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피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몸도 왠지 가뿐했다. 카게야마는 상궁의 시중을 받아 식사를 하다가 귀가 간지러워 긁적였다. 호들갑스럽게 상궁이 물었다.
"마마. 불편하십니까?"
"귀가 조금 간지럽구나."
어린 궁녀가 네코의 밥을 챙기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마마. 어디서 마마의 이야기를 하시나봅니다."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하면 귀가 간지러운 법입니다."
"..누가....."
카게야마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상궁은 궁녀를 얼른 내보냈다.
1~2 : 동궁
3~4 : 서궁
5~6 : 남궁
7~8 : 북궁
9~0 : 섭정궁
카게야마의 옷을 골라 입히고 머리를 손질하러 다가온 상궁은, 아직도 생각에 잠긴 카게야마를 보고 말을 걸었다.
"마마. 아이들이 실없이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고민이십니까."
"오늘은 남궁에 갈 것이다."
그러니 머리는 그냥 두거라. 주인의 명에 상궁은 불안한 얼굴로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는 있는 그대로 아름다웠으나, 약속이라고 해도 예의는 아니었다.
"그러면 마마. 모자를 쓰고 가십시오."
"모자?"
아직 쌀쌀하니 모자를 쓰고 가시면 흉이 아닙니다. 상궁이 내놓은 명안에 카게야마는 얼른 모자를 가져오게 했다.
"하긴 예전에도 남궁에 갈 때 모자를 썼었지."
추운 날 남궁에 갔을 때는 그 안이 무척 따뜻해, 엉덩이를 떼기가 힘들었다. 카게야마는 적당한 모자를 쓰고 남궁으로 갔다.
*
남궁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훈훈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홀 : 쿠로오
짝 : 코즈메
"코즈메님을 뵙습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하면 귀가 간지러운 법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어젯밤 코즈메님도 귀가 간지러우셨을까? 카게야마는 아침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마주친 코즈메는 평소의 그대로라 그저 인사만 할 뿐이었다.
"잘 잤어?"
"예. 코즈메님께서도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의젓하게 인사를 하는 카게야마에게 대답하는 대신, 코즈메의 시선은 모자에 닿았다.
홀 : 그거
짝 : 응..
"그거."
코즈메는 모자를 보며 물었다.
"어제 나 때문에 쓴 거야?"
"예..장식없는 머리로는 인사를 못 간다고 상궁이 말하는 바람에."
"대단한 사람을 옆에 두었나보네."
조금 웃은 코즈메가 손짓했다. 가까이 와봐. 카게야마가 다가가자 코즈메의 무릎 위에 있던 고양이가 쪼르르 달아났다. 안타깝게 쳐다보는 사이 코즈메의 손이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아 느슨히 끌었다.
"앉아."
"예."
홀 : 직접
짝 : 예쁜 모자
단 둘이 있을 때 아무런 경계심없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여자는, 지금도 코즈메에게 쉽게 다가왔다. 남자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남장을 하고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정말 여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코즈메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머리를 저었다. 그래도 어제 자신을 당황시켰던 손가락들을 보면 괜히 억울해지는 것이었다. 코즈메는 카게야마를 앉게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즈메님?"
카게야마가 뒤를 돌아보려했다. 가만히 있도록 카게야마의 어깨를 살짝 누른 후 코즈메는 모자를 벗겼다. 조그만 모자 속에 숨겨져있던 검은 머리가 출렁이며 흘러나왔다. 어제도 보았지만 참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다른 사람 머리 만지는 것, 기분 좋다고 했지?"
코즈메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깊숙하게 손가락을 폭포같은 머리카락 속에 넣어보았다. 부드럽게 엉기는 머리카락이 손끝에서 걸렸다. 카게야마는 당황해서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끄덕였다.
"예. 하지만 제 머리카락은 짧아서."
"..아니야."
코즈메는 천천히 손으로 머리를 빗어보았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만져봐야겠단 생각을 한 적도 없었지만..코즈메의 손가락들이 카게야마의 속에 닿는다. 카게야마는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다. 잠시 머리를 빗어보던 코즈메는 슥슥 머리카락을 모으고는 무엇인가로 묶었다. 꽁지처럼 툭 튀어나온 머리카락들이 앙증맞았다.
"...."
코즈메가 보기에 썩 잘 어울렸다. 코즈메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묶은 팔찌를 둔 채 자리로 돌아왔다. 새의 꽁지깃처럼 삐죽 튀어나와 선이 고운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코즈메가 움직이는 방향을 천천히 따라가는 얼굴은 머리를 묶어 더욱 작아보였다. 무어라고 더 말을 할까 코즈메가 망설이는 사이 쿠로오가 나왔다.
"켄마. 마마님과 소꿉놀이라도 한 거야?"
서투르게 묶인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한 쿠로오가 웃으며 반겼다.
내심 쿠로오의 다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아쉽게 쿠로오를 기웃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꽁지머리가 들썩이며 흔들렸다. 마마님, 꼭 새 같네. 쿠로오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드러난 뒷목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큰 새가 어디 있습니까."
"커다란 표범은 봤잖아? 큰 새도 어디에 있을지도."
쿠로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이 반가워 카게야마가 얼른 물었다.
"그러면 오늘도 그 표범을 볼 수 있나요?"
홀 : 마마님이 원한다면
짝 : 마마님이..
기대로 빛나는 눈을 본 쿠로오가 크게 웃었다.
"뭐야. 마마님. 보고 싶어?"
"ㅇ..예!"
"쿠로. 어렵지 않잖아."
코즈메가 거들었다. 쿠로오는 과장된 탄식을 내뱉았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켄마. 좀 더 애를 태우려고 했는데."
"좋아하잖아. 보여줘."
"켄마는 마마님한테 친절하네."
"..별로.."
코즈메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코즈메 쪽을 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면 검은 짐승이 카게야마의 앞에서 도사리고 있다. 놀라기도 전에 카게야마는 감탄섞인 한숨을 토했다.
"멋집니다."
"꽤 괜찮지?"
짐승의 모습이었으나 뻐기는 듯한 표정이 그대로 보였다. 슬슬 가까이 오던 산쇼쿠가 쿠로오를 보고 화들짝 놀라 다시 도망갔다. 별도 뜨지 않은 밤을 모아둔 것처럼 깊고 검은 털. 카게야마는 거대한 흑표범 앞에 섰다.
"만져봐도 될까요?"
"만져달라고 변한 거야."
짐승이 웃었다. 물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긴장해 카게야마는 조심히 손을 뻗었다. 코즈메는 등을 기댄 채로 쿠로오와 카게야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괜찮으니 마음대로 쓰다듬어봐."
"네 몸이 아니거든. 켄마."
정말 너무하네. 쿠로오는 투덜거리면서도 카게야마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심조심 카게야마는
홀 : 머리 위를
짝 : 턱 밑을
머리 위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쿠로오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건 안될 일 같았다. 카게야마는 망설이다가 짐승의 턱 밑을 살짝 긁었다. 쿠로오가 큭큭 웃었다.
"내가 고양이야? 마마님?"
"아. 저.."
"기분 좋으니까 더 해봐."
쿠로오는 카게야마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턱밑을 긁는 여자를 보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빤히 응시하고 있으면 손이 금세 떨어졌다. 손이 떠난다. 확 물어버리면 놓지 않을 텐데. 쿠로오의 아쉬움을 모르는 카게야마가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마마님. 이제 내 위에 타볼래?"
"..! 괜찮습니다."
코즈메만이 쿠로오의 저속한 농담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쿠로오가 턱을 내밀었다.
"또 만져줘."
"..표범이 아니시잖아요."
"표범이 나고 내가 표범인데 차별이 심하네."
쿠로오에게서 슬쩍 몸을 빼는 카게야마의 뒷머리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쿠로오 테츠로
○: 34 (+2)
◇: 17 (+1)
카게야마 토비오
□: 37 (+2)
코즈메 켄마
○: 26 (+2)
◇: 17
카게야마 토비오
□: 29 (+2)
카게야마는 남궁을 떠나기 전 머리를 묶고 있던 것을 풀었다. 단순한 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예쁘게 세공된 유리팔찌. 카게야마는 얼른 코즈메에게 팔찌를 돌려주었다.
"가져도 되는데."
"아닙니다. 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내가 무리한 요구를 했는데도 들어줬잖아."
코즈메는 카게야마에게 잠깐 고개를 숙여보라고 했다. 모자를 쓰기 전이라, 생각없이 머리를 숙이면 코즈메의 손이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닿았다. 슥슥 쓰다듬는 손길은 왠지 부끄러웠다.
"기분 좋지."
무심히 쓰다듬던 코즈메의 손이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남궁을 떠났다.
*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단패궁에 돌아온 카게야마의 얼굴이 밝아, 주인을 따르는 상궁도 화색이었다.
"오늘 모자만 쓰고 가길 잘했다."
"그러십니까."
"네가 잘 골라줬구나."
"....."
갑자기 상궁을 칭찬하니 무슨 일인가 싶어 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상궁을 무시하고 네코를 안아 올렸다. 꼬리를 흔드는 것을 무릎 위에 눕히고 배를 쓰다듬자, 혀를 내밀고 좋아했다.
1~2 : 후원
3~4 : 궁도실
5~6 : 서고
7~9 : 단패궁
0 :
내일이면 단패를 뽑았다. 그 생각을 하니 겁이 나면서도 이상하게 몸이 쑤셨다. 카게야마는 낯선 감각을 무시했다. 달거리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설마 성교에 익숙해진 몸이 다른 이를 그리워하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같이 놀까?"
설익은 욕정을 지워낸 카게야마가 네코에게 공을 굴렸다. 헥헥거리며 공을 쫓아가다가 벽에 부딪히는 강아지를 보고 카게야마가 소리내어 웃었다.
홀 : 손님이 찾아왔다
짝 :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카게야마와 강아지와, 시중을 드는 궁녀들만이 단패궁을 오갔다. 늦도록 네코와 돌아준 카게야마는 결국 강아지의 체력에 두 손을 들었다. 조그만 것이 체력도 좋구나, 하며 주둥이를 잡아 흔들면 네코가 낑낑거리며 혀를 내밀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안은 채로 손을 내밀면 유순하게 핥아온다. 분홍색 혀가 날름거리며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간지러워 손을 떼면 이번엔 카게야마의 뺨과 입가를 핥았다.
"아이고. 마마. 더럽습니다."
"괜찮다."
"아이고.."
저녁을 가볍게 먹은 카게야마는 네코와 함께 단패궁 앞을 거닐었다. 단풍나무 옆 작은 호수로 가보면 어느새 뜬 달이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저것 봐라. 네코. 달이 안에 있구나."
달 속에 단풍잎이 떨어졌다. 강아지가 그것을 잡으려 캉캉 짖었다. 흐르는 단풍잎을 따라가다 위를 보면 총총히 빛나는 별들로 눈부셨다.
6일 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