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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46. 2월 7일



길었던 밤이 점점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금방 눈을 감았는데 일어나면 아침이라고 카게야마가 투덜거렸다. 식사를 돕던 상궁이 피곤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피곤하다고 하면 오늘 인사는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카게야마가 피식 웃으면 할 말이 없는 상궁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피가 완전히 멎었다. 피가 멎으면 상처는 아물기 마련인데 어째서 달마다 피를 흘려야하는 걸까.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1~2 : 동궁

3~4 : 서궁

5~6 : 남궁 

7~8 : 북궁

9~0 : 섭정궁



"오늘은 어디에 가시겠습니까."

"음.."

"동궁에 가지 않으신 지가 제법 되었습니다."


섭정궁에도, 라는 말을 상궁은 삼켰다. 카게야마는 동궁의 우시지마를 떠올렸다. 갈 때마다 서신을 읽거나, 쓰고 있었다. 아마 한 나라의 황제이니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차례대로 여러 궁을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남궁에 갈 것이다."

"또 남궁에 가십니까."


상궁은 근심하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챙겼다.


*


다른 분들도 좋았으나 카게야마는 남궁에 오면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이국적인 남궁의 분위기가, 카게야마를 설레게 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남궁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홀 : 쿠로오 

짝 : 코즈메


홀 : 사람 

짝 : 표범



쿠로오가 있었다. 느슨하게 뒤로 기대어 있다가 카게야마를 보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마님. 쿠로오를 보러 왔구나."

"쿠로오님을 뵙습니다."

"어서 앉아."


뜨끈한 곳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가 크게 하품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게야마는 궁금하여 안쪽을 살폈다.


"코즈메님께선 안에 계십니까."

"응. 식사 중."


언제나 코즈메는 늦은 식사를 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로오님. 전에 혼자 식사하시는 건 싫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단월일날 만났던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 점심을 대접하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같이 드실 수는 없는 건가요?"


쿠로오는



홀 : 싫어하거든 

짝 : 켄마가 혼자 먹는 걸 좋아해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물음에 천천히 대답했다.


"싫어하거든."

"..예?"

"내 앞에서 먹는 걸 안 좋아해."


어째서, 라고 물으려던 카게야마는 늘 쾌활한 쿠로오의 눈이 어둡게 잠긴 것을 알아차렸다. 공기가 달라진다. 카게야마는 망설였다. 쉽게 물어도 괜찮은 걸까.



홀 : ..그렇다면

짝 : 어째서..?



"어째서..?"


그러나 궁금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게야마가 묻자 쿠로오는 씩 웃었다.


"마마님. 켄마에게 궁금한 게 많아?"

"아..그게."

"좀 질투나네."


쿠로오는 의미없이 중얼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켄마가 음식을 잘 못 먹어."

"..예?"

"식도를 다쳤거든."


뭘 씹고 넘길 때마다 힘들어 해. 그래서 천천히 먹는 거야. 쿠로오는 그렇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유난히 오랫동안 식사를 하던 코즈메를 떠올렸다. 겉으로 봐서는 멀쩡한 줄 알았기에 어디가 아픈 거라곤 생각조자 못했다.


"그리고 맛도 못 느끼니까.."


쿠로오는 한숨을 쉬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음식 먹는 게 고역이겠지."


카게야마는 아픈 친구를 둔 기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금방 울적한 얼굴이 된 카게야마를 쿠로오가 달랬다.


"우울한 이야기는 하기 싫었는데, 마마님. 울지 마. 응?"

"우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코즈메가 건넨 떡을 받아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엔 그저 단 떡을 받아 맛있게 먹었지만, 이제야 생각해보니 먹기 힘들어 권한 것일지도 몰랐다. 진작 알아차리지 못해 죄책감이 들었다. 카게야마가 그런 말을 하자 쿠로오는 조금 웃었다.


"그 녀석은 아마 마마님이 맛있는 걸 먹길 바랐을 테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괜찮다니까."


카게야마가 코를 훌쩍이고 있으니 코즈메가 안에서 나왔다.


"..쿠로? 또 카게야마를 놀린 거야?"


수상한 분위기에 코즈메가 얼른 물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코즈메는 의심스럽게 쿠로오를 쳐다봤다. 


"마마님은 내가 좋아서 우는 거라니까."

"....카게야마. 쿠로가 놀렸다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코즈메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울어?"


살짝 눈물이 고여있는 얼굴을 걱정하며 코즈메가 물었다.



홀 : 코즈메님께서 

짝 : 눈에 뭐가 들어가서



"코즈메님께서.."


카게야마는 코 안쪽까지 슬픔이 찡하게 고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 다리를 잘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아마 코즈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게야마는 겨우 눈물을 삼키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쿠로오를 걱정하는 코즈메의 마음도, 코즈메를 걱정하는 쿠로오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코즈메님께서, 나와주시지 않아서요."

"...어?"

"코즈메님이 계시지 않아서."


쿠로오는 더듬더듬 변명하는 카게야마의 말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하고 웃으며 코즈메에게 어서 앉으라고 손짓한다.


"켄마. 마마님이 너때문에 울었대잖아."

"..뭐, 뭐야?"

"질투나네. 마마님. 켄마만 좋아하고."


기분 좋아보이는 얼굴로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놀렸다. 얼른 자리에 앉은 코즈메가 카게야마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조금 진정되자 부끄러워졌다. 카게야마는 손수건으로 콕콕 눈가를 찍었다. 코즈메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쿠로오에 대한 의심은 줄은 것 같았지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카게야마. 원래 잘.. 우는 편이야?"

"..아닙니다."


부끄러워져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홀 : 울지 마

짝 : 마마님



"마마님. 울었으니까 이제 웃으면 안되겠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쿠로."


코즈메가 말렸으나 쿠로오는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이 난대잖아."

"...예?"

"그런 말 못 들어봤어? 덕분에 나는 매일 면도를 해. 나중에 확인해 봐."


혼란스러워진 카게야마가 얼른 코즈메를 쳐다보았다. 코즈메는 고개를 젓는다. 농담이란 걸 알아차린 카게야마가 쿠로오님! 하고 불렀다.


"쿠로오님. 그런 말엔 속지 않습니다."

"안 되는데. 마마님 엉덩이에 털나면 큰일이잖아."

"아..안 속는다니까요."


카게야마는 코즈메 쪽을 자꾸 쳐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코즈메는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해주었다.



쿠로오 테츠로

○: 36 (+3)

◇: 18

카게야마 토비오 

□: 39 (+2)


코즈메 켄마

○: 28 (+2)

◇: 17

카게야마 토비오 

□: 31 (+3)



카게야마를 배웅하려고 나온 쿠로오가 생각났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고보니 오늘 마마님 단패를 뽑잖아?"

"예."

"누굴 뽑을까."

"저도 모릅니다."


쿠로오는 한 쪽 눈만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이럴 때엔 빈 말이라도 쿠로오님을 뽑고 싶어요, 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제가 괜히 말씀드렸다가 지키지 못하게 되면."


카게야마의 대답을 들은 쿠로오는, 옷깃을 여며주었다. 큰 손이 매무시를 단정하게 정리해준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 눈을 들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가 설핏 보였다. 다정했다.


"마마님. 조심해서 가."


쿠로오에게 인사를 한 카게야마는 단패궁으로 돌아왔다. 궁녀들이 카게야마를 반겼다.


*


언제나 그렇듯 궁녀들은 카게야마가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카게야마는



홀 : 궁녀들 말대로 

짝 : 그래도 나갈거야



제발 있으라는 듯 압박하니 괜히 뿌리치기도 어색했다. 카게야마가 얌전하게 궁녀들의 손을 따르자 상궁부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코는?"

"안쪽 방에 두었습니다."

"심심하겠군."


카게야마는 새로 지은 옷을 입었다. 몇 번을 입어보아도 입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벗겨지기 쉬운 옷은 참으로 제구실을 못했다. 치장을 하다가 추워서 에치, 하고 재채기를 하니 상궁이 얼른 탕파를 안겨주었다.


"마마."


카게야마에게로 상궁이 패를 가져왔다.


"뽑으십시오."


고를 수 있다면 과연 자신은 어떤 이름을 고를까. 카게야마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 : 오이카와 토오루    

2 : 우시지마 와카토시 

3 : 츠키시마 케이      

4 : 쿠니미 아키라      

5 : 이와이즈미 하지메 

6 : 히나타 쇼요        

7 : 쿠로오 테츠로      

8 : 킨다이치 유타로   

9 : 코즈메 켄마        

0 : 리레주의 지정으로



카게야마는 패를 뒤집었다.


[쿠니미 아키라]


순간 세상은 정적이 되어 고요해졌다. 카게야마는 다른 패들을 뒤집어보았다. 상궁은 이유를 몰랐으나 카게야마가 그렇게 하도록 두었다. 나머지 패들을 확인해본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이 맞군."

"섭정궁에 알리겠습니다."


..고를 수 있다면 과연 자신은 어떤 이름을 고를까. 카게야마는 상궁이 쿠니미의 이름을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언젠가 다시 올 거라고 생각했으나 미루었던 날이었다. 바로 오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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