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Q/카게른/단편

[모브카게] 절멸의 천사


탕, 탕...바닥에 부딪혀 공이 굴러가는 소리만이 체육관을 울렸다.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새벽의 체육관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

 

아직도 카라스노의 진열장에는 전국고교야구대회의 트로피가 반짝이고 있다. 청춘의 맹렬한 흔적. 발을 멈출 수밖엔 없었다. 그를 안내하던 카라스노의 교사 타케다 잇테츠는 진열장 앞에 선 남자를 보며 웃는 낯을 했다.

 

"야구로 유명한 학교가 아니라서 놀라셨죠. 예전에 딱 한 번 갑자원까지 가서 우승을 했던 적이 있다더군요. 저는 야구는 잘 모르지만."

"그렇습니까."

"학교의 자랑입니다. 천천히 보세요."

"아니오. 이제 됐습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친절하게 설명하는 타케다를 보며 따라 웃었다. 입 끝이 어설프게 올라가 이상한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이지러진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한 타케다는 계속 말을 걸었다.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선생이었다. 성격도 외모도 둥글둥글한 호인. 남자가 카라스노에 다닐 때도 이런 선생이 있었다. 대체로 학생들에겐 편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지만 남자는 그의 수업을 좋아했다.

 

"야구는 잘 모르지만, 제가 배구부 고문이라서요. 배구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

"배구..입니까."

"안 어울리죠?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타케다가 또다시 웃었다. 남자 역시 이번엔 제법 웃었다.

 

"운동계는 아닐 것 같았습니다."

"네. 하지만 우리 카라스노 배구부는 강하니까요! 말 나온 김에 체육관에 가시죠. "

 

새로 수위를 맡아주실 분이 젊으셔서 안심이 됩니다. 요새 하도 학생 대상으로 범죄가 일어나서.. 그런 말을 하며 타케다는 교사校舍를 나가기 위해 앞서 걸었다. 남자는 그 뒤를 묵묵히 따랐다. 복도를 지나며 벽 한 쪽을 전부 연쇄한 창문을 내려다보니 운동장에서는 남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단단한 공이 흙바닥에 처박혔다가 붕 떠서 튀어 골대로 날아간다. 하지만 골대를 맞고 공은 튕겨져 나갔다. 남자는 순간 아, 짧게 탄식했다. 동시에 운동장에서도 큰 신음성이 터졌다. 아까워! 그러니까 잘 보냈어야지! 뭐? 곧 입씨름을 하기 시작한다. 딱 그 나이 대의 혈기였다. 흥미를 잃은 남자는 눈을 떼려다 문득 운동장에서 뒤쪽의 체육관으로 뛰어가는 인영을 발견했다. 카라스노의 운동복을 입은 검은 머리 남자아이는 또래보다 키가 커보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신이 난 얼굴로 뛰고 있다. 남자는 잠시 그에게서 눈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앞을 보니 타케다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쪽입니다."

"...예."

 

이미 알고 있는 길을 모른 척 따르며 남자는 다시 한 번 트로피를 생각했다. 그가 보냈던 청춘의 맹렬한 흔적을.

 

*

 

카라스노의 에이스라고 하면 누구나 남자를 가리켰다. 초중등부에서 야구를 해온 남자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종의 천재라도 봐도 무방했다. 천재가 아니라기엔 남들에겐 어려운 일이 그에겐 너무나 쉬웠다. 남자는 쉽게 공을 던졌고, 공을 맞췄다. 중등부의 코치는 투수를 권했다. 남자 역시 주목받는 투수 쪽이 좋았다. 중학교 내내 에이스로 활약하며 공을 던졌다. 야구부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여러 번 추천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카라스노로 갔다. 중학교의 야구부는 체계적으로 잘 짜인 곳이었지만 그만큼 선후배간의 예의를 강조했다. 남자는 에이스인데도 선배들의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 가깝다는 장점 외엔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왔다. 투수가 홀로 마운드에서 빛나듯 유일하게 자신만이 빛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남자는 까마귀처럼 날아왔다.

 

그때의 남자는 몰랐으나 그는 운도 좋았다. 카라스노의 야구부는 힘 있는 4번 타자는 없었지만 기본적인 수비는 좋은 편이었다. 그 말인 즉 선발투수가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 최소한 지지는 않는단 말이었다. 남자는 많은 경기에 올라와 많은 공을 던졌다. 평범한 직구가 아닌, 밑으로 휘어지는 변화구에 속은 타자들은 번번이 삼진을 당했다. 구속은 평범해도 제구력과 변화구만큼은 프로에 가깝단 평을 들었다. 도무지 막을 자가 없었다. 남자는 주장이 되어 카라스노의 야구부를 끌고 3년 만에 드디어 갑자원을 밟았다. 다시 수많은 공을 던진 후 우승했다.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랫동안 축포는 터졌고 모두 울었다. 남자도 섞여 울었다.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그를 울게 했다. 눈물을 흘리며 트로피를 번쩍 들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에이스. 남자는 확고한 에이스였다.

 

갑자원의 승리투수는 프로에 나가면 A급 선수는 못 된다는 속설이 있다. 남자는 비웃기라도 하듯 1차에 지명되어 프로 명문팀에 들어갔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유일무이의 천재, 주목해야할 대형신인, 마구를 구사하는 좌완투수. 그리고 미래의 에이스까지. 모두 오만한 남자의 마음에 들을 만한 별명이었다. 프로팀에 입단 후 반년 만에 1군에 올라온 남자는 눈부시게 활약하며 팬들을 설레게 했다. 어느 날의 승리로 들뜬 그가 잔뜩 취해, 사람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차를 몰지만 않았다면 쭉 그랬을 것이다. 술에 취해 몰던 차와 함께 자랑하던 어깨는 산산조각이 났다. 재능이 아무리 아깝다고 하더라도 재기가 불가한 신인을 두고 볼 구단은 없었다. 더구나 음주운전은 죄질이 나빴다. 야구와 관계된 어떤 일자리도 얻지 못한 남자는 프로에서 도망치기도 전에 쫓겨났다. 고향으로 기어들어와 폐인으로 살았다. 몇 년을 방 안에서 꼼짝 못하는 남자를 보다 못한 부모는 모교의 수위 자리로 그를 밀어 넣었다. 갑자원 출신이란 타이틀은 이번엔 취직에 도움이 되었다. 


날개가 꺾인 까마귀. 과거의 에이스가 된 남자는 감흥 없이 학교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부모는 남자가 어떤 자극을 얻길 바랐을 것이다. 활기에 넘치는 학생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살아갈 힘을 얻길 원했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쉽게 손에 넣어왔던 남자는 무기력하게 웃는 얼굴을 하며 다만 교사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이젠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깨가 부서진 순간부터 세상은 절멸. 아무것도 없는 세계 속에서 그는 다만 숨만 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랬다.

 

*

 

타케다는 눈부신 햇살을 보는 얼굴로 체육관을 가리켰다. 탕, 탕.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뛰어오르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끔씩 아이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고 갈 때가 있어서요."

"예."

"잠깐 들어가서 보시겠습니까?"


아니, 라고 거절하기도 전에 타게다는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줄곧 말해왔던 배구부를 자랑하고 싶은 낌새였다. 타케다를 발견한 학생들이 쪼르르 그의 앞에 몰려왔다. 잘 조련된 개 같은 동작이었다. '이번에 새로 와주신 수위분이시니 얼굴을 익혀두도록 하세요.' 타케다가 자신을 소개하자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모두 '예!' 라고 힘차게 대답했다. 남자는 피로감을 느꼈다. 타케다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를 불렀다. 남자는 그를 알아보았다. 좀 전에 체육관 쪽으로 뛰어가던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 가까이서 보니 살짝 매서운 눈매라 고집이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래도 타케다가 말을 걸자 순종적인 학생의 얼굴을 했다. 


"카게야마군. 히나타군은 오늘 안 왔나요?"

"그 멍ㅊ..히나타, 만두를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났다던데요."


여기저기 풉 웃는 소리가 들렸다. 타케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름이니 음식 먹을 땐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타케다는 코치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며 남자를 체육관에 세워두고 사라졌다. 남자는 도로 나가기도 귀찮아 벽에 기대어 배구부원들의 연습을 구경했다. 배구를 모르는 남자의 눈에도 강하다는 타케다의 말이 허풍으론 보이지 않았다. 다들 연습인데도 진지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왠지 보기 싫어져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엔 개인연습을 하고 있었다. 타케다에게 카게야마라고 불렸던 소년이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다. 페트병을 일렬로 세워두고는 한 자리에서 공을 뒤로 던진다. 배구공이 둥실 떠올랐다가 잠깐 멈추더니 직각으로 뚝 떨어져 페트병을 맞췄다. 보고도 믿기 힘든 정확성이었다. 뒤를 돌아 페트병이 넘어진 걸 확인한 카게야마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거, 어려워 보이는데."

"어렵겠죠."


코치와의 대화를 마친 타케다가 다가왔다가 남자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남자는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군은 천재라고들 하니까요. 정말 놀라워요. 저도 배구에 대해 완벽히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학생은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오."


유순한 얼굴과 달리 타케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남자는 타케다를 돌아보았다. 타케다의 시선은 카게야마가 던진 공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천재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카게야마군이 그렇습니다."


남자는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젖혀 뒤로 던진 공이 네트 위쪽에서 잠시 멈췄다가 역시 페트병을 맞추며 떨어졌다. 계속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나뒹구는 페트병을 보며 몇 번이나 주먹을 꽉 쥐었다. 활짝 웃고 싶은 입가를 꾹 참는 바람에 마치 간지러움을 참는 표정 같았다. 이상하게도 남자는 그 표정이 마음에 남았다. 타케다가 다른 곳을 돌아보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쭉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체육관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카게야마 쪽을 확인했다. 카게야마는 넘어트려 찌그러진 페트병의 입구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조심성 없게 마시는 바람에 물줄기가 턱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순간의 그 모습을 모조리 머리에 새겼다. 기묘한 두근거림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부터 울렸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


남자가 수위직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부모는 기뻐했다. 그래,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제 나이 보다 더 늙은 노모는 눈물을 찍어냈다. 남자는 감상적인 응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날부터 카라스노에 출근했다. 시골의 고등학교 수위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문단속을 하고 잡다한 호출에 불려 일을 도왔다. 나이든 할아버지 수위를 오랫동안 봐왔던 학생들은 젊은 축에 속하는 남자를 어색해했다. 그는 그들을 피해 아침에는 체육관 뒤를 비로 쓸었다. 그러다보니 새벽부터 연습을 위해 달려온 운동부들과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구보다도 자주 남자의 눈에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카게야마는 새벽처럼 검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까만 운동복을 위 아래로 갖춰 입고 남자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안녕.. 남자는 비를 들고 뒤늦게 멍청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체육관 앞을 괜히 쓸어대며 카게야마가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나가는 척 하며 창문을 통해 보면 처음 봤을 때처럼 깨끗한 폼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남자는 타케다의 말을 떠올렸다. '저도 배구에 대해 완벽히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남자 역시 배구를 알지 못했다.


카라스노에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남자는 집에 돌아와 스포츠 채널을 신청했다.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 볼 생각이 없던 채널이었다. 남자는 배구의 룰을 폰으로 검색하며 귀로는 배구경기를 들었다. 남자가 배구에 대해 아는 것은 공을 네트 건너편으로 때려내는 스파이크 정도였다. 카게야마는 스파이크보단 토스 연습을 주로 했다. 천재라고 했으니 그냥 연습하는 건 아닐 테고,  토스를 주로 하는 포지션일 것이다. 공격수가 아니라면 세터일까. 남자는 폰에서 눈을 떼고 배구 경기를 보았다. 스파이크만을 훑던 눈은 저절로 네트 근처에서 토스를 올리는 세터들을 찾았다. 화면으로 봐도 빠른 속도였다. 대단했지만 남자는 더 이상 볼만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남자는 어두운 자신의 방 안에 누워 카게야마를 생각했다. 그 녀석도 천재란 소리를 듣고 우쭐대겠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너져서.. 남자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가 축 늘어졌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며칠 동안 체육관을 쓸지 않았다. 한동안 반질반질하던 체육관 길에 다시 흙먼지가 쌓였다. 

 

*

 

"아저씨."


어느 날 새벽 아침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줄곧 의식하던 천재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일?"

 

열쇠가..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카게야마의 설명으론 알 수 없어 결국 체육관을 따라갔다. 제가 열쇠 담당인데, 열쇠가, 넣었다가 빼니까, 빠지지 않아서 당겼더니. 남자는 카게야마의 두서없는 말을 들으며 역시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왠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남자는 카게야마의 뜻대로 체육관의 문고리를 살폈다.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다시 열쇠를 보니 오래된 쇠붙이의 끝이 닳아져있었다.   


"열쇠가 오래 되서 그래. 예비 열쇠를 가져다줄테니까 기다릴 수 있겠어?"

"예. 감사합니다."


안심한 얼굴로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또래보다 큰 남자아이였음에도 표정 때문인지 순간 어려 보였다. 남자는 수위실로 돌아와 받아뒀던 열쇠뭉치를 꺼냈다. 체육관 열쇠를 골라서 가져다주면 보물을 받은 사람처럼 카게야마가 기뻐했다. 열쇠를 받기 위해 내민 손은 남학생답지 않게 잘 정리되어 손톱까지 깨끗했다. 남자의 눈은 반질한 손톱과 뼈대가 굵지 않은 손목, 성장 중인 어깨를 올라가 가는 목 위의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로 핥듯이 올라갔다. 카게야마가 남자를 보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배구부였지? 재밌나봐."

"정말 재밌습니다."


그 말을 하는 얼굴엔 한 치의 불순물도 섞여있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말을 잊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해. 학생.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 때문에 체육관에 부원들이 못 들어가는 줄 알고 놀라서."


감사를 표하는 것도, 부원을 걱정했던 것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단순한 아이였다. 남자는 무심코 투명하게 윤기가 흐르는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머리를 감은 모양인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속은 축축했다. 사나울 것 같은 얼굴은 머리를 쓰다듬을수록 유순하게 남자를 보고 있다. 남자는 뿌듯해졌다. 동시에 어떤 충동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래.. 이름이 뭐였더라?"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카게야마군. 그럼 가볼 테니 또 보자."

"예!"


카게야마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날 하루 종일 남자는 컨디션이 좋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다시 배구 채널을 틀었다. 룰을 이해할 수 없을 때면 남자는 카게야마가 저 자리에 있을 상상을 했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원하는 곳에 공을 던져 넣는 일은 짜릿했다. 남자의 공은 그대로 휘어져 타자들을 농락했지만 카게야마의 공은 팀원들을 위해 정확하게 날아간다. 봉사하는 입장인가. 수수하네. 아마 자신이 배구를 했다면 세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침침한 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카게야마와 함께 뛰는 상상을 했다. 어린 천재와 함께 다시 어려진 자신이 배구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 망상이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남자는 아침에 보았던 카게야마의 깨끗한 손톱을 떠올렸다. 투수처럼 세터도 손이 중요해 잘 관리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공통점이 있었네. 카게야마군. 남자는 그런 말을 중얼거리다가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성욕이 다시 끓었다. 또래보단 키가 크지만, 아직 아이라 부드러울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조그맣고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으로 제 성기를 쥐는 일에 죄책감이 들지 않다니. 


*


남자는 카게야마와 제법 자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보면 할 말이 없어 카게야마가 늘어놓는 배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 되었다. 일부러 체육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카게야마가 인사를 하며 서투르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다함께 새로운 작전을 연습한다, 츠키시마가 또 자신을 놀렸다, 주장이 만두를 사줬다. 대부분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대부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누군가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아보였다. 단단하게 자라날 남자아이의 그런 연약한 부분이, 남자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도 딱히 동급생들과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서, 남자는 몇 번은 자신의 수위실로 밥을 먹으러 오겠냐고 권했다. 어렵게 권했지만 카게야마는 남자를 쉽게 찾아왔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빵을 주면 거절하지도 않고 잘도 먹어치웠다. 남자는 가끔 궁금한 것도 물어보았다.


"카게야마군은 히나타군의 이야기를 자주 하네."


신경 쓰이는 이름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길게 배구 실력에 대한 혹평을 한 뒤에 짧게 덧붙였다. 그래도 그 녀석은 제가 있으면 최강입니다. 확신으로 가득해서 결코 거짓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카게야마와 새벽 연습을 나오던 작은 주황색 머리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역시 신경 쓰였다. 


카게야마군. 그 히나타라는 아이와는 친하니? 

히나타라는 아이는 어때? 

자주 이야기하던데 혹시 그 애도 널 두고 나처럼 음욕을 품을까? 

하긴 한창 때의 고등학생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 애도 너를 반찬삼아 자위를 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카게야마군은 자위를 하니?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남자에게 안기는 일에 대해선? 

남자에게 안기는 상상을 하며 자위를 한 적 있어?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널 봤을 텐데, 나만 이럴 리가 없지. 카게야마군. 원래 먹을 때 이렇게 볼을 잔뜩 부풀리니. 

펠라를 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건 모르겠구나. 

정말 귀엽네. 귀여워. 


아. 그러니까, 카게야마군은 일부러 날 유혹하려고 이렇게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온 거였나?


하고 싶은 말들은 전부 삼켰다. 남자는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얀 카게야마의 허벅지 안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잘 자리 잡은, 그러나 미숙한 근육이 붙어있었다. 저 몸 안에 든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천재성. 그러나 그 천재성이 든 몸은 완성되기 직전의 미완품. 그 유리된 틈 사이로 남자는 자신을 비집어 넣고 싶었다. 좁은 문이 닫히기 전에 강제로 구겨 넣어서 자신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몹시도 사람을 비참한 욕망에 빠트리는 아이였다. 


"아저씨. 잘 먹었습니다."


카레빵을 전부 입에 넣고 우유를 마신 카게야마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남자는 정신없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망상을 멈추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게 누구야!"


아침에 나오자마자 비질을 하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본 얼굴이 남자를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지나치게 반가워할만한 사람 따위 이곳에 없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달려와 반가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겨우 기억해냈다. 고교 때 같이 야구를 했던 타마키 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다. 포수였지만 자신과 많은 합을 맞춰보진 않았다. 실력이 좋지 않아 주로 응원대장을 하던 선수였다. 


"타마키."

"에이스!"


타마키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남자 또한 억지로 웃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난 오늘부터 여기 야구 코치로 근무해."

"그런가. 난."


아마도 자신의 처지는 동창들에게 소문이 났을 터였다. 신문 헤드라인으로 음주운전 사고가 기록됐을 때부터 얼굴엔 철판을 깔고 버텼지만, 실제로 고교 시절을 아는 사람과 마주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타마키는 굳이 말하지 말라는 표정을 하며 손을 잡았다.


"힘들었지."

"...."

"오늘 술 한 잔 어때. 오랜만에 만났는데."


거절하기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화를 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키는 계속 남자의 손을 잡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와중에 몇 명의 학생이 스쳐지나갔다. 카게야마 또한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가, 대화 중 임을 알고 말없이 지나갔다. 남자는 조금 짜증이 났다. 대충 약속을 잡고 헤어진 후 남자는 체육관 근처에서 얼쩡거렸다. 창문으로 카게야마가 팔을 쭉 뻗어 공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신경 쓰이던 주황머리가 그 공을 받아 스파이크를 멋지게 때려냈다. 성공하자 둘이 손을 짝 치며 기뻐했다. 떠들썩하게 좋아하다가 다시 한 번 더 하자고 주황머리가 졸랐다. 카게야마는 그에 응했다. 다시 자리를 잡고, 카게야마가 공을 던졌다.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점이 있어 기억하기 쉬운 배구부원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응..남자는 말을 얼버무리며 자리를 떴다. 다시 놓고 온 비를 잡고 소각장으로 남자는 걸어갔다. 동창도, 주황머리도, 눈물점도. 전부 짜증났다. 카게야마가 보고 싶었다.


*


고등학생 때는 잘 몰랐다. 타마키는 유쾌하게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에는 영업직을 뛰었노라고 타마키는 한탄했다. 고향으로 돌아오곤 싶은데 할 일을 찾지 못해 이리 저리 자리를 둘러보다가, 카라스노에서 야구 코치를 구한다는 말에 얼른 온 거라고 했다. 


"이래 봬도 사회인 야구팀에서 계속 야구를 했거든."


야구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넘어가고서 타마키는 영업직을 뛸 때의 에피소드들을 했다. 꽃뱀에게 걸려 도망쳤던 이야기, 접대하며 지폐를 코에 꽂고 술을 마셨던 이야기. 상사와 같은 여자를 지명해버려 술에 취한 채 셋이 같이 했던 이야기. 지저분한 이야기들뿐이었지만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저속한 타마키는 술에 취한 채 낄낄 웃었다.


"이제 내가 고등학교 코치를 하니 어디 가서 선생이라고 해도 되겠지?"

"야구 선생도 선생이지."

"계속 야구를 할 줄은..."


타마키의 얼굴에 웃음 같은 것이 떠올랐다가 서둘러 사라졌다. 남자는 못 본 체 하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정작 화장실에 가니 사람이 전부 차있었다. 다시 발을 돌려 테이블로 오니 타마키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 그래. 그 자식. 에이스. 어깨 박살나고서 뭐하나 했더니 얼마 전부터 수위 하고 있더란다. 그렇게 잘난 척은 다 하더니!"


타마키는 크게 웃었다. 남자는 타마키의 등 뒤에서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전부 들었다. 남자와 타마키는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타마키보다 다른 포수를 자신이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삼년 내내 에이스였고, 따라서 타마키는 늘 다른 포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겼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나락으로 떨어진 모습을 보여줄 각오도 했었다. 그러나 에이스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남자는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절을 떠올렸다. 천재라는 별명이 붙은 채 마운드 위에서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던졌다. 그것이 자신이었다.


"타마키."


남자는 타마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막 통화 상대에게 여기로 오라고 말하던 타마키의 말이 뚝 끊겼다.


"가볼게."

"아..어.."


어차피 그는 자신이 제대로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구를 못하게 된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망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타마키의 안색이 희게 질리는 것을 보며 남자는 술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마트에서 식칼과 도마를 샀다. 나오자마자 도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술집 앞에서 기다리자 얼마 후 타마키가 허둥지둥하며 뛰쳐나왔다. 남자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잔뜩 취한 타마키는 비틀거리며 어두운 길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왔을 때 남자는 다시 한 번 타마키를 불렀다.


"타마키."

"..누구..?"


남자는 손에 쥔 칼을 깊게 찔렀다. 수천 번 마운드에 올랐던 그의 악력은 여전했다.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남자는 들은 적이 있다. 술에 취해 차를 몰다가 어깨가 부서졌을 때였다. 이렇게 쉽게 부서질 거면서 내가 카게야마와 인사하는 걸 방해하다니. 남자는 칼을 집어 던졌다. 왠지 모든 게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


남자는 학교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아직도 체육관에선 연습이 한창이었다. 배구부원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눈물점과 주황머리조차 나왔다. 카게야마는 가장 늦게 나와 열쇠를 잠갔다. 원래는 이렇게 혼자 정리하지 않는데 다들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부드럽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아직 안 갔구나."

"아저씨?"


카게야마는 놀란 얼굴이었다가 곧 인사를 했다. 남자는 두근거림을 참은 채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있어서 자신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학교 안의 등 밑이었다.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배구를 정말 좋아하네."

"예. 좋아합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카게야마에게 눈을 뗄 수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 또한 야구를 좋아했다.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얼굴은 과거에 그가 두고 온 청춘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남자의 청춘은 진열장 속의 무심한 트로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카게야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는 빛을 받아 유독 환하게 보이는 카게야마를 보며 숨을 죽였다. 이제 알았다. 이제야 알았다. 자신은 카게야마처럼 다시 한 번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모든 질투와 증오와 애정과 사랑을 담아 남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저씨도 열심히 응원할게."

"아, 감사합니다!"

"정말.. 응원할 테니까."


남자가 어둠 속에서 흐느끼듯 웃었다. 그는 그의 부모가 바랐듯 카게야마를 보며 살아갈 힘을 얻고 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뭐든지 쉽게 얻어왔던 그의 영혼은 노력보다는 당장의 성취를 바랐다. 예를 들면 자신과 달리 반짝이는 천재에 대한 욕망을. 망가져버린 남자의 세상이 카게야마를 중심으로 기괴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


미야기현의 지방방송에선 의문의 변사체에 대한 뉴스가 짧게 자막으로 나왔다.


남자는 자신이 준비해야할 일을 했다. 그리고 체육관으로 갔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그 곳에서 카게야마는 몸을 풀고 있었다. 언제나 후덥지근한 땀내가 나는 체육관은 밤 사이에 식어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빛이 쏟아져 체육복을 입은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빛 안에 있는 천재. 언젠가 부서져서 상처 입게 된다면 저 깨끗한 아름다움 또한 사라지게 될까. 남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건 진짜 천재였다.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더욱 도와주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었다. 

 

"카게야마군."

 

깨끗한 물속에서만 사는 결벽한 물고기는 조금이라도 더러운 곳으로 흘러가면 배를 뒤집어 죽는다. 남자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될 것이 두려웠다. 자신처럼 망가지게 둘 순 없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카게야마군. 내가 살려주지 않으면 안 돼. 이 내가 더럽혀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기괴한 정당함이 남자에겐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카게야마가 순순히 남자를 보았다. 빛 속에 가려져있던 암청색의 눈동자가 드디어 보였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답고 미숙한 소년이었다. 감동한 남자가 손을 뻗었다. 

 

"잠깐 도와줄 수 있을까?"


카게야마군. 아저씨는 카게야마군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해. 드디어 내가 할 일을 가르쳐주었으니까.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쁜 일은 아니니까."

 

경계심 없이 배구공을 든 소년이 다가왔다. 의심할 줄 모르는 순수함은 오늘 부로 다신 못 보게 될지 모른다. 아주 찰나의 순간, 남자는 그 무정한 순결을 깨트리는 것조차 아까워졌다. 하지만 카게야마군. 대신 나는 이제부터 너를 고통 없는 세계로 데려가 줄게. 이를테면, 그렇지. 먼저 소개를 해야겠구나. 내 이름은.

 

"..아저씨?"

 

어둡고 푸른 눈 속에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이 비췄다. 카게야마군. 나는 너를 절멸의 세계로 데려가 줄 천사야. 남자는 간지러움을 참듯 숨죽여 웃었다. 처음 남자가 카게야마를 발견했을 때, 토스를 성공시킨 후 웃었던 그 눈부신 얼굴을 흉내 내며. 어쩐지 계속 그 미소가 마음에 남았었다. 이것 봐. 카게야마군. 나도 너처럼 웃을 수 있네.

 

카게야마의 손에 든 배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HQ/카게른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카게] 인터뷰  (7) 2016.01.23
[히카게] 해갈  (15) 2016.01.22
[테루카게] 상흔  (14) 2016.01.20
[킨카게] 솔직해지는 약  (6) 2016.01.18
[히카게] 비늘이 떨어지면  (8) 201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