것도
그는.. 스가와라는 섭정을 생각했다. 카라스노의 왕족이 아니라고 하여도 섭정은 자신에게 존대를 썼다. 쿠니미는 신중한 태도로, 카게야마를 어떻게 아느냐고도 물었다. 월초에 카게야마가 궁 밖을 나왔던 날 만나 인사를 했다고 하면 섭정의 얼굴은 금방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셨군요. 단패궁을.."
히나타의 이야기-쿠니미의 제안-를 먼저 들었던 스가와라는 알 수 있었다. 고상한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열렬히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저것은 위험하다. 사랑에 빠져, 아무것도, 제 목숨마저도 염두에 두지 않는 남자. 평화로운 삶을 위해 왕관을 포기한 황자는 본능적으로 쿠니미의 눈을 피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별 것 아니었습니다. 카라스노에 대한 이야기를 궁금하하셔서 조금 해드렸을 뿐입니다."
"카라스노에 대한.."
쿠니미는 스가와라를 찬찬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단패궁께서 카라스노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셨습니까?"
"글쎄요. 원래 할 말이 없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지요. 잠시 히나타님의 안부를 뿐입니다."
스가와라는 대충 얼버무렸다. 쿠니미는 만족한 것 같진 않았다. 그는 회임 중이란 이유를 대고서 인사를 미루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저 핑계인게 눈에 보였으나, 왕족이 아닌 스가와라가 굳이 다시 한 번 강요를 할 순 없었다. 섭정궁을 아쉽게 나오기 전 스가와라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키타가와를 조금 둘러보았습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신다고 칭송이 자자하덥니다."
"그렇습니까."
쿠니미는 자신의 이야기에는 그다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키타가와에 섭정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면, 상당히 혼란이 올 텐데."
"그렇군요."
"...."
좀 더 직접적으로, 스가와라는 궁금했던 점에 대해 언급했으나 쿠니미는 역시 큰 반응이 없었다. 스가와라가 쿠니미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티를 내어도 놀라지 않는다. 그저 모든 일이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시큰둥했다. 백성들은 카게야마같은 여자가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은 이 남자가 더 싫었다. 스가와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같은 사람은 섭정 전하의 생각을 알 수 없겠습니다."
나라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쿠니미가 그는 못마땅했다. 자신도 모르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면, 쿠니미는 그제야 스가와라를 쳐다보았다. 정면에서 쳐다본 얼굴은 첫인상과 다르게 어려보였다.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쿠니미가 물었다.
"제게 화를 내시고 계시지만, 이유는 알기가 힘들군요."
그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 밖엔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서둘러 섭정궁을 나왔다. 오물이 묻은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스가와라는 기꺼이 키타가와를 망치려는 쿠니미를 생각했고, 키타가와의 후계를 품은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카게야마는 언젠가 쿠니미의 결정을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그는 그런 카게야마에게 조금의 연민이 생겼다.
"마마께서는 그를 믿고 계시는 군요."
"...다는 아니지만."
카게야마는 꺼림칙한 일들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믿으려고 하는 편이지."
단순한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믿음은 좋은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믿음도, 자신에 대한 믿음도 나쁘지 않습니다."
"....?"
"그러나 믿음이 확신이 되면 그것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 바로 맹목입니다."
맹목... 카게야마는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스가와라에게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살짝 얼굴이 험악해진다.
"쿠니미를 믿으면 안 된다는 뜻인가?"
"아니요. 마마께서는 올바른 길을 가시어 키타가와를 살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스가와라는 어리둥절해하는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말을 생각하는 것 같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생각만 옳은 줄 알고 계속 전장에 나갔었지. 그렇지만.."
"예."
"이 아이는 좀 달랐으면 좋겠어."
카게야마는 배 위에 손을 얹고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들을 수 있는 귀만큼이나 왕의 올바른 고집도 필요합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어도, 완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존재이지요."
"그렇겠지."
"살아만 있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이란 말에 스가와라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렇지..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씩 웃었다.
"나를 가르치러 온 선생같군."
"죄송합니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아니, 좋았어."
스가와라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만난 지 고작 두 번째였으나 카게야마의 걱정을 알아차리고 다독여준다.
해맑아보이는 카게야마가 이상하게도 걱정이 됐다. 스가와라는
홀 : 좀 더
짝 : ...
...그는 더 이상 말하기를 그만 두었다. 히나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 명이라도 반대한다면 쿠니미는 뜻을 이룰 수 없다. 회임을 한 카게야마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마마께서 귀한 걸음을 오래 해주셨는데, 지치시진 않으셨는지 걱정이 됩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말을 듣고서 킥킥거렸다.
"이제 돌아가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군."
"...! 아닙니다. 마마."
장난스러운 말에 스가와라는 당황했다가, 곧 카게야마를 따라 웃었다. 둘이 함께 웃자 무슨 일인지 궁금해 네코가 옆을 폴짝폴짝 뛰었다.
*
걸음을 다시 돌린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단패궁에 데려다주었다. 헤어지기 전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마."
"...?"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을 꼭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단패궁으로 돌아왔다. 따라온 네코가 꼬질꼬질해져 궁녀들이 얼른 잡고 닦아주었다. 강아지를 닦아주던 어린 궁녀가 까르르 웃었다.
"마마, 네코 좀 보셔요. 배에 흙이 묻어있습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배에 바닥의 흙이 닿아 더러워져있었다. 카게야마가 손가락으로 배를 쿡 찌르자 다시 한 번 궁녀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희가 간식을 지나치게 많이 주는 것이 아니야?"
"안 줘도 훔쳐먹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잘 감시하겠다고 궁녀가 얼른 말했다. 앞발이 붙잡혀 배를 벌러덩 까보인 네코는 불만족스러운지 그르릉그르릉 울었다.
1~3 : 단패궁
4~6 : 바느질
7~9 : 선물(남궁)
0 :
네코에게는 밥을 절반만 주었다. 삭삭 핥아먹고는 모자른지 식사를 하는 카게야마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꿈쩍도 하지 않자 실망하고선 궁녀들을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강아지가 뛰어노는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바구니 안에서 카라스를 꺼내들었다. 어린 것이라 밥을 씹을 줄 모르니, 우유를 떠서 먹여주어야했다. 카라스는 혀를 내밀어 콧등에 묻은 우유를 핥아먹었다. 카게야마는 상궁에게 카라스를 보여주었다.
"이것봐라. 귀엽지."
카라스는 우유를 양껏 마시다가, 카게야마가 하품을 하자 자신도 따라서 하품을 했다. 조그맣게 벌어지는 입이 귀여워 그는 카라스를 꼭 끌어안았다.
홀 : 손님이 찾아았다
짝 :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해가 높이 떴으나 단패궁은 조용했다. 밖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의 발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홀로 궁에 앉아, 문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적막한 시간에는 괜히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그 대상은 감히 어느 나라의 황제이기도 했고, 어릴 적 봤던 형이기도 했으며, 또..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생각을 했다. 며칠 뒤면 쿠니미의 생일이었다. 의원은 그날 아이의 성별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
좋은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여아라면. 카게야마는 물어보지 않았어도 여아일 경우 왕녀의 처분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여왕은 허락되지 않았으니 아마 자신과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억지로 미뤄두었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조여오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카게야마는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아주 예전에... 킨다이치에게 산속에 들어갈까,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왕 그만 두게 되면 산속에 들어갈까? 사냥해서 먹고 사는 거야. 그 말을 했을 때 킨다이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쿠니미에게 섭정을 맡기면 자신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만 남겨두는 게 쿠니미는 싫었을 것이다.
"...같이 갈까. 셋이."
카게야마는 도망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정말로 딸이라면, 어떤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고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홀 : 스가와라의
짝 : 쿠니미의
쿠니미를 떠올리면 카게야마는 오전에 만났던 스가와라를 다시금 생각했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보였다.
".....?"
스가와라가 한 말들을 그는 곰곰이 되새겼다.
1~3 : 섭정의 인망
4~6 : 섭정의 반대
7~9 : 맹목적인 믿음
0 : 살아만 있다면
믿음이 확신이 되면, 그것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 바로 맹목입니다. 쿠니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바로 나온 말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꾸짖음인 줄 알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쿠니미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맹목...?"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눈물을 흘리던 날을 잊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하게, 쿠니미의 감정을 깨닫는다. 자신의 손을 잡고 싶었다고 말하는 쿠니미의 눈동자엔 온갖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반짝거리면서 빛나던 눈동자가 어두워졌을 리 없었다.
"......"
스가와라의 말은 전부 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대로 해줄 것이지. 툴툴거리던 카게야마는
홀 : ....
짝 : ....?
잠시 멈칫했다. 공손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일부러 어렵게 자신에게 말했던 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카게야마가 밖에 계속 나와있어도 되는지를 안부를 묻는 것으로 돌려서 전했다. 돌려말하더라도 더 쉽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내가 알면 안되는, 그런 일이 혹시 있는 걸까?
홀 : 혹시
짝 : ....?
"....?"
내가 알면 안되는 일... 카게야마는 여러가지를 혼자 고민했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맹목 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기로 했다.
카게야마는 누군가 직접적으로 말을 해주지 않더라도, 키워드들을 모아 쿠니미의 계획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 카게야마에게 쿠니미의 계획을 말해줄 수 있는 확률을 가진 사람은 우시지마입니다.
카게야마는 상궁의 성화에 못 이겨 아기옷을 만드는 것을 구경했다. 호랑이를 수놓은 아기옷은 당연하지만 남아의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속상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마.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상궁은 조그만 옷을 내밀었으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상궁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도리질을 쳤다. 그저 피곤했다.
"...마마?"
안색이 어두운 카게야마가 걱정된 상궁이 다시 한 번 카게야마를 불렀다.
"근심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요즘 궁에 무슨 일이 있나?"
카게야마의 중얼거림에 상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어? 다시 묻자 상궁은 머뭇거린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썼다.
"너는 내 사람이지. 뭔가를 숨긴다면 섭정궁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
"어서."
카게야마의 재촉에 상궁은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전에 그 난리가 났을 때.."
카게야마를 죽이기 위해 궁에 숨어들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상궁은 꺼냈다.
"섭정 전하께서 마마를 두고 폐하라고 부른 걸 두고 말이 나오긴 합니다."
"...."
"옛 칭호을 굳이 부르는 이유는 마마를 모욕하기 위해서라고들 말하지만."
상궁은 말끝을 흐렸다. 카게야마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나가보거라."
상궁은 카게야마의 잠자리를 보아준 후 조용히 나갔다. 자리에 누운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새삼스럽게도 폐하라고 부르는 쿠니미의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폐하.. 확실히, 자신도 처음에 들었을 땐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쿠니미는 킨다이치와 함께 끈질기게도 그 호칭을 포기하지 않았다.
쿠니미. 나는 아직도 너의 왕이야?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22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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