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돌려 다시 선택을 합니다
오사와는 카게야마가 오자마자 달려가 손을 잡았다.
"폐하."
간절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오사와를 외면할 수 없어 그대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겁니다. 폐하."
"...."
"제발 제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오사와의 작은 손이 카게야마를 꼭 붙잡았다.
홀 : 응하지 않았다
짝 : 응하지 않았다
사흘이었다. 오사와는 카게야마를 사흘 동안 꼬박 찾아왔다. 카게야마는 두 번 중 두 번을 거절했다. 마지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사와의 손을 놓았다. 울거라 생각한 오사와의 얼굴은 눈물 대신 비 온 후의 호수처럼 고요해보였다.
"역시, 저와는 가지 못하시는 건가요."
"오사와 너라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제가 킨다이치 대장군이나, 섭정 전하였다면 폐하께선."
"..? 그 두 명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이지."
오사와는 카게야마를 우러러 보았다. 카게야마는 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사와는 순간 위엄을 느끼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 나라를 지켜야한다. 오사와, 내가 도망치면 나는 위왕이었던 것도 아니게 되겠지. 그러고 싶진 않구나."
"..폐하께선 결국 나라를 우선하시는군요. 어째서이신가요? 폐하를 한시도 편하게 둔 적이 없는 자리입니다."
"나라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인 것이다."
어찌 들으면 오만하기까지 한 말에 오사와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은 학정을 일삼은 왕이었던 나의 죄."
너까지 얽히게 할 수는 없으니, 들어주기 어려운 청은 이제 그만 하거라.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사와는 단패궁을 나오기 전 작게 웃었다.
"폐하께선 결국 한번도 제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군요."
그녀는 딱 한 마리의 토끼만을 원했다. 카게야마는 단순히 토끼를 부탁했다고 알았을 것이다. 너무 위험한 사냥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음을, 다치지 마시라는 뜻인줄은 결코 몰랐다.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 했다.
"그렇구나.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어."
"무슨,"
"네가 혼자 돌아다니게 두지는 않는다고 했었는데."
"아아."
"아쉽게 되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다가는 꾹 참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오사와는 서둘러 인사하고 궁을 나왔다. 카게야마는 오사와가 궁 밖을 나갈 때까지 문에 기대어 지켜보았다.
*
오사와는 후두둑 눈물을 쏟으며 걸었다. 흉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까 미루던 슬픔이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제 앞에 선 남자의 그림자에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홀 : 쿠니미
짝 : 오사와 대신
아버지인 오사와 타카히로였다. 오사와는 눈물을 닦았다.
"단패궁을 보고 오는 길이더냐."
"그렇습니다."
"마마께서는 평안하시더냐?"
숫제 비웃는 투였다. 오사와는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거짓을.
"이미 폐인이 되시어 꼴이 말이 아닙니다. 어찌나 가련한지 그만 눈물이 나와 아버님께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더냐. 그런가."
단패궁 안은 정해진 남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들일 수 없었다. 궁녀들 또한 엄격하게 제한된다. 아마도 대신은 위왕이 되어 몰락한 여자의 꼴이 궁금했을 것이다. 오사와는 그의 입맛에 맞는 말을 거짓으로 꾸몄다. 대신은 흡족해했다. 그리고 품에서 꾸러미를 꺼냈다.
"네가 단패궁에 들렸단 말에 가져온 것이다."
"무엇입니까?"
"후쿠로다니에서 들여온 귀한 차다. 다시 돌아가 드리거라. 허나 피곤하실 수 있으니 따로 인사는 드리지 말고 놓고 오너라."
은밀한 목소리가 오사와의 귀를 간질였다. 오사와는 알겠노라 대답하곤 꾸러미를 받았다. 단패궁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다른 길로 빠졌다. 꾸러미를 풀어보니 진한 향의 차가 나왔다. 오사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정원의 다리 위에 올라갔다. 금색 비늘을 가진 잉어들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입을 뻐끔거렸다. 오사와는 찻잎을 꺼내 한 봉지를 아래로 털어냈다. 잉어 몇 마리가 받아먹었다. 잘 받아먹고 물 속에 들어가 다시 노는듯 하더니 잠시 후 배를 보이며 떠올랐다. 오사와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아 꾹 참았다. 설마했으나 역시 독이었다. 그녀는 꾸러미를 잘 안보이는 곳에 묻은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
오사와가 떠난 후 카게야마는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1~5 : 산책을 했다
6~9 : 궁도실에 갔다
0 : 간식을 먹는다
궁녀들이 호들갑스럽게 카게야마에게 겉옷을 입혔다. 어린 궁녀 한 명이 생각난듯 말했다.
"마마. 동궁에서 주신 호랑이 가죽은 어찌할까요?"
"..? 바닥에 깔아놓으면..?"
"마마.. 귀한 것을 깔개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쓰느냐."
"망토를 만들어 걸치시면 무척 좋으실텐데요."
가죽으로 망토를 만들면 따뜻하고 보기 좋으실겁니다. 궁녀의 말에 카게야마는 꺼내온 가죽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던 가죽이니 옷으로 만들어 걸치면 멋질 것이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이려하자, 나이 많은 궁녀가 비로소 어린 아이의 말을 깨닫고 아니 될 말이라 아뢰었다.
"호랑이는 남자 왕족이 걸치는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여인이시니 목도리와 모자를 만들어 쓰시면 될 듯 합니다."
"흠. 모자나 망토나 몸에 걸치는 것인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대로 망토를 만들도록 해라."
"아이고, 마마."
"누가 감히 여자가 호랑이 가죽을 걸치느냐고 묻는다면, 동궁에 가라고 해라. 왜 가죽을 줬냐고 직접 물으라고 해."
어린 궁녀가 울상을 지었다. 아마 혼날테지만 카게야마는 무시하고 밖을 나왔다. 해지기 직전의 노을이 무척 아름다웠다.
홀 : 누군가와 만난다
짝 : 홀로 산책을 즐긴다
카게야마는 해가 질 때까지 정원을 산책했다. 그러고보니 그 동안 카게야마는 이토록 오래 궁에 붙어있던 적이 없었다. 제가 살던 곳인데도 새롭게 느껴졌다. 느긋하게 산책을 한 카게야마는 애완동물이라도 길러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분 좋게 단패궁으로 다시 돌아오자 궁녀들이 서둘러 카게야마를 이끌었다.
"마마, 서궁에서 오셨습니다."
"서궁?"
카게야마의 얼굴이 흐려졌다.
"누가 오셨더냐."
"아오바죠사이의.."
홀 : 황자 전하께서
짝 : 황자 전하와 호위께서
"아오바죠사이의 1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홀로 오셨더냐."
"그러합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제법 오랜 시간 기다리셨습니다."
낮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도 인사를 가라고 권했었다. 역시 이와이즈미의 말을 듣는 것이 옳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자신을 싫어하기에, 얼굴을 보이면 더 싫어할 줄 알고 피한 것이다. 카게야마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님을 뵙습니다."
"...."
"오이카와님."
"...흐응."
"오이카와님을 뵙습니다."
"...."
카게야마는 제 목소리가 안 들리나 싶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옅은 푸른색의 옷자락이 먼저 보였다. 눈을 더 위로 올리면 오이카와 토오루는 의도적으로 풍기는 가벼움을 두른 채 카게야마를 쳐다본다. 그는 카게야마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머리색을 하고 있었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상냥한데, 자신만을 미워하는 건 역시 오이카와가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리라.
"고개, 들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며 카게야마는 다시 인사했다.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님을.."
"...."
"뵙습니다."
"...고개 들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 잘 할 수 있으면서 나는 직접 찾아와야 인사를 해주는 거야?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질책에 카게야마는 할 말이 없어 눈만 내리깔았다. 솔직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와 만난 것은 여덟살 때의 일로, 카게야마는 아오바죠사이에서 일년을 보냈다. 강해지자 마음먹었던 어린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의 무예는 몹시도 아름답고 대단해보였다. 역시 성국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아오바죠사이의 왕족들은 모두 출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오바죠사이라고 전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직 오이카와 토오루가 대단한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국의 왕자가 쫓아다니던 것이 귀찮아서일까, 라고 생각도 한 적이 있으나 다른 왕자들은 잘 대해주었다. 아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오이카와는 자신을 싫어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를 만났다며."
"그렇습니다."
"인사를 오라고 했는데도 안 오겠다고 했다던데."
"예."
"우와. 엄청 당당하네. 토비오쨩."
"오이카와님께서 불편하실테니 그랬습니다만.."
카게야마의 대답에 오이카와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불편해하는 게 아니라?"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널 단패궁에 밀어넣었지. 그래서 내가 불편했던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겠어?"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홀 : 침묵
짝 : 부정
카게야마는 예상치못한 오이카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아오바죠사이의 황자는 그가 당연히 할 일을 했다. 카게야마는 죽을 수도 있었다. 아오바죠사이에게 대적하려 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죽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일에 감사해야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로 오이카와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카게야마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오이카와의 웃던 얼굴이 점차 굳었다. 공기가 바뀐다. 카게야마는 뭐라 대답해야할 지 몰라 눈만 깜박이며 오이카와를 올려 보았다.
"역시 그렇지?"
"예?"
"토비오쨩. 너는.."
"오이카와님?"
"갑자기 나타나선 겁도 없이 활을 가르쳐달라고 했지. 이젠 여자로 나타나다니, 정말 헷갈린다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턱이 올려졌다.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의 어두운 청색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품고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자라는 자각도 없어보이는 표정에 오이카와는 맥이 풀렸다. 여자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오이카와 자신이 남자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불쾌했다.
"왠지 열받네."
"...? 예?"
오이카와는
홀 : 정말 싫구나
짝 : 입을 맞췄다
오이카와는 비죽 웃었다.
"정말 싫다."
"...."
"토비오쨩. 나는 네가 정말 싫어."
손 안에 있는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오이카와는 상처를 주고 싶었다. 순수하고 무결한 영혼. 오이카와가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한 점을 보고 달려가는 화살같은 아이였었다. 아마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하더라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곧은 영혼이 언젠가는 부서져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먼저였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아마 영영 오이카와로서는 알지 못하는. 그런 세계일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에 담담히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 눈엔 슬픔이나 분노와는 다른 이상한 체념이 떠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
"오이카와님이 싫어하시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오이카와는 손을 탁 놓았다. 카게야마는 얼얼한 턱을 흔들어보다가 오이카와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예."
"...토비오쨩. 아마 다음날 밤에 볼 땐 좀 더 귀여워져있으려나."
"...?"
" 남자에게 안기는 법 정도는 잘 배워둬? 나는 가르쳐줄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까."
오이카와는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갔다. 카게야마는 턱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오이카와 토오루
○: 10
◇: 10 (+2)
카게야마 토비오
□: 10
침상에 걸터앉아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성교를 경험한 일은 당연히 없었다. 네코마도 자신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희롱하려한다고 화를 냈지만, 자신은 이제 그런 존재였다.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과 앞으로의 밤을 보내야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익숙해져야 했다. 혹시 오이카와님. 그 말을 하러 오신걸까. 싫어하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조언을 하고 가는 오이카와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세게 잡혔던 턱이 아팠다. 카게야마는 끙끙거리며 눈을 감았다. 단패를 뽑은지 삼일이 지나간다.
우스운 말이나 카게야마는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27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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