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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단편

[킨카게] 솔직해지는 약


그 약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지나가다가 일회용 티슈와 함께 받아 가방에 쑤셔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오이카와 선배가 선물이라며 줬던 것 같기도 했다. 가장 납득이 갈만한 출처는 잠결에 홈쇼핑을 보다가 내가 주문했다는 가능성이었다. 나는 약을 살펴보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역시 홈쇼핑에서 받은 게 분명하다. 택배로 받은 물건은 보통 언제 샀는지 모르니까. 나는 다시 약의 라벨로 눈을 돌렸다.


[솔직해지는 약]


우스운 이름이었다. 회사도 성분도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수상한 물약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 약은 딱 두 병이 있었다. 한 병은 내가 마셨다. 쿠니미가 배구 녹화 비디오를 보러 집에 왔을 때였다. 


“이게 뭐야? 킨다이치? 솔직해지는 약?”

“어?”

“킨다이치. 너 통신으로 이런 락교 같은 걸 사?”


비디오를 찾던 쿠니미는, 방 한 구석에 언제부터인가 쌓여있던 약을 꺼내들고 물었다. 그때 잘 모르는 일이라고 그만 뒀어야 했다. 나는 바보 취급을 당하기 싫어 쿠니미의 손에 든 약병을 빼앗았다. 


“나도 이유가 있으니까 사거든!”

“뭔데? 너 속았어. 그 이름 뭐야. 솔직해지는 약이라니.”

“그..일단 있어봐.”


쿠니미의 앞에서 나는 전부 다 마셨다. 솔직히 쿠니미가 말려주길 바랐는데 말리지 않아서 끝까지 마실 수밖엔 없었다. 뭐였더라? 내가 뭘 샀지? 저 약들 언제부터 있었어? 마시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렸으나 알 수 없었다. 약병이라고 적혀있었지만 맛은 물과 똑같아 거부감 없이 쉽게 넘겼다. 쿠니미는 바보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증거인멸? 다 마셔서 없애 버리게?”

“내가 사고 싶어서 산거거든!”

“그러겠지.”


흥미를 잃은 쿠니미는 보려던 배구녹화 비디오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정리가 안 된 집을 뒤지는 쿠니미를 돕기 위해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입이 근질근질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크게 귀에 들렸다. 나는 쿠니미를 불렀다.


“야.”

“왜.”

“나 사실 합숙할 때 네 칫솔 쓴 적 있어.”

“뭐?”

“칫솔 안 가져왔거든.”

“더러워!”

“네 수건 쓴 사람 그때 찾았잖아. 그거 내가 먼저 쓴 거였어.”

“축축했어! 더러워!”

“그리고 나 사실 저번에 싫다고 한 아이돌 ㅇㅇ쨩 좋아해.”


나는 주절주절 말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대신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 귀엽고 예쁘지, 나오는 예능은 녹화도 꼬박꼬박 해서 챙겨봐. 그런데 좋아한단 말하기 부끄러워서 못했어.”

“야. 근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그리고 나 또.. ㅇㅇ쨩말고 진짜 좋아하는 애 있어.”


정색을 하던 쿠니미의 미간은 재밌는 주제로 들어가자 좀 풀렸다. 마음에 묻어둔 이야기가 계속 나와 곤란했다. 친구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놈이 물었다. 

“누군데?”

“카게야마.”


말하고 나서 헉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쿠니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 병 남아있는 약병을 쳐다보았다. 나도 입을 꾹 막은 채 약의 라벨을 확인했다. [솔직해지는 약. 뭐든지 말해버리게 돼요♡] 하트 같은 거 장난이겠지. 쿠니미는 시험하듯 나를 보며 물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아..아니..ㅇ...”

“키타가와의 그 카게야마 토비오, 맞아?”

“으아아!”


입을 다물었으나 이번엔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쿠니미가 의미심장하고 사악하게 눈을 치켜떴다.


“칫솔의 원수. 그럼 한 번 고백해보면?”

“뭐?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싶습니다!”

“여기. 전화.”

“안 돼! 돼!”

“락교 미쳤어.”


쿠니미는 배를 잡고 웃으며 직접 전화를 걸어주었다. 저번 카라스노전 이후로 우리는 카게야마와 연락을 가끔 하고 있었다. 사실 자주 하고 싶었는데 잠깐만, 잠깐만! 나는 속마음조차 제대로 숨길 수가 없었다. 쿠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기회에 한 번 고백해. 어차피 카게야마는 장난으로 알 걸.”

“그것도 안 돼!”

“그럼 제대로 해보던가.”

“부끄럽다고! 게이로 오해해서 피하면 어떡해!”

“장난이었다고 내가 말해줄게.”


전화가 걸렸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카게야마입니다, 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저 감탄했다.


“얘 목소리 진짜 좋지 않아?”


바로 튀어나오는 내 반응에 쿠니미는 땅을 치며 웃었다. 전화 속의 카게야마가 당황해서 쿠니미? 하고 불렀다. 스피커폰으로 설정해 뒀는지 목소리가 컸다. 


“카게야마.”

-어? 킨다이치냐.

“야. 나 너..ㅈ..”

-응?

“나 너 좋아해.”


말하고 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카게야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벌칙게임이었다고 이제 말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너 좋아한다고.”

-...어. 고마워.

“좋아한다니까? 야. 나랑 사겨. 사귀자! 카게야마.”


속에 있는 마음이 밀려나와 우르르 입 밖으로 쏟아질수록 참담했다. 쿠니미의 웃음이 거세졌고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으며 나는 시작과 달리 진지하게 답을 기다렸다. 카게야마의 침묵이 제법 길어졌다. 그리고 툭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던졌다. 


-..그럴까?


놀란 쿠니미의 웃음이 멈췄다. 나는 전화기를 양 손으로 꼭 붙잡았다.


“사귀자고? 나랑?”

-그래.

“가, 갑자기 이렇게?”

-네가 먼저 말했잖아.


카게야마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 녀석. 누구라도 고백하면 받아주는 건가? 근데 그 단순함이 미칠 듯이 좋았다. 



*



“바보 같고 락교 같은 약이 효과가 있었어.”


쿠니미는 일부러 락교와 바보를 동급으로 취급하며 말했다. 효과는 한 시간 후에 전부 다 빠졌다. 다음날 쿠니미에게 카게야마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쿠니미의 앞에서 고백한 꼴이라 정말로 수치스러웠다. 쿠니미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차일 걸 예상했다가 사귀게 되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받아줬으니 된 거 아냐?”

“아니지! 갑자기 고백했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걸.”

“그래도 받아줬으니까.”


뭐 괜찮지 않나. 쿠니미는 마시던 팩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나도 덜 마신 음료를 집어던졌다. 속에 있던 음료가 튀어 마침 지나가던 선생이 화를 내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까? 라고 단순한 목소리로 했던 대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걔 분명히 별 생각 없이 말한 걸 텐데.”

“진짜 널 좋아했을 수도 있지.”

“뭐? 아, 아닐 거야.”

“사실 예전부터 좋아했다든가.”

“설마..그럼 너무 좋은데.”

“속마음이 또 튀어나왔어. 킨다이치.”


쿠니미와 말하는 사이 라인이 울렸다. 아까 ‘뭐해?’ 라고 보냈던 라인을 이제야 카게야마가 확인한 것 같았다. 답은 짧았다. ‘배구연습’ 확인하고 다시 말 걸어볼 구실을 생각하는데 또 라인이 왔다. ‘넌 뭐해?’ 쿠니미가 화면을 들여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가 이런 식으로 누구한테 묻는 거 봤어? 사귀자고 한 말 진심인가 봐.”

“어떡하지.”

“뭐가.”

“정말 나랑 사귀는 건가.”

“꼴 보기 싫다 진짜...”


쿠니미는 서둘러 체육관으로 먼저 가버렸다. 나는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짜 좋아해? 나 좋아하는 거 맞아? 갑자기 고백했는데 안 놀랐어? 아니 그것보다 먼저, 사귀자고 한 뜻이 친구로서 사귀자고 한 게 아니란 건 알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난 지금 너 생각해.’ 라고 썼다가 낯간지러워서 지우고 ‘나도 지금 배구연습.’ 이라고 보냈다. ‘카게야마. 주말에 볼래?’ ‘어디서?’ ‘시내 버거집에서.’ ‘그래.’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미뤄둔 채 약속부터 잡았다.   



*



카게야마의 속마음이 듣고 싶었다. 주말에 카게야마를 만나 약을 먹일 거란 말을 쿠니미에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나가던 오이카와 선배가 듣고 기겁했다.


“킨다이치. 범죄를 저지르면 안 돼. 부활동에 지장을 줘요.”

“아, 아닙니다!”

“그럼 오이카와씨가 들은 건 뭘까?”


동공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렸다. 쿠니미가 대신 말했다.


“킨다이치에게 솔직해지는 약이 있거든요. 그걸 카게야마에게 먹이겠대요.”

“굳이 토비오쨩에게 그런 수고를...? 그리고 솔직해지는 약이라니, 그런 약 들어본 적 없어.”


사귀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난을 치려는 거라고 대충 둘러댔다. 오이카와 선배는 약의 출처부터 수상하게 생각했다. 선배가 준 게 아니었구나. 역시 홈쇼핑이 맞는 것 같았다. 먹은 지 며칠이 지났지만 부작용은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오이카와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비오쨩 유치해서 거짓말 같은 건 못하지 않아?”

“그..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예를 들면?”

“..비, 비밀이라든가...요.”


목소리가 작아졌다. 오이카와 선배는 납득한 것 같았다. 쿠니미는 딴청을 부렸다.


“건방진 토비오쨩의 비밀을 알게 되면 오이카와씨한테도 알려줘야 돼?”

“예!”

“아참. 그렇지. 약 효과는 믿을 수 없지만 한 가지 믿을만한 건 있겠네. 토비오쨩이 거짓말중인지 아닌지.”


오이카와 선배가 그렇게 말하곤 내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몹시 선배다운 조언이었다.



*



“킨다이치.”

“카게야마..”


카라스노 운동복을 입고 나온 카게야마를 보며 나는 입 끝이 느슨하게 풀렸다. 카게야마는 별 반응이 없었다. 버거집 안으로 데리고 가서 뭘 먹겠냐고 물어보니 무조건 두 개를 먹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예쁘장하게 생겨서 예전부터 잘 먹는 놈이었다. 나는 내가 시켜서 올라갈 테니 먼저 가있으라고 짐을 맡겼다. 고개를 끄덕이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카게야마를 보며 주머니 속의 병을 만지작거렸다. 주문 후 조금 기다리면 금방 버거 네 개가 쟁반에 감자튀김과 함께 가득 쏟아졌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구석으로 가, 파란 빨대가 꽂힌 콜라 속에 약을 넣었다. 다 넣으려니 넘칠 것 같아 얼른 몇 모금 마셨다. 약을 넣고 제 풀에 찔려 눈을 돌리니 어린애가 수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먹어.”


카게야마는 콜라부터 쭉 마셨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윽. 콜라 싱거워.”

“그, 그래?”


나는 약속을 잡고서야 카게야마와 단 둘이 만나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란 것을 깨달았다. 키타가와 때는 곧 잘 왔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잠시 아련한 기분이 되었는데 카게야마가 자신의 콜라를 밀어두고 내 콜라로 손을 뻗었다. 놀라서 손으로 막자 눈썹을 위로 들어올린다.


“네 꺼 마셔볼래.”

“..왜? 니 꺼 마셔.”

“싱거워.”

“일단 다 마시면 리필 되잖아.”

“그럼 바꿔달라고..”

“잠깐!!”


아무래도 쉽게 다 마시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카게야마를 달래가며 겨우 반 정도를 마시게 했다. 이 정도면 약효가 돌지 않을까 싶어서 빤히 쳐다보는데 뭘 봐? 란 답이 돌아왔다. 


“저기, 카게야마.”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버거를 먹으려던 카게야마가 벌린 입을 다물지 않고 나를 쳐다본다. 진지하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일단 물어보고 싶었다.


“나랑 사귀자고 한 거 진짜야?”

“응.”

“왜? 어째서? 아니 우선, 사귀자고 한 게 친구로서가 아닌 건 알지?”

“당연하지. 멍청이냐.”


카게야마가 혹독하게 대답했다. 콜라를 바꿔주지 않아 표정에 드러난 기색은 좋지 않았다.원하는 대답을 들었는데도 기쁘면서도 복잡한 기분이었다.


“너 게이였어?”

“게이..?”

“남자 좋아했냐고.”

“너밖에 좋아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카게야마가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렇구나. 나밖에 좋아해본 적 없어서 모르...깜짝 놀라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정작 카게야마는 멀쩡한 얼굴로 감자튀김까지 입에 넣고 있었다.


“뭐?”

“중학교 때부터 너 좋아했으니까, 네가 저번에 고백했을 때 좋았어.”

“왜 그렇게 간단한 거야? 그리고 내가 고백 안했으면 넌 말 안하려고 했어?”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카게야마는 목에 막혀 다시 싱거운 콜라를 쭉 빨았다.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고 결국 나는 내 콜라를 주었다.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네가 고백한 거 듣고 나도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어.”

“....”

“계속 신경 쓰이고, 공 안 받아줬을 때 되게 짜증나고 그랬으니까.”

“..또 배구냐.”


카게야마는 내 콜라를 받아 마시곤 짜증을 냈다.


“이게 더 싱거워.”

“뭐?”

“여기 콜라에 물 타나봐.”


나는 허둥지둥 잔을 내려다보았다. 파란 빨대가 꽂혀있는 콜라에 약을 넣었다. 카게야마가 반 이상 진작 마셔버린 콜라잔에 꽂힌 건 빨간 빨대였다. 그 것을 깨닫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카게야마에게 고백을 했다. 카게야마는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러면 그냥 기뻐하면 됐는데, 또 다시 이 녀석과 사이가 틀어질까봐 나 혼자 초조하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은.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녀석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건 나뿐이었다. 카게야마는 혼자 웃는 내가 이상한 것 같았다. 왜 그래? 하고 묻는 눈동자가 형광등 빛 때문에 파랗게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그 눈이었다. 


“와.. 나 진짜 바보 같다.”

“...왜 그래?”

“한 가지만 더.”

“뭐.”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알려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토비오쨩의 진심? 그런 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잖아. 


“너 그럼 내가 좋아, 배구가 좋아?”

“당연히 배구지.”


무슨 질문도 아닌 걸 물어보냐는 듯 카게야마가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지나치게 솔직한 카게야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진심이었구나.”

“...혼자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너 오늘부터 나랑 1일이야. 못 물러.”

“네가 나 좋다고 말한 건 삼 일 전이니까 3일이지.”


사귄지 얼마 안 된 애인은 고지식하게 내 말을 고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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