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아시 케이지는 기본적으로 물욕이 없는 편이었다. 세간에 알려져 있는 뱀파이어들의 보편적인 성정이었다. 그들의 생은 길었고, 그렇기에 대체로 특별한 무엇을 아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카아시의 친절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만은 아카아시의 특징이었다. 짧게 살다 죽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오만함은 아니다. 그저 그는 사라지기에 반짝이는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또 한 번 내게 눈부시게 와 닿기를.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런 소망을 품고 있었다.
*
"아카아시씨...?"
아카아시는 쓰러진 여자를 곱게 벽에 기대게 한 후 뒤를 돌아보았다. 밤이었다. 달이 뜨지 않았어도 이탈리아의 골목은 가로등이 켜져 밝았다. 그리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빛 아래 서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을 들었던 건 몇 년 전의 텔레비전에서였다. 이탈리아의 배구 리그로 진출한다는 뉴스였다. 십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카게야마는 조금 더 키가 컸고 단단해진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눈이 부셔 가늘게 눈꺼풀을 접었다. 카게야마가 아카아시에게로 다가왔다. 반가움은 경악으로 바뀌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카아시의 곁에 쓰러져있는 여자와, 아카아시의 손에 묻은 피를 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게야마는 멈칫했다가 다시 한 번 아카아시를 불렀다.
"아카아시씨."
"...카게야마, 토비오."
어떤 기억도 잊지 않는 머릿속에서 아카아시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빠르게 들춰냈다. 처음 만났던 건 도쿄의 합숙에서였다. 그 후로도 아카아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을 떠날 때까지 배구 시합을 할 때마다 만났었다. 또한 경기가 아닐 때라도, 아카아시는 카게야마를 만났다. 카게야마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카아시씨, 지금 사람을.. 죽인 건가요?"
심각한 말투였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카게야마는 고지식하면서도 귀여운 면이 있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카아시가 아껴왔던 모습 그대로였다.
"카게야마. 오랜만이네."
"대답해주세요."
"십년, 정도인가."
"아카아시씨."
"이리 와."
"...."
"내가 무서워?"
카게야마는 아카아시의 손에 묻은 피를 다시 한 번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고요해졌다.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가까워질수록 카게야마의 당황이 느껴졌다. 여전히 푸르게 아름다운, 고등학생의 아카아시가 서늘하게 웃어주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아카아시에게로 왔다. 아카아시의 깨끗한 손이 카게야마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사실 그렇게 일본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카아시씨."
"고등학생에겐 알릴 수 없는 사정이란 게 내게도 있었거든."
아카아시는 키스하듯 입을 벌렸다. 카게야마는 아카아시의 입 속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발견했다. '아카아시씨. 뱀파이어였어요?' 카게야마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쓰러진 여자 쪽으로 눈을 살짝 돌렸다가 다시 카게야마에게 입을 열었다.
"강제로 흡혈한 건 아니야. 서로 합의했으니 잠시 후엔 일어날 거고."
"...."
"못 믿겠어?"
"아니오."
카게야마는 말없이 아카아시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 또한 어둠 속에서 카게야마의 뺨을 쓰다듬었다. 할 말은 많았으나 무엇부터 시작해야할 지 몰랐다. 카게야마의 목울대가 꿀꺽거리며 움직였다. '긴장했어?' 아카아시가 속삭이듯 물었다. 카게야마 역시 작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긴장한 것 같은데."
"...당연히 긴장하죠.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더구나 내가 뱀파이어였다는 걸 처음 알았지."
"...."
"목말라? 자꾸 침 삼키네."
아카아시는 그 말을 하고는 미소 지었다.
"자꾸 챙겨달라고 보채지 마. 지금은 내 손에 너밖엔 없어."
그리고 동시에 둘은 언젠가의 여름을 떠올렸다.
*
새로운 속공을 성공시킨 카게야마는 몹시 들떴다. 합숙이 끝난 후 시작된 바비큐 파티까지 즐거운 일 뿐이었다. 한창 먹을 때의 남자아이들이 모여서 고기를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카게야마도 열심히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고기를 먹고, 굽는 걸 기다리지 못해 옆에 익어있는 야채들을 쑤셔 넣었다. 천천히 먹으라는 소리를 누군가 카게야마에게 해줬지만 머리와 달리 손은 경쟁적으로 젓가락질을 해댄다. 그리고 결국 목이 메어 가슴을 두드릴 때 어디선가 물잔이 내밀어졌다. 누가 줬는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카게야마는 얼른 그것을 받았다.
"고, 맙습..읍..!"
물과 함께 간신히 넘긴 카게야마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사교성이 없었다. 합숙 기간 내내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말한 적도 드물었다. 타학교의 세터들에게 궁금한 점은 많았어도 먼저 말을 걸긴 어려웠다. 그래서 물잔을 준 사람도 카라스노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돌아본 자리에는, 몇 번 눈인사를 나누었던 후쿠로다니의 세터가 서있었다. 순간 당황해서 어, 하고 짧게 탄식하듯 소리를 내면 아카아시가 고개를 돌렸다. 깊은 남색 눈동자는 왠지 겨울을 떠오르게 했다. 마냥 차가울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는 걱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좀 괜찮아?"
"아, 예! 감사합니다!"
"천천히 먹어. 꼭꼭 씹어서."
"예.."
"아카아시, 엄마 같네."
고기가 가득 든 접시를 들고 지나가던 후쿠로다니의 주장이 크게 웃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한 번 아카아시 쪽을 쳐다보면 그는 느긋하게 고기를 뒤적이고 있었다. 다들 먹기 바쁜데도 누군가를 챙길 수 있는 여유가 마치 어른 같았다. 고작 해야 일 년 정도의 차이일 텐데도 카게야마에게는 아카아시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카게야마는 우물쭈물하다가 아카아시의 테이블로 갔다. 아카아시는 살짝 놀라 눈썹을 위로 올렸다.
"도와드릴까요?"
"어? 괜찮아."
"저도, 그, 도와주셨으니까.."
별로 도와준 건 없는데.. 아카아시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카게야마는 아카아시의 옆에서 젓가락을 들고 같이 고기를 구웠다. 한 번 말을 걸자 말하기가 쉬워져, 카게야마는 도와준다는 핑계로 아카아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평소엔 어떤 트레이닝을 하십니까? 아까 보니까 후쿠로다니에서는.. 그리고 아카아시는 갑자기 제 옆에 붙어온 카게야마가 싫지 않았다.
"핸드폰 있지?"
"예? 예."
"줘볼래?"
끊임없는 질문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의 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아카아시의 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다면 편하게 물어봐."
"...!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입을 크게 벌린 채로 웃으며 기뻐했다. 아카아시는 보물처럼 폰을 건네받는 카게야마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오늘 처음 제대로 대화해본 타교의 후배가 웃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보고 싶었다. 부드럽게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은 유리에 반사된 것처럼 빛이 났다. 하지만 건드리기 아까워져 아카아시는 그대로 손을 내렸다. 대신 젓가락으로 카게야마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얼떨결에 고기를 받게 된 카게야마는 융통성도 없이 꿀꺽 삼켰다. 큽.. 또 다시 목이 막혀 가슴을 치는 카게야마에게 아카아시가 다시 물잔을 내밀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후배네."
"갑자기, 고기 주시니까..!"
"응. 내가 잘못했어."
"...그게 아니라....아닙..아닌데.."
아카아시의 탓을 했다가 사과로 돌아오자 카게야마는 오히려 더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아카아시는 희미하게 웃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고등학생이 되어 배구부 활동을 하는 것도, 아카아시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오랜 삶을 사는 뱀파이어들은 평범한 인간의 생활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지금이 좋았다. 그러다보면 가끔은 좋은 것들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닿아보고 싶네.' 아카아시는 자신이 준 물잔을 들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며 드물게도 욕심이 들었다.
"그리고 질문이 다 떨어져도."
아카아시의 말에 카게야마의 머리가 번쩍 들렸다.
"계속 전화해."
"....?"
"전화 안 할 거야?"
"아, 아니에요. 하겠습니다."
카게야마는 열심히 아카아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카게야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카아시는 꾸준히 연락을 하고, 만났다. 사귄다고 해도 좋은 사이였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프로 배구팀에 들어갈 때쯤 아카아시는 일본을 떠났다. 어차피 뱀파이어와 인간의 시간 축은 맞지 않았다. 카게야마를 더 만나게 된다면 동의 없이 카게야마를 물어 뱀파이어로 만들어버릴 것도 무서웠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카게야마에게 사랑을 빌미로 평생의 선택을 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카아시는 손에 잡은 카게야마의 허리를 다시 꽉 쥐어보았다. 카게야마가 그를 불렀다.
"아카아시씨."
"응."
"그럼 왜 그때 말 안 하셨습니까?"
"말했다면 넌 아마 내게 널 물어달라고 했을 테고, 나는 어린애의 말을 믿고 확 물었겠지."
"...고교 졸업 후니까 성인이었습니다."
"아직도 내 눈엔 어려보이는 걸."
카게야마의 입술이 삐죽 내밀어졌다. 아카아시는 물욕을 가져본 일이 거의 없었다. 모든 일들은 아카아시에게 똑같이 특별하였다. 그러나 가끔, 카게야마를 끌어안은 것처럼 다시 한 번 가슴 벅찬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긴 생애에 다시 한 번 그런 우연이 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본 다음에 이탈리아를 선택했던 건 과연 변덕이었을까. 우연을 만들고 싶었던 욕망이었을까. 아카아시는 알 수 없었다.
여자가 깨어나려는 듯 고개를 움찔했다. 아카아시는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이제 비켜주자.' 카게야마는 여자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아카아시의 손을 잡았다. 어디선가 떠들썩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큰 길을 나오자 관광객들로 온통 붐볐다. 그래도 둘은 손을 놓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불쑥 말했다.
"갑자기 떠나야했던 이유는 알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뱀파이어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요."
"보통 그렇지."
아카아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은 뜨지 않았으나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무슨 축제라도 하는 걸까. 반짝거려서 아름다웠다. 카게야마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응."
"이제 또 떠나시는 건가요?"
"..글쎄."
아카아시는 대답을 망설였다. 카게야마는 중얼거렸다.
"가시기 전에 전화로 잘 살라고 하셨죠."
"그랬지."
"잘 살았습니다. 열심히 배구도 했고, 돈도 많이 벌었고."
"그래 보이더라."
"...그렇지만 역시 아카아시씨를 계속 생각했어요."
"...."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아서, 떠나신 줄 알고."
"...."
"후쿠로다니를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요."
"...."
"살던 집에도 부모님은 안 계셨고, 정말로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미안하단 말을 해야 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 때까지 걸었다. 카게야마는 터덜터덜 잘도 따라왔다. 오히려 잡은 손은 카게야마 쪽이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두운 밤, 아카아시가 물었다.
"나랑 있으면 네가 귀찮아질 거야."
"상관없습니다."
"..그때 너 어렸어. 지금까지 날 계속 좋아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날 좋아할까?"
"아카아시씨는 아직도 저 좋아하시잖아요. 그럼 그때 몇 살이셨습니까? 고등학생 나이는 아니었건 거죠."
갑작스런 카게야마의 공격에 아카아시는 할 말을 잃었다. 백년이 지난 이후로 아카아시는 나이를 세는 것은 잊은 상태였다. 백 살이 넘은 남자가 고작 스물 몇 살의 남자에게 쩔쩔 맨다. 당황스러우면서도 아카아시는 그게, 정말로 싫지 않았다. 말이 없는 아카아시에게 카게야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씨."
"..응."
"폰 번호 알려주세요."
"...."
다시 한 번 만난다면, 그 때도 여전히 카게야마를 욕심낼 지 아카아시는 궁금했었다. 드물게 가슴 속에서 피어오른 욕망은 아직도 식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결국 피식 웃었다.
"정말.."
"...."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폭죽이 멀리서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번에야말로 아카아시는 그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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