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카게야마는 식사를 하다가 창가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단풍나무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침식사를 끝낸 후 옷을 갈아입어야한다는 궁녀의 재촉을 쉽게도 거절했다. 어린 궁녀였다. 얼마전까지 왕이었던 카게야마의 고집을 꺾을 비법 따위, 고작 2년을 궁에 산 궁녀에게 있을 리 없다. 카게야마는 푸르게 물을 들인 잠옷을 벗지 않고서 돌아다니다가 찬 바람이 부는 정원으로 나왔다. 궁녀가 어쩔 줄 모르며 뒤를 따라왔다.
"마마. 옷을 갈아입으셔야합니다. 갑작스레 귀인이라도 오신다면 마마의 명성에 누가 될 것입니다."
"왕노릇하다가 이 꼴이 되었는데 누가 이 이상 나를 비웃겠느냐."
"마, 마마.."
카게야마는 뒤에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궁녀를 힐끔 보곤 손을 내저었다.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니 들어가거라."
"..마마 명대로 하겠습니다."
"아참. 상궁은 어디에 간 것이냐? 오늘 계속 안 보이는군."
순간 궁녀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녀는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몸이 안 좋아 요양을 하러 갔습니다."
"..그래? 어젯밤엔 멀쩡하더니.. 거참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네."
카게야마는 무심히 중얼거렸다. 궁녀는 허둥지둥 떠났다. 이 마마의 앞에서 실수를 하게 된다면, 자신도 상궁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맑은 호수의 위로, 나무에서 흐른 단풍잎이 떨어졌다. 그리고 몇 장이 그 뒤를 이어 내린다. 잔물결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까마귀였다. 까만 날개를 퍼덕이고 부스럭거리며 단풍나무를 헤집고 있었다. 무얼 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 카게야마가 나무 쪽으로 고개를 빼들었다. 까마귀는 가지와 가지 사이에다 제 부리를 반복적으로 비벼댔다. 카게야마가 계속 쳐다보자 시선을 의식한 것 마냥 그를 향해 머리를 돌린다. 카게야마는 새와 잠시 눈싸움을 했다. 눈을 감지 않고 노려보니 까마귀는 가지에서 뛰어내리듯 날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뭘 하고 있던 거지.
신이 줬다는 단풍나무에 올라가지 말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도 없으니 상관없으리라. 카게야마는 훌쩍 나무 위로 올라가 단단해보이는 가지에 앉았다. 햇빛을 오래 받은 나무에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게야마는 곧 까마귀가 숨기고 있던 물건을 찾아냈다. 반짝거리는 석류석이 달린 비녀였다. 여자의 장신구이니 아마 이 곳에서 훔쳐냈을 것이다.
"...도둑이 들었었군."
까마귀는 반짝거리는 걸 좋아한다던데 정말인가보네...손에 비녀를 쥐었다가 제 자리에 돌려놓는다. 이미 손을 떠났는데 제 것이라 주장한들 소용없어 보였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비녀도, 왕의 자리도, 그 어떤 것도. 카게야마는 곧 흥미를 잃고 나무에서 발을 달랑거렸다. 빽빽한 단풍잎 사이에 있으니 바람도 덜했다.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어 있던 카게야마는 정원에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갑작스레 빛이 닿아 시야가 온통 부셨다.
정말로 태양같은 머리색을 한 남자였다.
카게야마는 단풍잎에 몸을 거의 가린 채로 남자를 훔쳐 보았다. 밝은 빛의 머리카락. 쉴 새 없이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눈동자는 산만하여서 아이같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위엄이 느껴지는 것은 잘 차려입은 옷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처음 보는 카게야마마저도 눈을 끌게하는 힘. 마치 태양이 그의 머리 위를 따라다니며 빛을 내리쬐는 듯 했다. 남자의 주변은 따스해 보였다.
"히나타..몇 번을 말했거든. 이건 예의가 아니라니까. 뭐, 듣지도 않겠지."
남자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있던 카게야마는 뒤를 따라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히나타라 불린 남자와 달리, 그는 아마 정원에 들어오자마자 카게야마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안경을 쓴 키가 큰 남자는 앞 서 들어온 남자만큼이나 밝은 머리색이었다. 하지만 화사하다기보단 어슴푸레한.. 마치 달과 같은.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안경의 남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남자는 비웃음같은 것을 머금더니 입을 열었다.
홀 : 역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짝 : 재밌게 됐네
"아. 이 것 참 재밌게 됐네?'
"츠키시마. 뭐가?"
"우리가 예의를 차릴 대상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히나타는 츠키시마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단풍나무 아래 푸른 옷을 걸친,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이가 분한 얼굴로 서있었다.
츠시키마 케이
○: 10
◇: 10
카게야마 토비오
□: 10 (-1)
저 자식 마음에 안 들어. 뚱한 얼굴로 옷을 갈아입던 카게야마는 이를 갈았다. 궁녀가 치장을 돕다가 놀라서 얼른 손을 뗐다.
"저, 마마..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구나."
"소, 송구하오나.."
"됐다. 얼른 끝내라."
덕분에 어제보다 간편하게 나올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기분 나쁜 티를 내며 히나타와 츠키시마를 모셔놓은 방을 찾았다.
히나타 쇼요. 츠키시마 케이. 카게야마는 가장 멀리 있는 카라스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현재의 카라스노는 왕족이 많은데 후계가 정해지지 않아 혼란한 상태라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히나타 쇼요는 카라스노의 9황자. 따라온 츠키시마 케이는 히나타 쇼요의 외가 쪽 사람으로, 역시 왕족의 대우를 해야한다. 카게야마는 겨우 그 정도만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들어서자마자 상석에 앉은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더니 슬쩍 일어섰다. 반대로 츠키시마는 거만한 얼굴을 하고는 카게야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말을 건넸다.
홀 : 의외네
짝 : 심하다
"..이건 또 의외잖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나온 말에,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반응했다. 히나타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기. 사실 나 걱정했거든. 잠자리를 해야한다고 해도 갑자기 자라고 하면 좀 힘들지. 왕으로 남장을 하고 살았다고 해서 어떤 우락부락한 여자일까 했는데."
"...?"
"야치같이 작고 귀여운 거라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지만..그래도 사람의 기대라는 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다지 좋은 평가 같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는 허락도 없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츠키시마가 다시 그 모습을 보며 비웃는 것이 보였다. 카게야마의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타나는 혼자만의 정리를 끝낸 뒤 카게야마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카게야마는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이상하리만큼 눈길을 사로잡는 남자였다.
"뭐야, 내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잖아."
"...예?"
"그렇지? 츠키시마. 처음엔 정말 남자인가 싶었거든. 나보다 키도 크고. 눈은 이렇게.."
히나타는 양 손의 검지로 제 눈을 삐죽 올렸다.
"치켜 올라가서 무서웠는데."
"...."
"윤이 나는 까만 머리카락은 카라스노에선 미인의 상징이야. 너 정말 미인이구나."
뭐라고 답해야 할 지 몰라 카게야마는 멍청한 얼굴로 히나타를 보았다. 츠키시마가 훗, 웃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히나타."
"어? 정말? 그럴리가."
히나타는 츠키시마에게서 다시 카게야마로 얼굴을 돌렸다. 진지한 눈빛과 마주하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나 미인인데?"
히나타 쇼요
○: 10 (+3)
◇: 10
카게야마 토비오
□: 10 (+2)
남자로 살며 잘생겼다는 말은 제법 들었다. 날카로운 외모는 활을 든 옆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궁녀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이야기도 들어봤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못나보이지 않은 얼굴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로 살게 되고, 누구도 외모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그 것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얼굴. 남자로서는 괜찮았지만, 여자로서는 보기 좋을 리 없다. 그렇게 제 외모를 진작 평가했던 카게야마로서는 히나타의 말에 심하게 당황하고 말았다.
"글쎄요. 히나타님. 저는.."
카게야마는 모처럼 더듬거렸다. 히나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미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알고 있으면 되겠다! 내 말이 맞지?"
"..예?"
"설마 미인이란 말을 몰라?"
"...압니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런 피곤함을 느꼈다. 츠키시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말은 저 왕님에겐 너무 큰 자극이야. 히나타. 상대를 봐가면서 말해라. 생각나는 대로 내뱉지 말고."
"..왕님이란 말씀은 불편합니다. 츠키시마님."
"아..불편하라고 한 거니까 괜찮아."
"...."
잠시 후 히나타와 츠키시마는 단패궁을 나갔다. 동갑이니 이제부터 말을 놓으라는 히나타를 거절하며, 왕님이라고 부르는 츠키시마를 상대해야했던 카게야마는
피곤하여 식사도 거르고 낮잠을 자야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깨우는 손길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마마. 저.."
궁녀의 당혹스러워보이는 얼굴로도 충분히.. 누가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오사와냐."
"예. 마마."
"...."
"들일까요?"
오사와. 왜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냐.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1. 들인다
궁녀를 내보내자 오사와가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살짝 들리는 소매 속엔 다시 보석을 가득 채워 왔을 것이다.
"폐하."
오사와가 속삭였다.
"오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계속 앞에서 기다리려 했습니다."
"..네 몸이 약한데 겨울바람을 맞으면 쓰러질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쓰러지면 폐하께서 나와 보시기라도 하겠지요. 죽는다면 폐하의 앞에서 죽으니 또한 성은입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안되었다.
"이러지 마라. 오사와. 네 아비가 너를 어찌 보겠어."
"제 아비는 지금 공무로 바빠 집에 얼굴도 보이지 않습니다. 올해 들어온 새어머니는 패물을 사는 재미에 정신이 없으시지요."
"....."
"도무지 정붙일 곳이 없던 제게 이제는 폐하 외엔 아무도 없는 것, 아시지 않나요."
오사와는 그녀로서는 용기를 내어,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문이 열리기 전 얼마나 오랫동안 서있었던 걸까. 가녀린 하얀 손은 매우 차가웠다.
"폐하. 저와 같이 가셔요. 한 번만. 제게 한 번만 폐하를 허락하세요."
홀 : 응했다.
짝 : 응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사와의 손을 한 번 쥐었다가 놔주었다. 그 걸로 뜻은 충분했다. 오사와는 애써 웃어보였다.
"그런가요..폐하는 저를 걱정하고 계시는 거죠."
"..내가 아니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오사와."
"폐하는 폐하의 일은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오늘, 누가 날 보고 미인이라 하더구나."
카게야마는 오사와를 쳐다보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생전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폐하."
"누가 나를 여자로 보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폐하.."
"그러나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그 말이 듣기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사와는 다시 카게야마의 손을 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얼굴의 카게야마가 오사와에게 물었다.
"이 마음은 내 안에 여자가 있기 때문인가?"
"...."
"평생을 강해지기 위해, 왕이 되기 위해 살았는데."
"...."
"애초부터 나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던 것이냐?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폐하."
"이리도 무른 마음이 여자라면, 그 동안 내가 썼던 왕관은 누가 써온 것이냐."
"어째서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카게야마의 손을 잡아주며 오사와는 힘껏 말했다.
"미인이니 미인이라 하는 겁니다. 폐하는 언제나 아름다우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칭찬을 좋아합니다."
"...."
"..성왕께 칭찬을 들으신 일이 별로 없으니 가벼운 말에도 흔들리시는 것이지요. 폐하의 잘못이 아니어요."
"오사와.."
그러니 폐하. 폐하께선 이 곳에 계시면 안되셔요. 폐하가 망가지실 겁니다. 오사와는 다시 한 번 제 말을 하고 나갔다. 금방 어두워져 달이 떴다. 카게야마는 달빛이 아주 밝았으면 했다. 혹시라도 오사와가 발을 헛딛여 다치지 않도록.
삼일에 한 번이라고 하였으니 모레까지는 침실에 남자가 들어올 일이 없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다시 잠옷을 입은 채로 침상에서 뒤척였다. 내일 네코마가 오는 것으로 모든 성국의 왕족들이 키타가와에 오게 된다. 그리고 나면. 카게야마는 어제 처음 보았던 단패를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쿠니미가 들어올까. 어찌되었든 간에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3 : 밤산책을 했다
4~6 : 활을 찾았다
7~9 : 책을 읽었다
0 :독차를 마셨다
바라던 대로 달이 밝진 않았다. 대신 겨울 하늘의 높은 곳에 별이 다닥다닥 붙어 반짝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얇은 잠옷만을 걸친 채 추위도 잊고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별자리를 잘 알진 못했다. 킨다이치가 하늘을 보며 방위를 아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카게야마는 헷갈렸다. 하늘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자니 문득 킨다이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기야 네가 아무리 방향을 몰라도, 밤길을 혼자 잃을 일이 없겠지. 나나 쿠니미가 네 옆에 있을테니까. 카게야마는 차가운 몸을 끌고 다른 궁들과 이어진 후원 뒤를 밟았다. 얼핏 보이는 북궁엔 어제까지 없던 불빛이 들어와있었다.
1~5: 궁으로 돌아간다
6~0: 누군가와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북궁뿐만 아니라 동궁에도, 서궁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까지 자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 이상하게도 그 불빛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기침을 하며 돌아왔다. 식은 몸이 탕파로 덥힌 침상에 들어가자 스르르 녹았다. 잠이 들기 전 카게야마는 아침에 본 까마귀의 비녀를 생각했다.
그 비녀는 누구의 머리 위에도 올라가지 않은 채 단풍나무 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왠지 카게야마는 비녀가 부러워졌다.
26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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