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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카게른/폐왕의 밤

13. 5일 <섭정궁-쿠로오>


카게야마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또다시 질리지도 않고 아침은 온다. 궁녀의 도움을 받아 씻고 치장을 한다. 왕이었던 시간이 그렇게 길었는데, 두 번째의 삶도 이토록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인사는 귀찮은 구석이 있었다.


"마마. 오늘은 어느 궁에 가시겠습니까."

"하루 정도 빼먹으면 안되나."

"아니 되십니다."


상궁은 엄하게 말했다.


"지금 와계신 분들은 단순히 귀빈들이 아니십니다. 성국의 뜻을 담아 찾아온 나라 그 자체. 존귀하시니 평국의 마지막 왕족으로서 인사를 올려야하는 것입니다."

"거창하군."


카게야마는 혀를 찼다.



1~2 : 동궁

3~4 : 서궁

5~6 : 남궁

7~8 : 북궁

9~0 : 섭정궁



"그렇다면, 키타가와들을 찾아가는 건 마지막 왕족으로 찾아가는 게 아니란 말이구나."

"...저는 다만 성국 왕족분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단패궁에 오는 이들이니 자주 찾아가란 뜻이겠지. 되었다."


카게야마는 밤사이 흐르던 유자향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어제 저녁의 쿠니미도 떠올렸다.


"...가겠다."

"마마?"

"섭정궁으로 가겠다."

"...."


상궁은 은근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통쾌해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섭정궁으로 가겠노라 말했다.



어느 궁으로 갈 때보다 긴장을 한다. 카게야마는 섭정궁으로 가겠단 연락을 하지 않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저번과 달리 예상하지 못한 섭정궁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호위와 궁녀들이 카게야마의 행차를 알렸다. 곧 안색이 나빠진 킨다이치가 카게야마를 모시기 위해 뛰어나왔다.


"미리 연락도 안 주시고 오셨습니까."

"....둘이 나와있는 꼴을 보..보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킨다이치는 카게야마를 안쪽으로 모셨다. 저번처럼 상석에 앉으라 권하여, 입씨름하기도 귀찮아 그냥 앉는다. 카게야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쿠니미는



홀 : 안쪽에

짝 : 외출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한 쿠니미는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킨다이치를 쳐다보자 킨다이치는 곤란한 얼굴이었다.


"폐하. 그는 잠시.."

"...."

"..저."

"섭정이 어디를 간건가."


그러고보니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앞에서 쿠니미를 섭정이라고 잘 부르지 않았다. 마음이 울렁거려 카게야마는 더욱 킨다이치를 채근했다.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내가 달갑지 않으면 가보겠다."

"..! 폐하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킨다이치는 쩔쩔 매다가 결국 카게야마에게 실토했다.


"실은 어제 저녁 후원을 걷고 와서는.."

"...."

"폐하를 뵈었다 들었습니다."

"어디 방이냐."

"폐하?"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킨다이치는 당혹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쿠니미가 있는 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만다. 킨다이치가 쳐다본 방향으로 카게야마는 걷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며 킨다이치는 어쩔 줄 몰라했다. 


"폐하.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나을테니."

"그 거짓말을 어찌 믿겠느냐."

"....모시겠습니다."


결국 킨다이치가 먼저 안쪽의 방문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침상에 누워있던 쿠니미는 다리를 드러낸 채 찬 수건을 대고 있다가, 카게야마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일어나려했다.


"누워있어라."


카게야마는 심통이 난 얼굴로 쿠니미의 다리를 노려보았다.


"어제 내게 그 잔소리를 하더니 결국 이 모양으로 누워있는 것이냐."

"폐하. 여기까지 찾아와주시다니요. 기쁩니다."


쿠니미는 웃으면서도 킨다이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오신다면 보기 흉하니 폐하를 모시지 말라고 부탁드렸을텐데요. 대장군."



홀 : 킨다이치 탓하지 마라

짝 : 내가 오는 것이 싫단 말이군



은근한 책망이 느껴지는 말에, 카게야마는 기분이 확 상했다. 


"내가 오는 것이 싫단 말이군."

"그럴리가 있습니까. 폐하. 다만 폐하께.."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던 쿠니미는 그만 다리를 덮던 수건을 놓쳤다. 카게야마의 뒤에 있던 킨다이치의 몸이 움찔한다. 카게야마는 눈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흉악하게 다리를 난도질한 흉터들은 쿠니미의 다리 한쪽을 전부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절박한 흔적인가. 카게야마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킨다이치는 서둘러 침상 밑의 수건을 주워 다시 덮었다.



홀 : (쿠니미) 나가주시겠습니까

짝 : (킨다이치) 나가주시겠습니까



"폐하. 잠시 나가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킨다이치가 어렵게 말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 쪽을 보았다. 쿠니미는 말이 없었다.


"..몸조리 잘 하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

"....."


자신 때문에 아픈 다리를 보며 카게야마는 머뭇거렸다. 어제 그렇게 헤어지게 진 후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때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1~3 : ....쉬어라

4~6 : (돌아간다)

7~9 : 다리..

0 : 쿠니미,



나가지 못하는 카게야마를 쿠니미는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런 꼴을 보인 것이 싫었다. 걱정하는 카게야마를 보는 것은 좋으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나 지금 카게야마는 제게 무언가 먼저 말하려 하고 있었다.


무엇일까. 걱정일까. 질책일까. 어느 것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었다. 신체를 담보로 카게야마의 시선을 붙잡는 자신은 최악이었고 최저였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일까.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조그만 입술이 달싹였다.


"....쉬어라."


카게야마는 결국 쿠니미에게 그 정도의 말만을 할 뿐이었다. 어색하여 시선을 돌리고 방을 나갔다. 문을 닫음과 동시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킨다이치는 소리내어 웃는 쿠니미를 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 우스워."

"내가 먼저 폐하를 배반했는데, 그런데. 폐하가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해 서글퍼지는 이 마음이."

"...."

"우스워서 견딜 수 없어."

"....쿠니미."

"아마 제 기분은 장군께서도 모르실겁니다."


킨다이치는 쿠니미의 다리에 묵묵히 약을 덜어 발라준 후 방을 나왔다. 킨다이치가 카게야마를 찾았을 때, 카게야마는 섭정궁의 상석에 앉아 멍하니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폐하."


킨다이치는 조심스럽게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는 몸을 킨다이치 쪽으로 틀었다. 얼굴만 돌리는 게 아니라, 몸을 틀어 제 쪽을 봐주는 것이 킨다이치는 기뻤다. 


"쿠니미는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좋아질 겁니다."

"...내가 와서 괜히 방해한 것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가라고 한 주제에. 마음에 없는 말도 잘하는군."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였다. 킨다이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괜시리 눈을 돌리다 시선이 마주쳤다. 킨다이치는 서운한 기색이 흐르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1~3 : ....폐하

4~6 : 괜찮습니다

7~9 : 정말 괜찮아

0 : 카게야마



"...폐하."

"...."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고 있다."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꾸만 귀에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와있으니 번거롭겠군. 가보겠다."

"어찌 그런 말슴을 하십니까!"

"그냥 와 본것이다. 그냥 한 번.."


섭정궁에서 마신 유자차는 카게야마의 입맛에 딱 맞았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당도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면. 


설마.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카게야마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여러가지 일로 바쁠테니 이만 가겠다. 나오지 말아라."


킨다이치가 따라나오려는 것을 뿌리치고 카게야마는, 궁녀들도 놔둔 채 힘껏 단패궁까지 달렸다. 뛰기에 적합하지 않은 신발은 곧 굽이 망가져 미끄러졌다. 속도가 붙어 지탱하기 힘들다가 그대로 정원에 넘어졌다. 카게야마는 넘어진 채로 무릎을 감싸쥐었다. 옅은 색의 옷에 피가 묻어나왔다. 


"아파.."


궁녀들이 뒤늦게 따라와 비명을 질렀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자 더 아파져 카게야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쿠니미 아키라

○: 19

◇: 23 (+2)

카게야마 토비오

□: 16 (-1)


킨다이치 유타로

○: 19 (+1)

◇: 21 (+2)

카게야마 토비오

□: 19 (-1)



카게야마는 단패궁으로 돌아와 상처를 치료받았다. 상궁은 입이 근질근질한 것을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말해보거라."


결국 카게야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상궁은 카게야마의 무릎을 싸며 한숨을 쉬었다.


"마마께서 여인의 삶에 익숙하지 않으신 것은 압니다. 하지만 생채기가 어디 남녀를 가리고 납니까."

"...."

"몸을 좀 더 아껴주십시오. 마마."

"..알겠다."


상궁은 다시 한숨을 쉬고 점심을 내오도록 했다. 입맛이 없어 껄끄러웠다.



1~2 : 후원

3~4 : 궁도실

5~6 : 서고

7~9 : 단패궁

0 :



울적하여 카게야마는 후원을 찾았다. 오늘따라 쓸쓸하게 보였다. 아마도 자신을 기다리며 어제 오후 내내 후원길을 따라 걸었을 쿠니미는, 오늘은 없겠지.



홀 : 오이카와

짝 : 쿠로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후원엔 이미 누군가 와 있었다.


"오랜만이네."

"..쿠로오님을 뵙습니다."


제멋대로 삐죽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일부러 저렇게 두는 것일까. 드물지만 잘 어울린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여전히 폭신폭신해보이는 털옷을 입은 쿠로오는 인사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할 말은 그 것 뿐?"

"예?"

"흠."



홀 : 차 잘 마셨습니다.

짝 : ...????



카게야마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쿠로오는 허탈한 얼굴을 했다.


"정말 너무하네. 단패궁 마마."

"예?"

"..하기야 좀 오래됐지."

"...무슨 말씀이신지.."

"귀띔 좀 해줘?"


쿠로오는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카게야마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만 쿠로오는 웃음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는 카게야마는 웃는 쿠로오를 보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잘 모르는 일엔 과할 정도로 솔직하네."

"예?"

"자신의 일엔 솔직하지 않더니.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렇고."



홀 : 밤에도 솔직할까?

짝 : 가끔 볼 때마다 귀여운 점이 있네



"가끔 볼 때마다.."


쿠로오는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몇 번 얼굴을 마주치지 못해 어색했지만, 오늘 보는 네코마의 황자는 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사실은 누구라도 좋으니 같이 있어주길 바란걸까. 카게야마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쿠로오를 보았다. 여전히 신기하게 뻗은 머리카락. 검은 털옷도, 머리카락도, 신기해서 만져보고 싶었다.


"귀여운 점이 있네."

"귀엽다뇨."

"자주 보면 더 귀여울까?"

"...."


그제야 카게야마는 남궁에 첫 인사를 제외하곤 한 번도 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히 잊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차..."


카게야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귀여운 마마. 차는 잘 마셨어?"


쿠로오가 웃으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어쩔 줄 몰라 고개만 붕붕 소리가 나도록 끄덕였다. 분명 차를 맛있게 마셨다. 그 선물은 첫날 밤을 보내고 받은 것이었다. 서툴게 썼던 서신까지 기억이 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완전히 잊어버린 채로 되묻고 있었으니 쿠로오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잘 마셨다니 다행이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다음 밤엔 날 뽑아줄래?"


가볍게 묻는 말에 카게야마는 눈을 깜박거렸다. 진담일까. 농담일까.



1~3 : 죄송하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4~6 : 뽑으면 오실건가요?

7~9 : 차 한잔으로 밤을 사려하십니까

0 : 대신



"죄송하지만."


카게야마는 얼어붙은 채로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이름을 보고 뽑는 게 아닙니다."

"오.."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죄송합니다."


거절을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웃음 소리가 들렸다. 예상 외로 자주 웃는 남자였다. 삐죽삐죽한 머리가 어깨와 함께 흔들렸다. 쿠로오는 눈가를 살짝 비비고 씩 웃었다. 


"죄송할 것 까지야."

"...비웃으신건가요?"

"아니. 방금 어떻게 들린 말이었는 줄 알아?"

"어떻게.."


최대한 공손하게 전한 대답이 다르게 들렸단 말에, 카게야마는 의아한 눈을 했다. 쿠로오는 장난스럽게 카게야마의 얼굴에 제 얼굴을 휙 가져갔다. 따뜻해보이는 고동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고 있다.


"죄송하지만."

"...."

"이름을 보고 뽑는 게 아닙니다."

"...."

"쿠로오님을 뽑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요."

"..!! 아닙니다!"

"하하. 이미 늦었어."

"...."


차를 받은 일을 완벽하게 잊어버려, 불평할 수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쿠로오를 보았다. 한쪽만 드러난 쿠로오의 눈썹이 찡긋 위로 올라갔다.


"조금 놀린 것 뿐이야. 너무 화내지 마. 마마님."

"...화를 낼 리 없습니다."

"응. 그러려나."


부정도 긍정도 아닌 미지근한 답변이었다. 그렇기에, 힘이 빠져 카게야마도 인상을 풀었다. 



쿠로오 테츠로

○: 13 (+2)

◇: 14

카게야마 토비오

□: 9 (+2)



"가끔은 남궁에도 놀러와."


해가 지는 것을 같이 보며 쿠로오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너무 동궁에만 가면 다들 섭섭해하거든."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닙니다."


카게야마는 서투르게 변명했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놀러와. 우린 여기서 심심하거든. 키타가와는 좀 춥네."

"알겠습니다."


그럼 마마님. 안녕. 쿠로오는 손을 흔들었다.




단패궁으로 돌아온 카게야마는 아침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졌음을 느꼈다. 상처도 이제 아픔이 덜했다. 오랜 친구보다 가끔은 낯선 이와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다시 킨다이치와 쿠니미와도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5일 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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