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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8. 31일 <츠키시마-북궁-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소란스러워 일찍 눈을 떴다. 단패궁 밖에서 여인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려했지만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궁은 카게야마가 깼음을 알아차리고 얼른 달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토비오님."

"..토비오님?"


카게야마는 상궁이 떠준 물을 마시며 물었다. 상궁의 안색이 잠시 흐려졌다.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단월일이기에 토비오님께선 남장을 하셔야합니다."

"...이해했으니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좋다."


남장을 하는 이유는 단패궁에 임신할 수 있는 여자가 없다고 눈가림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카게야마라고 부르면 카게야마의 남자 왕족이 되니 결국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여자라고 왕위를 빼앗더니, 오늘은 여자이기에 성도 빼앗기는가. 카게야마는 피식 웃었다. 


아직도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물잔을 내려놓고 밖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물었다. 상궁이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자, 카게야마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궁 밖에 어떤 이가 울고 있다. 시끄러우니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라."

"그리 하겠습니다."


상궁은 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카게야마는 상궁이 준비한 옷을 보았다. 남자 왕족들이 입는 옷이었다. 의외로 평온했다. 더 이상 흔들릴 곳도 없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카게야마의 앞에 끌려온 여인은 예상한대로 궁녀였다. 손과 발엔 잔뜩 맞은 흔적이 있고, 얼굴엔 눈물과 재로 더러웠다. 상궁은 궁금해하는 카게야마에게 설명했다.

 

"원래 있던 궁에서 불을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졸다가 꺼트려 쫓겨났다고 합니다. 퇴궁을 하란 벌을 받고서 울다가 토비오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폐.. 토비오님. 미천한 것이 토비오님을 깨웠으니 죽여주시옵소서.."

 

궁녀는 엎드린 채 덜덜 떨었다. 겨울엔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일이 중요했다. 카게야마는 엉망이 된 궁녀를 살펴보았다. 어딘지 오사와를 생각나게 하는 얌전한 얼굴이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궁녀를 두고 카게야마는 상궁에게 물었다.

 

"그럼 여기서 일하게 하지?"

"토비오님?"

"겨울에 나가서는 궁녀가 일할 곳도 없을텐데 불쌍하지 않느냐. 실수를 해서 내쫓겼다니 중요한 일은 맡기지 말고, 먹고 살만은 하도록 해주거라."

"토비오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궁녀는 카게야마에게 몇 번이나 절을 하며 기뻐했다. 카게야마는 왕일 때 궁녀들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대체가 가능한 소모품이었다. 하지만 제 처지가 뒤바뀌고 나니 카게야마는 주변의 여자들에게 눈이 갔다. 강력한 나라를 위해 달리던 왕이 고작 궁녀들을 신경써주며 만족을 얻는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비웃을 것이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기만족이라도 좋았다. 

 


"어느 궁에 있었느냐. 너를 쓰게 되었다고 전 주인께 알려야하니 말해보거라."

 

단패궁을 나와, 궁녀는 눈물을 그친 얼굴로 상궁에게 말했다. 

 

"저는, 오사와 대신님의 밑에 있었습니다.."



*



궁녀들은 카게야마의 식사가 끝난 후 남복을 입혔다. 여전히 짧고 검은 머리에는 여복보다는 남자의 것이 더 잘 어울렸다. 살아온 날 동안을 입었던 옷이었다. 카게야마는 익숙한 감촉이 슬프게도 기꺼웠다. 보통의 여인보다 훨씬 큰 키에 남색의 겉옷을 마지막으로 걸치자 훌륭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토비오님. 오늘은 단월일이니 외출을 하셔도 좋다고 섭정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상궁은 카게야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신 궁 밖을 나가시게 되면 호위가 따라갈 것입니다."

"활만 주면 나 혼자도 충분할 것이라 전해라."

"토비오님. 호위는 꼭 데리고 나가셔야합니다."


말을 타고 오랜만에 궁 밖을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토비오는 고민했다.



홀 : 바람이라도 쐴까

짝 : 호위는 귀찮다



"..섭정께서 신경써주셨으니 한 번 나가보겠다. 말을 준비시켜라."

"토비오님. 섭정 전하께서 호위를 보내셨으니 데리고 가십시오."

"...알겠다. 알겠으니 그만 말하거라."


카게야마는 제 활을 찾았다. 오늘은 활도 허락되는 모양인지 궁녀 한 명이 활을 가져왔다. 손에 활을 잡자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단월일이란 것.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


궁 밖을 나오니 섭정궁에서 몇 번 본듯한 호위들이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화살통을 등 뒤에 걸며 말했다.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쫓아오겠느냐?"

"섭정께선 토비오님께서 도망치시는 일이 아니라 몸이 다치실 일을 걱정했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카게야마는 말을 끌고 궁 밖을 걸었다. 나가기 전까지 마주친 사람들은 전부 카게야마를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서 카게야마는 말을 재촉했다. 호위들은 카게야마의 뒤에 딱 붙은 채로 떨어지지 않았다.


"..섭정이나 장군은 요즘 바쁜가보군. 최근 얼굴을 보지 못했다."


궁을 나온 카게야마는 말에 탄 채로 옆에 붙은 호위에게 물었다. 한 명은 뒤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예. 바쁘십니다."

"하기야 폭군이 제멋대로 휘두른 나라를 다시 쌓아올려야하니 바쁘기도 할 것이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토비오님."

"내 앞이라 말을 가릴 것 없다. 내가 전쟁을 미쳐있는 동안 이 곳이 황폐해진 일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

"섭정이 바쁘다니 당분간 방해하진 말아야겠군."


한참 뒤 호위가 대답했다.


"토비오님. 섭정 전하나 장군께서는 토비오님께서 오신다면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실 것입니다."


카게야마가 호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라토리자와의 황제께만 계속 인사를 드리셨다는 소식에 두 분께서 근심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호위는 그 말엔 대답하지 못한 채 묵묵히 곁을 지켰다.



카게야마는 궁에서 멀지 않은 수도에 도착했다. 말을 타고다니면 오히려 시선이 집중됐다. 호위의 제안대로 근처의 여관에 말을 맡긴 카게야마는, 겨울인데도 마을에 활기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일은 신년이니 아마 신년의 준비를 하느라 그런가봅니다. 저 쪽에 곡예단도 와서 재주를 부리고 있더군요."

"그런가."


카게야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얼굴로 물건을 사거나 팔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일 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 낯선 활기 속에서 카게야마는 외로움을 느꼈다.



카게야마는


홀 : 그래도

짝 : 그런데



"그런데 말들은 잘 있는건가?"


카게야마는 감상적인 기분을 떨치고 호위에게 물었다. 호위들은 카게야마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여관에서 돈을 받고 돌봐주는 것이니까요."

"혹시라도 말을 팔아버리면 어쩌지?"


호위들은 순진해보이는 카게야마의 질문을 듣고 웃었다.


"그런 소문이 난다면 누가 저 여관을 가겠습니까."

"...불안하니 내가 가서 잘 있는 지 보고싶구나."

"토비오님?"


카게야마는 천천히 걷던 걸음을 뒤로 확 돌려 여관으로 뛰어갔다. 무방비하던 호위들이 뒤늦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비오님!"

"잠시 돌아보고 오겠다! 너희도 너희 할 일을 하다가 해가 지면 오거라!"


카게야마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할 말을 하곤 여관 안쪽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말을 맡기며 봐뒀던 복잡한 골목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귀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토비오님!!"


모처럼 나왔는데 호위를 달고 다니긴 싫었다. 카게야마는 사람들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골목을 통해 다시 빠져나왔다. 카게야마는 호흡을 삭히며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갔다. 그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혹시라도 호위들의 기척이 다가오진 않을지 살폈다. 아마도 저 골목의 미로 사이에서 호위들은 길을 잃은 듯 했다. 



1~2 : 식당

3~4 : 곡예단

5~6 : 고서점

7~8 : 보석점

9~0 : 암살



카게야마는 주위를 구경하며 적당히 걸었다. 사람들이 노점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자신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졌다. 같이 끼어서 먹으려던 찰나 그는 호위들이 자신이 나온 길을 따라나왔음을 알아차렸다. 


"...저 놈들은 토비오님, 토비오님, 하면서 부르면 내가 돌아갈 줄 아는건가."


카게야마는 먹으려던 음식을 내려놓고 두리번거리다가, 적당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훤칠한 분이시구만! 어느 분에게 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


카게야마는 황망한 얼굴로 가게 안을 살폈다. 온갖 보석들이 찬란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석이라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왕이었을 때나 단패궁에 들어갔을 때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 언제나 궁녀들이 적당한 물건을 골라주었다. 카게야마가 머뭇거리자 그 표정을 수줍음으로 안건지 주인은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했다.


"누구에게 드리시려고 그러는진 모르겠지만, 먼저 구경하고 있게나. 안쪽에 손님이 와계셔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하니.."

"바쁘다면 나중에 다시 오겠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가 얼굴을 훽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미간이 구겨졌다.


"음?"


안쪽에서 나온 카라스노의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보곤 잠시 이상하단 얼굴을 했다.


"혹시....?"

"나..나는 볼 일이 없으니 나가보겠다."


카게야마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호위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고 다시 손을 놓고 말았다.


-토비오님!

-토비오님! 어디 계십니까!


카게야마 뿐만 아니라 주인과 츠키시마의 귀에도 문 사이에서 들릴 만한 소리였다. 모든 정황을 파악한 츠키시마가 훗 웃었다.


"아하..."


잠시 후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와 함께 보석점의 안쪽에 앉아있었다. 주인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말했다.


"츠..키시마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도무지 히나타를 찾아주지 않는 여인이 있어 선물이라도 바칠까 했지."

"....."


그러고보니 북궁에 첫 인사를 간 후론 히나타도, 츠키시마도 보지 못했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카게야마는 민망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밖에서 보게 됐네."

"히나타님께선.."

"오늘 분명 단월일, 이라고 했지? 왕님께서 남장을 하셨단 말을 듣고 보고 싶다면서 히나타는 궁 안에 남겠다고 했는데."

"....."

"보고 싶은 사람은 못 보고 내가 보게 됐네."


빈정거리는 저 말투는 원래 습관인지 아니면 자신에게만 유독 이러는 건지 카게야마는 궁금해졌다.


"그래서, 호위에게 도망치고 있었던 모양인데 왜 도망쳤던 거야?"


츠키시마가 물었다.



1~3 : 상관하지 마십시오

4~6 : 볼 일이 있어서..

7~9 : 원래 보석을 좋아하는 것 뿐

0 : 뒤를 쫓았으니까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첫날 츠키시마가 자신에게 한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보석들을 살펴보는 시늉을 하며 카게야마는 말했다.


"도망친 게 아닙니다."

"음?"

"그..그저 원래 보석을 좋아해서 보고 싶었던 겁니다."

"아. 그래?"


츠키시마의 목소리가 웃음을 참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카게야마는 보석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보석들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츠키시마는 그래, 그래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보석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정말 정말 좋아합니다."

"음. 그렇겠지."


주인이 마침 차와 함께 츠키시마에게 보여줄 보석들을 들고 왔다. 주인을 향해 츠키시마가 주문을 했다.


"이 분께서도 보석을 아주 좋아하시니 더 보여드리게. 값은 내가 내지."

"츠키시마ㄴ..아니, 츠..나으리."


함부로 이름을 부를 수 없어 당황한 사이 신난 주인이 보석들을 잔뜩 가져왔다. 


"여인에게 선물할 거라면 보석이 최고지요. 이렇게 훤칠하고 근사한 사내분들이 보석을 안겨준다면 어떤 여인이 거절하겠습니까."

"글쎄. 나는.. 보석을 좋아하지 않는 여인도 반할 만한 물건을 원하는데."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힐끔 보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못들은 척 했다. 주인은 신이 난 상태였다. 두 남자 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슬쩍 보이는 안쪽의 천도 질이 좋은 것이다. 훌륭한 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주인은 츠키시마의 말을 받아 말했다. 


"그런 여인이 있겠습니까. 나으리. 여자란 단순해 반짝거리는 것을 쥐어주면 그저 품에 안겨 감동하지요."

"다 그렇지도 않더라고."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앞에 놓인 금강석 귀걸이를 집었다. 주인은 몸이 달았다.


"나으리. 어떤 여인이시길래 그러십니까. 외양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한 번 어울리는 놈으로 골라보겠습니다."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 잘은 기억 안나지만."


츠키시마가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며 카게야마는 제 손에도 보석을 움켜쥐었다.


"머리는 까마귀처럼 검고, 대신 짧지. 눈은 푸르고 피부는 희어 미인이란 소리도 듣더군."

"아아.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시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자네도 그 여인을 알고 있으니 참고하고 싶군. 어떤 선물을 주어야 만족할까?"


결국 자신까지 끌어들이는 츠키시마에게 카게야마는 대답했다.



홀 : 보석은 원하지 않을 겁니다

짝 : 아무거나 상관없을 것입니다



"...어떤 보석이라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지?"

"어차피 그 여인은 거절할 일 없이 나으리..의 장난을 견뎌야 하는 입장이니,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카게야마는 일어섰다. 츠키시마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든 채로 카게야마를 보고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1~3 : 그럼 적당히 골라볼까

4~6 : 시간을 낭비했군

7~9 : 왜 화를 내는 걸까

0 : 원하는 것은?



자신을 붙잡으려는 주인의 손을 피해 카게야마는 서둘러 보석점을 나왔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왔는데 불편한 사람을 만나 더욱 기분이 우울해졌다. 호위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카게야마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겨울의 짧은 해가 벌써 내려앉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사이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다가오는 손에 잡히기 전 민감하게 고개를 돌렸다. 츠키시마였다.


"츠키시마님?"

"..왜 화를 내는 거지?"


츠키시마는 종전까지의 말투와는 다른,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석이야 많이 가지고 있을테니, 무엇이 취향이냐 물은 것 뿐이야. 왜 화를 내는 거지?"

"..화를 냈다니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왕님의 표정이 숨기기 힘들다는 건 진작 알았으니 변명은 그만 둬."


카게야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츠키시마가 따라나올 줄은 몰랐고, 이런 식으로 물어볼 줄도 몰랐기에 그는 당황했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 츠키시마는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카게야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게 장난을 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응. 장난친 건 맞아."

"...."

"하지만 직접 고르게 한 보석을 주고 싶었던 것도 맞지. 선물은 본인 마음에 들어야하니까."


츠키시마의 머리 위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진다.


"뭐.. 보석이 싫다면 다른 걸 알아봐야겠네."

"상관없,"

"이제 궁으로 가야하지? 같이 가."

"괜찮습,"

"아. 호위를 따돌려놓고 이젠 나도 따돌리려고 하네. 어서 가지."


카게야마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졌다. 그래도 츠키시마를 따라갔다. 츠키시마가 말을 맡긴 여관은 카게야마와 같은 곳이었다. 여관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호위들은 카게야마를 보자마자 달려왔다가, 츠키시마를 알아차리곤 감사인사를 했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겠네."


호위들에게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또다시 못 들은 척 말 위에 올라탔다. 



츠시키마 케이

○: 10 (+2)

◇: 10


카게야마 토비오

□: 9 (+2)



"그러고보니 왕님이 늘 숨어있을 때만 보게 되네."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발끈했다가, 다시 놀리듯 웃는 모습에 입술을 삐죽였다.


"..츠키시마님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어쩌겠어. 나는 왕님께 우리 궁으로 와달라고 해야하는 입장인데."

"...."

"좀 이상한 꼴을 봐도 그러려니 해야지."

"...!!"


단패궁에 도착했다. 서둘러 들어가려던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예?"

"북궁에 같이 가서 식사하지 않겠어?"

"...."

"아직 저녁식사를 못했으니 같이 먹자는 것 뿐이야."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권유에 잠시 고민했다.



홀 :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짝 : .....



아직 식사를 하지 못해 배도 고팠다. 그러고보니 하루 종일 아침 외에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츠키시마가 계속 자신들을 찾지 않았던 걸 탓하는 소리도 들었으니, 카게야마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쪽은 환영이야."


츠키시마는 카게야마를 데리고 북궁으로 향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모양인지 히나타가 궁 앞에서 나와 있었다.


"카게야마!"

"히나타님을 뵙습니다."

"엄청 오랜만이야!"


해가 졌는데도 정원엔 다시 해가 뜬 듯 했다. 높은 히나타의 목소리가 북궁을 울렸다. 카게야마는 정신을 못차린 채 히나타에게 끌려갔다. 자리에 앉으니 벌써 음식이 차려져있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며 말했다. 츠키시마가 뒤늦게 따라와 앉았다. 


"남장한거야? 우와, 멋지다.."

"그런 말은 그만둬. 히나타."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살폈다.


"저 왕님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남장을 하고 왕을 했던 여자라고."

"..벌써 츠키시마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맞아. 츠키시마는 똑똑한 척 하면서 바보라니까."


히나타가 하하 웃었다. 츠키시마는 짜증을 냈다.


"오늘은 궁에 없었던 거야? 그동안 보고 싶었어."

"...!"

"...히나타. 왕님 밥은 먹게 해줘. 못 먹고 있잖아."

"입에 맞는 찬이 없어? 여기, 내 것도 먹어."


히나타가 가까이에 있는 찬을 놓아주었다. 카게야마는 물을 들이켰다.


"..히나타님. 괜찮습니다."

"히나타님 히나타님, 딱딱하다니까. 쇼요라고 불러."

"그럴 순 없습니다."

"난 빨리 토비오라고 부르고 싶단 말이야!"


같이 자란 킨다이치나 쿠니미도 잘 부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이름만을 불리자 당황했다. 도와달라는 뜻으로 곁의 츠키시마를 봤지만 이 상황이 재밌는지 가만히 밥만 먹고 있다. 히나타는 볼을 부풀렸다.


"어차피 토비오는 나랑도 잠자리를 해야하지? 여자랑 자는 건 처음인데 딱딱하게 히나타님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

"예. 처음이시니..예?"

"히나타. 적당히 해."


츠키시마가 말렸으나 히나타는 요지부동이었다. 카게야마는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처음이라고 말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쇼요라고 불러준다면 좋을 것 같아. 불러봐. 토비오."

"...아. 저."



홀 : 쇼요님

짝 : 히나타님



"히나타님. 송구하오나 저는 아직 어려우니 부디 명을 거둬주십시오."

"명령이 아닌데."


히나타는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카게야마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카게야마를 쳐다보며 히나타는 다시 한 번 고집을 부렸다.


"그치만 난 토비오라고 부를래."

"...."

"싫어?"


카게야마의 앞으로 히나타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밥을 꿀꺽 삼킨 카게야마는 얼떨결에 히나타의 기세에 휩쓸려 고개를 저었다. 츠키시마가 훗, 웃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좋아. 이제부터 토비오라고 부를 거야."

"..예."

"토비오. 많이 먹어."

"가..감사합니다."


궁녀들에게 토비오님이라고 불리던 것과도, 오이카와에게 토비오쨩이라고 놀려지던 것과도 달랐다. 체할 것 같아 카게야마는 단패궁으로 돌아가면 소화제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월일에 보좌를 따라 궁에 온 경우 호감도를 정합니다 


카게야마는 오늘 저녁


1~3 : 토비오라니..솔직히 불편했다 (+0)

4~6 : 히나타님은 특이하신 분 같다 (+1)

7~9 : 토비오라고 불려서 싫지 않았다 (+2)

0 : 사실 쇼요라고 부르고 싶었다 (+3)


히나타는 오늘 저녁


1~3 : 오늘부턴 토비오라고 부를거야! (호감도 +1)

4~6 : 쇼요라고 불러주지 (호감도 +2 위험도 +1)

7~9 : 쇼요라고 부르게 만들고 싶었다 (호감도 +3 위험도 +2)

0 : 단패궁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호감도 +4 위험도 +3)



같은 호칭에 서로 다른 마음이 자란 저녁이었다. 카게야마는 차를 마시고 가란 히나타의 말을 거절한 채 서둘러 단패궁으로 돌아왔다.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씻고 나오자 쿠니미의 서신이 와있었다. 읽어보니 호위를 두고 가지 말라는 잔소리였다.


"호위없이도 잘 돌아다녔다고 전해거라. 다음에도 호위는 떼놓고 돌아다닐 것이다."

"토비오님..몸을 조심하셔야합니다."


상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1~3 : 밤산책을 했다

4~6 : 침상에 누웠다

7~9 : 손님이 왔다

0 :



오랜만에 말을 타 몸은 고단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땀이 난 몸을 씻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그대로 잘까 하다가 아쉬워져 카게야마는 밖을 나갔다. 어둠이 내린 정원은 또다른 운치가 있었다. 궁녀 한 명이 뒤를 따라왔다. 카게야마는 생각난 김에 궁녀에게 물었다.


"아침에 내가 들이라한 궁녀는 어디로 갔느냐?'



홀 : 상궁께서

짝 : 일하도록



"그 아이라면 안에서 잡일을 하도록 되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카게야마는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밤공기가 차갑게 피부에 달라붙어 기분이 좋았다. 



1~5: 궁으로 돌아간다

6~0: 누군가와 마주쳤다



궁녀를 뒤에 두고 걷던 카게야마는 걸음을 멈췄다. 


"누구?"


저 편에서 먼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1 : 쿠니미 아키라

2 : 킨다이치 유타로

3 : 우시지마 와카토시

4 : 오이카와 토오루

5 : 이와이즈미 하지메

6 : 히나타 쇼요

7 : 츠키시마 케이

8 : 쿠로오 테츠로

9 : 코즈메 켄마

0 : 리레주 지정



카게야마는 어제도 들었던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렸다.


"오이카와님?"

"뭐야. 토비오쨩이잖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뒤를 슬며시 보았다. 궁녀가 시선을 느끼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오늘은 궁녀를 데려왔네."

"오이카와님. 밤에 자주 나오시는군요."

"토비오쨩이야말로 이 오이카와씨를 보기 위해 밤마다 나오는 거 아냐?"

"아닙니다!"

"어제도 말했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놀렸다. 마주친 것만으로도 진 기분이어서 카게야마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눈은 그쳤지만 달빛은 여전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위에서 부서지는 빛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씻어서 단순한 옷차림인 카게야마와 달리 오이카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을 들였다. 언제 누구와 마주쳐도 저 정도라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곤 물었다.


"오늘 궁 밖을 나갔다며?"

"예."

"토비오쨩이라면 분명히 호위는 다 따돌리고 혼자 다니지 않았을까."

".....!"

"토비오쨩은 너무너무 단순하니까 이 오이카와씨는 알 수 있어요." 


그 말에 반박을 할 수 없는 것이 카게야마는 분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변명을 꺼냈다.


"아닙니다! 츠키시마님과 있었습니다."

"...카라스노의?"

"예. 물론 호위와 중간에 헤어지긴 했지만 ..헤어지자마자 츠키시마님과 만나 같이 있었습니다."


오이카와는 한 발자국 다가왔다.


"츠키시마라면 카라스노 꼬마와 함께 온 보좌였지."

"예."

"..벌써 따로 마음을 준 상대가 생긴거였어? 토비오쨩."

"예?"

"아니면 그쪽에서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마지막 말에만 대꾸했을 뿐이었다.


"의도적..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갔으니까요."

"..오이카와씨는 좀 혼란스럽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중얼거림같은 말을 듣고 팔짱을 꼈다. 보기 좋은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어째서 토비오쨩이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지?"

"예?"

"아니, 의도하지 않았다면 더 나쁘잖아. 토비오쨩."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면 됐네요. 하긴 토비오쨩은 단순한 바보바보바보니까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바보아닙니다."

"좀 신경이 쓰이긴 하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바보라고 자신을 부른 일이 신경쓰였다. 바보가 아니라고 다시 말하려는데 오이카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밤마다 토비오쨩을 봐서 오이카와씨도 피곤하네. 데려다줄까?"


카게야마는 상냥하게 웃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았다. 웃는 얼굴인데 눈은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홀 : 괜찮으시다면

짝 : 괜찮습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를 피곤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젯밤 단패궁으로 데려다주길 부탁했던 일이 오이카와에게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굳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피곤하실테니 오이카와님께서도 들어가십시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할테니, 토비오쨩이야말로 얼른 들어가."

"예. 오이카와님. 그럼.."

"언제까지 서있을거야? 빨리 가버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먼저 등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궁녀와 함께 단패궁으로 돌아왔다. 



오이카와 토오루

○: 11

◇: 12 (+1)


카게야마 토비오

□: 11



카게야마는 침상에 눕기 전 이상한 감각에 속옷을 살폈다. 역시나 피가 묻어 있다. 처음 피를 봤던 건 막 전쟁터에 있던 두달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의 피가 안쪽까지 묻어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서야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것임을 알고 놀랐다. 킨다이치에게 물어보자 여자라면 다 겪는 일이라고 안심시켜주었다. 그 때 생각했다. 아무리 숨겨도 어떻게든 여자임을 알 수 있는 때는 오는구나. 애초에 평생을 숨기기엔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가 남장을 한 채로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이유는, 아버지 역시 남자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궁녀를 불러 속옷을 갈아입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온 몸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아 카게야마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침상에 눕자 저 멀리서 신년의 해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31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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