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잠을 설쳤던 탓인지 카게야마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으니 별 일은 없었을 것이라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물론 궁녀들이 초조하게 교대로 카게야마를 깨우려했던 일은 그의 기억 속에 없었다.
목이 말라왔다. 카게야마는 누구 없느냐, 하고 말을 하려다 마른 목이 아파 입을 다물었다. 식은 차라도 마실 생각으로 일어서자 창가 너머로 궁녀들이 작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귀가 좋다지만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귀를 닫은 채 카게야마는 찻주전자를 들었다가, 순간 익숙한 호칭이 들리자 궁녀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대장군께서 아프셔서 오늘은 입궁하지 않으신대."
"병사들은 훈련이 없다고 좋아하던걸."
킨다이치가 아프다고? 카게야마는 식은 차를 마시며 의아해했다. 체력이 튼튼한 걸로는 제일가는 남자였다. 카게야마는 체력 빼곤 아무것도 없다고 일부러 혹평을 했으나, 사실 그만한 체격과 체력을 타고난 사람은 없었다.
"나도 멀쩡한데 왜 제가 아프고 난리야."
카게야마는 불쑥 기분이 상했다. 찻주전자를 쾅 내려놓자 궁녀들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는 서둘러 문 앞에 서서는 마마, 마마 하며 늦은 아침인사를 하였다.
"네코마분들이 진작 오셔서 마마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보셔야할 줄로 압니다."
궁녀들은 서둘러 카게야마의 소세를 돕고 옷을 입혔다. 네코마라는 이름에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양이를 생각했다. 남쪽에 있는 네코마는 과거에 아오바죠사이만큼 교류가 있었다곤 하나, 어느 순간 끊겨 이제는 가장 먼 시라토리자와보다 소식을 몰랐다. 카게야마는 목걸이를 걸어주는 궁녀에게 누가 왔는지를 물었다.
"1황자님이신 쿠로오 테츠로님, 네코마 재상의 후계이신 코즈메 켄마님이 오셨다 들었습니다."
"그런가."
카게야마는 시큰둥하게 대답하였다가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었다.
"이봐. 네코마라는 이름은 역시 고양이가 먼저 생각나지?"
"마,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고양이는 귀여운데.. 하면 안되나?"
궁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절대로 네코마의 앞에서 고양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기로 한 후 단패궁을 나왔다.
후 불자 하얀 입김이 나왔다. 카게야마는 눈 앞에서 하얗게 어는듯한 입김을 보았다. 카게야마에게도 추운 날씨였다. 네코마는 따뜻한 나라라는데 추워하지 않을까. 카게야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후원을 거쳐 이어진 남궁으로 들어갔다. 네코마의 호위들이 문을 열고, 궁녀는 문 밖에서 멈췄다. 홀로 남궁의 정원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얼어붙은 호수가 보였다. 괜히 카게야마는 호수의 앞에 멈췄다. 얼어있는 호수 사이에 무언가가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풀어놓은 물고기다. 홍색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두어 번 꿈틀거렸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죽었나?
카게야마는 언 호수의 표면을 손으로 문질렀다. 살얼음이 버석거리며 깨졌으나 단단한 속얼음은 그대로였다.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물고기를 꺼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얼음을 부수기 직전, 카게야마의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홀 : 삼색 고양이가
짝 : 신기한 머리색의 남자가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 본 카라스노의 황자만큼은 아니었으나 역시 작은 남자였다. 그보단 머리색이 눈에 띄었다. 정수리쪽은 검은데 아래쪽은 색이 빠져 있다. 마치 밑에서부터 거꾸로 금발이 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카게야마의 곁에 다가와 손목을 붙잡고 떼어냈다. 제법 오랫동안 얼음을 짓누르던 손끝은 파랗게 변해 있었다. 남자는 카게야마를 힐끔 보았다가 자신도 호수 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카게야마 역시 다시 한 번 물고기를 살폈다. 역시 물고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겨울잠이야."
"..겨울잠?"
"물고기들도 겨울잠을 자. 억지로 꺼내면 죽어."
"몰랐네. 그건."
겨울잠은 곰처럼 커다란 짐승만이 자는 줄 알았다. 카게야마는 신기한 듯 물고기를 살펴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눈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우리를 만나러 온거지?"
"..네코마의?"
"들어와. 쿠로가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난 코즈메 켄마. 졸린 얼굴을 한 남자는 카게야마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한 후 앞서 걸어갔다. 그다지 무서워보이진 않았다. 늦었다고 화를 내지도 않는다. 카게야마는 코즈메의 뒤를 따라갔다.
코즈메 켄마
○: 10
◇: 10
카게야마 토비오
□: 10 (+1)
"이야, 켄마가 여자를 데려오다니. 놀라운 걸."
카게야마는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남자의 손을, 얼떨결에 잡았다. 먼저 내밀었기에 반사적으로 나간 손이었다. 남자는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카게야마의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곤 코즈메를 향해 웃었다.
"켄마. 네 그녀의 손이 차잖아. 어째서 올 때 손을 잡아주지 않은 거야."
"...바보같아. 쿠로."
둘이 티격대는 사이 카게야마는 얼른 남궁의 안을 둘러보았다. 한참 추운 겨울의 날씨가 꿈인 것처럼, 남궁의 안은 곳곳에 난로가 놓아 따뜻했다. 일부러 옷을 두껍게 입은 카게야마의 몸이 조금 더워졌다. 코즈메는 가장 가까우며 푹신하게 자리가 깔아져있는 난로 앞에 먼저 앉았다. 그리고 옆의 책을 펼치고선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키타가와의 단패궁이셔."
"아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쿠로오 테ㅊ.."
"인사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와서 손을 녹여."
네코마의 1황자, 쿠로오 테츠로가 상냥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난로 앞에 이끌었다.
"춥잖아. 안 그래?"
"..궁 안에 들어오니 제법 덥습니다."
"그럼 옷을 좀 벗어도 좋잖아."
"...."
"음. 방금은 좀 오해를 살만했다."
책을 읽던 코즈메는 무심히 옆의 방석을 집어 쿠로오에게 던졌다.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난로 앞에서 손을 녹였다. 눈 앞의 남자는 확실히 계속 웃고 있었으나 어딘지 대하기 어려웠다. 카게야마는 특이한 향의 차를 얻어마셨다. 쿠로오는 네코마에서만 나는 차라고 말했다. 하얀 잔에 담으니 주황빛의 찻물색이 고왔다. 맛은 새콤해서 입에 달라붙었다. 카게야마가 열심히 차를 마시는 모습을 쿠로오는 웃으며 지켜보았다. 코즈메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맛이 괜찮지?"
"예. 맛있습니다."
"네코마에선 여자들이 많이 마셔. 난 별론데 대부분 다 좋아하더라고."
"예에.."
"그리고 주로 임신하면 다시 찾지."
카게야마는 찻잔을 든 손을 멈췄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서 잔을 가져가 다시 차를 채워주었다. 다시 잔이 채워졌지만 카게야마는 손을 대지 못했다.
"오는 도중 서신을 받았는데, 우리를 제외하고 이미 단패를 뽑기 시작했다며."
"..예."
"탓하려는 건 아니야. 조금 놀랐을 뿐이지."
"...."
"어차피 이 이상한 제도는 회임을 해야 끝이 나니까."
쿠로오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카게야마는 그의 본심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인데."
홀 : 따뜻하지?
짝 : 잤어?
"잤어?"
"...예?"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처음은 아니었으면 좋겠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지나치게 따뜻한 공기. 처음 먹어보는 맛의 차. 한쪽 눈을 부스스한 앞머리로 내린채, 다정하게 웃는 쿠로오. 이야기와 무관하다는 듯 옆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코즈메. 이 곳은 이상하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랫배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달마다 찾아오는 고통이 오기 직전이었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처녀를 상대해본 적이 없어서 좀 불편한 것 뿐이라."
"...."
"별 뜻은 없고. 그저 서로 즐기면서 하면 좋잖아? 그렇지? 켄마."
"난 별로, 상관없어."
"아. 그렇게 나오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잖아."
쿠로오는 투덜거린 후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카게야마의 얼굴이 굴욕으로 물들었다.
홀 :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짝 : 알 필요 없습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카게야마는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책을 보던 코즈메가 카게야마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미 충분히, 충분하도록 능숙하니, 쿠로오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아. 그럼 다행이고."
"...."
"앞으로 잘 부탁해."
상냥하게 웃는 쿠로오에게 카게야마는 꾸벅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나왔다. 코즈메가 혀를 찼다.
"화가 난 모양인데."
"음. 첫 인상은 실패인가?
"최악."
쿠로오가 미소를 띈 채 자리에 기댔다.
"하지만 저렇게 고집 센 얼굴을 보면, 괴롭혀주고 싶어지잖아?"
쿠로오 테츠로
○: 10 (+1)
◇: 10 (+1)
카게야마 토비오
□: 10 (-2)
입 안에 새콤한 맛이 감돌았다. 기분이 나빠진 카게야마는 남궁을 나오자마자 침을 뱉었다. 지나가던 궁녀들이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도망가버린다. 카게야마는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후에는 오사와가 온다고 했다. 이런 마음으론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홀 : 궁도실
짝 : 산책
그렇다. 그는 당장 활이 쏘고 싶었다. 온 몸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지길 원했다. 여복을 몸에 걸친 것도 잊은 채 카게야마는 궁도실로 달려갔다. 왕이 쓰던 궁도실은 일반 병사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출입이 허락되는 것은 왕이 허락한 귀족과 왕이 허락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 뿐. 그리고 그 곳엔 이미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카게야마?"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놀란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님!"
"반갑네. 카게야마. 인사를 하려고는 했는데, 네가 바빠보이더라."
그제서야 카게야마는 자신이 서궁에 한 번도 인사를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이카와 자식이 얼마나 투정을 하는지 귀에 못이 박히는 줄 알았다니까."
"면목없습니다..이와이즈미님."
카게야마는 머리를 푹 숙였다.
모든 서쪽 평국의 왕자는 살면서 한 번은 아오바죠사이에 방문해야했다. 카게야마는 여덟살 쯤의 일이었다. 그렇게 어릴 때 아오바죠사이에 가는 왕자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왕이었던 카게야마의 아버지는, 그가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기 전에 아오바죠사이의 눈도장을 찍길 원했다. 어린 카게야마는 그 곳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났다. 그의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 하지메도 만났다. 동갑인 쿠니미와 킨다이치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처음 느껴보는 동경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곧 머리 위에 얹은 장식을 보고 팔을 내린다. 카게야마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안 어울리지요."
홀 : 뭐..조금. (카게야마 호감도 +2)
짝 : 잘 어울려.(카게야마 호감도 -1)
"...아냐. 아주 잘 어울리는 걸."
카게야마는 순간 이와이즈미의 눈과 마주쳤다.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는 표정이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 하긴 자신이라도 알고 지냈던 남자가 이제와서 여자라고 말한다면 전처럼 대할 순 없을 것이다. 아오바죠사이를 떠날 때, 좋은 왕이 되라고 마지막 인사를 해주던 이와이즈미.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 카게야마는 서러워졌다.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 10
◇: 10
카게야마 토비오
□: 10 (-1)
이와이즈미는 기본적으로 나이 어린 동생들을 귀여워하는 성품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갑자기 입술을 삐죽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며 비로소 얼굴이 풀렸다. 카게야마가 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믿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임신시켜야한다고 말했을 땐 더욱 믿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인사를 재촉하지 않았던 마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확인하는 것이 꺼려졌다. 막상 보니 옷만 바뀐 것 뿐 내용물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활 쏘러 온거지? 오랜만에 구경 좀 해볼까?"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조심스럽게 이와이즈미가 내미는 활을 받았다.
"제가 이와이즈님의 활을 써도 괜찮을까요?"
"뭐, 그 녀석도 더 잘 쏘는 사람의 손에서 기뻐할테니까."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허락했다. 카게야마는 묵묵히 활을 받아 활없이 시위를 당겨보았다. 퉁, 하는 울림이 음악같았다. 카게야마는 활을 쏘며 조금 위안을 받았다. 이와이즈미는 옆에서 지켜보며 간간히 박수를 쳐주었다. 여전히 잘하네.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그 말에 겨우 조금 웃었다.
홀 : 그대로 돌아간다
짝 : 인사의 마무리
"아참. 카게야마. 기왕 만난 김에 오이카와도 보고 가지 그래? 인사 다니는 것 정도는 이제 마무리해야지. 어차피 곧..만나게 될테고. "
이와이즈미는 말끝을 흐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첫 날 이미 오이카와님을 뵈었습니다."
"그렇지만."
"미리 선약, 도 있고요.."
카게야마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오이카와님은 저를 싫어하셔서, 제가 찾아가면 폐가 될 거에요."
"...그래?"
"오이카와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음.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전부 오이카와의 탓이니까, 알겠다. 말은 내가 전해둘게."
이와이즈미에게 활을 건넨 카게야마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궁도실을 나왔다. 습관처럼 이와이즈미는 나중에 보자, 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바로 떠오른 생각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카게야마는 단패궁으로 돌아왔다. 궁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사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오사와는 카게야마가 오자마자 달려가 손을 잡았다.
"폐하."
간절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오사와를 외면할 수 없어 그대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일겁니다. 폐하."
"...."
"제발 제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오사와의 작은 손이 카게야마를 꼭 붙잡았다.
응했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지금 위험한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같이 도망치기에는 오사와는 약했다. 또한 그 오사와 대신의 적녀이기도 했다. 성국의 왕족들은 모두 도착해있다. 자신이 도망친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릴 것이다. 병사들은 오늘 훈련이 없다고 했지만 섭정 쿠니미의 사병도 만만치 않다. 도망치다가 잡혀도 문제였지만, 운이 좋아 도망친다면 성왕족들은 자신을 기만했다하여 키타가와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나라와 한 명의 여인은 과연 같은 값을 지니고 있을까. 카게야마의 이성은 냉정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 번째는 거절할 수가 없다. 그저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가자. 오사와."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이 몹시 따뜻했다.
*
둘은 궁을 빠져나왔다. 병사들이 없어 경계는 느슨했다. 오사와는 미리 생각해둔 것처럼 능숙하게 궁의 샛길을 통해 담을 넘게 했다. 어떻게 이 길을 알았냐고 묻자 오사와는 평소 봐뒀던 길이라 말했다. 카게야마는 담을 넘기 전 주위를 살폈다. 새까만 어둠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손을 잡아 담을 넘는 것을 도와주었다. 오사와를 끌어안고 뛰어내린 카게야마는 서둘러 준비한 평복을 걸쳤다. 오사와 역시 빛이 바랜 평복을 입었다. 어엿한 남자와 여자 한쌍으로 보였다. 오사와는 카게야마의 팔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깊은 산 속에 이미 살만한 곳을 마련해두었습니다."
"조용해질 때까지 그 곳에서 지내다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함께 가셔요."
오사와는 카게야마와 함께 궁 밑의 거리로 내려갔다. 늦은 시각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그 중 같이 앉아있는 남녀 한쌍에게 오사와는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오사와가 이야기할 동안 귀를 기울이며 경계했다.
"됐습니다."
오사와는 기쁜 얼굴로 카게야마를 찾았다.
"미리 저 둘에게 오늘 수도 밖의 성문을 나가라고 하였어요. 아마 추적자들은 오늘 새벽 남녀가 수도를 나갔단 소식에 저 뒤를 쫓을 것입니다."
카게야마는 패물을 챙긴 남자와 여자가 서둘러 주포에서 빠져나가는 모양을 보았다. 과연 오사와의 말대로 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홀 : 약속을 지킨다
짝 :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카게야마와 오사와는 산을 올랐다. 저 멀리 궁의 불빛이 보였다. 밤길이라 자꾸 오사와가 넘어져, 카게야마는 결국 오사와를 업었다. 오사와는 고개를 내저었으나 결국 카게야마의 등에 업혔다. 카게야마가 혼자 움직이는 것이 더욱 빨랐다. 카게야마의 등 뒤에서 오사와는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카게야마에게서 뜨끈한 열이 올라 좋은 냄새가 났다. 아마도 카게야마의 체향일 것이다.
"폐하?"
"음?"
"..아닙니다."
오사와는 지금 이 상황이 행복한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카게야마의 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코 카게야마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사와양."
오사와가 카게야마를 방문하고 돌아가던 날. 대장군 킨다이치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장군님."
킨다이치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사와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킨다이치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다."
킨다이치는 단정적인 말투로 오사와에게 말했다. 마치 그 역시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사와는 그렇게 확신했다.
"폐하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권했겠지."
"...말하실 건가요?"
"...만약이다. 만약에."
킨다이치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냈다.
"폐하께서 너를 선택하신다면 이 곳으로 우선 몸을 피해라."
"여기가 어딘가요?"
"내가 폐하를 모시려 했던 곳이다."
이 산 속에, 집을 지어놨다. 본래 지도에도 잘 안 나오는 곳이니 사람이 거의 들어오지도 않고. 산짐승이 나오긴해도 폐하의 실력이라면 충분할테니..킨다이치는 오사와에게 몇 번이나 지도의 위치를 설명한 후 다시 품에 넣었다. 오사와가 물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장군님. 당신이라면 저보다 더 안전하게 폐하를 모실 수 있을텐데."
"....."
"당신, 폐하보다 권력을 선택하셨군요. 그, 섭정왕 전하를.."
"..알지도 못하면서, 건방진 소리하지 마라. 여자."
오사와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킨다이치는 금방이라도 오사와를 베어버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모실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했을 것이다."
"...."
"..폐하께선 아마도 끝까지 버티시겠지. 그러나 혹시라도 네 멍청한 눈물에 마음을 돌리신다면."
"...."
"그 땐 네가 죽을 힘을 다해 폐하를 지켜."
킨다이치는 성국의 왕족이 모두 도착한 마지막 날, 일부러 병가를 내어 궁에 오지 않았다. 병사도 해산을 시켰다. 경계는 충분히 느슨했다. 마지막 기회임을 오사와는 알았다. 킨다이치가 만들어준 기회를 잡아 오사와는 카게야마를 손에 넣었다. 그러므로 오사와는 카게야마의 목을 끌어안고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폐하. 저는 결코 킨다이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어요. 킨다이치님께서도 그걸 원하지 않으시겠죠. 저 역시 폐하가 저만을 생각하기를, 저만을 생각해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척 깊은 산 속이었다. 빼곡하게 하늘을 가린 나무 덕에 달빛도 비치지 않는다. 오직 감으로 카게야마는 땀을 뚝뚝 흘리며 걸었다. 등 뒤의 오사와는 카게야마에게 간간히 제가 외우고 있는 방향으로 안내했다. 가벼운 여자의 무게라도 산길을 업고 오른다면 몸에 부담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정도로 오사와에게 깊은 정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오사와를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처음 오사와를 만난 나이는 카게야마가 왕이 되기 전이었다. 카게야마는 정략적으로 오사와 대신의 딸을 받아들였다. 귀족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오사와의 딸을 이쪽의 패로 쥐고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거라고 쿠니미가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여인과 동침하지 못한다. 어느 여자든지 상관없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오사와는 곱게 차려입고 카게야마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궁에는 여자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공식적인 키타가와의 마지막 '남자'였고, 궁녀들은 여자로 볼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사와는 카게야마가 본 첫 여자였다. 있는 듯 없는 듯, 말수가 적은 여자였다. 한달에 몇 번 만나 같이 차를 마셨다. 겨울에는 털을 안 쪽에 댄 장갑을 만들어 보냈고, 여름 사냥터에 갈 땐 부적이 담긴 주머니를 주었다. 카게야마는 그 당연한 친절에 제대로 응한 적이 없었다. 오사와도 카게야마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오사와가 카게야마에게 매달린 적이 있었다. 오사와는 카게야마와의 첫 만남에서 사람들을 물리길 청하고는 말했다.
"왕자 전하. 제게 흠이 있으니 혼약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게 무슨 말인가."
덜덜 떨면서도 오사와는 카게야마에게 말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전하는 저같은 여자에게 더럽혀지시면 안되는 고귀한 분. 아버지가 왕후의 자리가 탐나 벌이신 일이오니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무슨 말인지 설명하지 않으면 대신을 불러 설명하도록 하겠다."
"...저는.. 어릴 적, 변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길을 잃었다. 단 사탕을 주는 사람이 있어, 마음놓고 따라간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고통 속에 울던 오사와는 삼일만에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일로 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선 이 일을 모르시니 저만 벌하시고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네 아비가 모를 리 없다는 거짓말은 분명 내가 벌을 내릴까 걱정했기 때문이겠지."
"전하!"
"...허나 아이를 낳는 것만이 여인의 일인가?"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눈을 보며 물었다.
"지금의 나는 네가 필요하다. 넌 죽을 각오를 하고 내 앞에 설 정도의 용기가 있어. 그러니 내 옆에서 나를 지탱할 정도의 배포도 있겠지.
아이를 낳아달라 너를 내 옆에 두는 것이 아니다."
"...."
"나는 네가 필요해. 약속하겠다. 내가 왕이 되고 네가 나의 아내가 된다면, 적어도 네가 혼자 돌아다니게 두지는 않으마."
오사와는 입을 다물고 카게야마를 쳐다보다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 후로 오사와는 종종 찾아와 차를 마셨고 가끔 짧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카게야마의 기억에, 썩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오사와가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았다.
"폐하. 저 곳인듯 합니다."
두 명이 살면 딱 맞을 것 같은 소박한 거처였다. 오사와가 이 날을 위해 급히 지었다기엔 오래전부터 있었던 흔적이 있는 것이 이상했다. 카게야마는 서둘러 안으로 오사와를 데리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서자 잘 넣어둔 가구들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번잡스럽지 않은 모양이라 좋구나."
카게야마의 말에 오사와는 그저 웃었다.
카게야마의 취향에 꼭 맞는 곳이었어도 오래 머무를 순 없었다. 오사와는 두꺼운 이불을 찾아내어 카게야마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오사와 자신이 덮을 것은 없어보여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산 속의 밤은 춥다. 오사와. 들어와라."
"폐하께서 불편하실 겁니다."
"앞으론 부부로 살아야하는데 내외를 하겠느냐."
그 말을 들은 오사와가 조심스럽게 카게야마의 옆에 누웠다. 서늘한 밤이었으나 옆의 온기로 따뜻했다. 한참 전 궁녀들이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쿠니미에게 알릴테지. 오사와가 사들인 이들이 제대로 수도를 나갔다면 추격이 늦춰질 수도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사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자고 무얼 보느냐."
"부부라 하셨으면, 저는 카게야마 사야코가 되는 건가요?"
"그런 걸 생각하고 있던건가."
"여인은 그러합니다. 폐하. 앞으로는, 앞으론 저를 사야코라고 불러주셔요."
카게야마는 사야코의 어깨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얼른 자도록 해라. 내일 아침 다시 걸어야할지도 모르니."
"..."
"사야코."
오사와 역시 카게야마 쪽으로 몸을 붙였다. 카게야마는 꿈도 꾸지 않고 금방 잠이 들었다.
27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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